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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58화 (58/200)

58화-새로운 질서(8)

58화-새로운 질서(8)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야..."

으슥한 지하미궁 가장 깊은 곳. 구ㆍ마왕군의 패잔병들이 숨어들어 마왕소환술을 시도한, 루시와 신ㆍ마왕군이 발원한 일종의 근원지.

그곳엔 이제는 단 하나만이 존재한다. 바로 루시의 연산을 보조하는 거대한 신경덩어리인 루시의 뇌.

뇌에 투자되는 나노와 양분은 다른 장기들과 비교를 불허한다. 특히 이렇게 어지간한 저택 수준인 거대한 뇌를 만든다면. 루시의 계획상 이런 뇌를 앞으로 수십, 수백 개 이상 만들 것이지만 어쨌든 하나하나가 소중히 여겨야 할 귀중한 자원이다.

그런 뇌가 있는 이곳에선 루시는 자신의 몸을 움직여 바닥에 반짝이는 광석들 중 하나를 집어들고 중얼거렸다.

이 투박한 광석들은 그 내면에 상당히 강력한 힘을 품고 있다. 그리 높은 등급의 침략종은 아닌 스팀고스트의 심장과 비교할 수 없는 밀도와 효율을 가진 던전의 코어.

당연히 스팀고스트의 심장을 베이스로 한 강심보다 이 코어를 베이스로한 강심의 효율이 몇 배는 더 좋다.

이것들 모두 그가 이지연을 통해 공수해 온 물건들이다. 공짜로 얻은 것도 아니다. 그와 루시가 합심하여 행동한 대가였다.

그것에 자부심을 느낀 루시는 이 던전 코어들을 남김 없이 분해하여 그 에너지를 자신의 몸인 둥지에 저장하고 그 일부로 강심을 만들어 다시 그에게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루시가 흡수한 에너지는 전체의 70%에 달한다. 그 에너지들은, 고스란히 마왕군의 강화에 쓰였다.

[이제 움직이십시오 유리아. 서부전선이 지체되는 사이 적어도 웨어울프들의 영역 절반 이상은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상으로 올라온 루시는 주변을 둘러보며 동시에 다른 곳을 보았다.

루시가 보는 세상은 남들이 보는 것과 사뭇다르다. 무차별 양분포식으로 인해 풀 하나 없이 초토화 되어, 오직 둥지뿐인 주변 풍경은 루시가 보는 시야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마치 수 만 개 이상의 화면들을 동시에 띄워 놓은 것 같은 시야 속에서 중앙통제시스템인 루시는 그 엄청난 정보들을 동시에 보고 동시에 판단하며 군체 전부를 통제한다.

"알겠습니다 마왕님."

그 시야 한쪽엔 유리아가 있었다.

오크들과 싸우던 서부전선에서 웨어울프들이 있는 동부로 자리를 옮긴 유리아는, 지금 점령한 갈색 오크 영지를 초토화 시킨 대가로 생산한 대규모 군세를 이끌고 진군하는 중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강했던 적이 있던가.'

수 천 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실시간으로 루시의 명령을 받은 유리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그녀는 허공에 둥둥 떠서 함께하는 수많은 군세를 내려다 보는 중이었다.

마치 몸에 딱 붙는 갑주를 입은 것 같은 그녀의 몸 곳곳에 박힌 검붉은 광석들이 반짝였다. 개량되어 성능이 몇 배는 향상된 그것들이 곧 자신의 힘이 되는 외장형 심장들.

그것들이 주는 강력한 고동은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었을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이다. 자신의 심장을 산채로 적출하고, 대신 새롭게 만든 내장형 강심을 박아넣어 개조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도 오히려 좋아할 정도였다.

'더,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다.'

루시의 특징 중 하나인 끝없는 진화. 유리아는 이미 이것에 중독되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계를 넘어 강해지는 그 짜릿함에 매몰된 그녀는 이미 루시의 마왕군에 뼛속까지 충성하는 충직한 부하다.

[적 감지]

머지않아 유리아와 함께하는 군세에 감지된 웨어울프들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대규모 군세에 경악하였는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예상 승률 99%]

루시는 물론 루시가 현장 지휘를 위해 만든 하위프로그램들 역시 승률을 계산하는 과정이 기본적인 과정으로 깔려있었다.

게다가 그 결과가 압도적 우세라면, 마왕군은 전투를 속행한다. 유리아는 굳이 나서지도 않았다. 지표면을 뒤덮은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나가면 적들은 그대로 휩쓸려 쓸려나갈 뿐이었으니까.

다양한 마족과 마수의 모습은 물론 순전히 루시의 마음대로 개조되고 합성되어 탄생한 병사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모두가 치밀한 계산과 배분에 의해 나누어진 병종의 조합이다.

"이, 이럴 수는 없다. 당장 주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지원 요청을 보내라!"

그리고 대비는커녕 자꾸만 영지 내부에 침투하는 마왕군을 채 정리하지도 못한 상태로 이 광경을 목도한 웨어울프 대족장은 경악하며 자신이 무시하던 이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거지? 놈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 영지를 침략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더니! 정작 그 괴물들은 안드로말리우스의 영지를 공격하고 있다고!"

"그, 그놈들이 감히...!"

루시의 병사들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규모로 뭉쳐 웨어울프들의 영지로 진격하던 그 순간. 반대편에 있던 갈색 오크왕 플라우로스는 크게 당황하여 움찔거렸다.

현재 그가 자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대피한 영지의 주인, 서큐버스 여왕 그레모리에게 쳐들어 올 마왕군에 대항하여 영지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울테니 힘을 보태달라던 그의 요구가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흔들려선 안 된다. 놈들은 그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피에 굶주린 탐욕의 괴물들이다! 분명 이 땅도 노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계속 우리 땅에 눌러앉을 거라고? 냄새나는 오크야. 내가 네놈의 수작을 모를 것 같으냐? 괴물놈들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네가 먼저 움직여서 땅을 되찾으라고!"

분노한 그레모리는 어떻게든 오크들을 자신의 땅에서 내쫓으려 했다. 그녀 입장에선 그들이 이대로 자기 땅에 눌러앉을까 그것이 가장 불안했으니까.

'이대로면 우리가 하나로 뭉칠 수 없다. 설마 이 영악한 놈들, 이걸 노리고!?'

플라우로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파괴적으로 굴던 괴물들이 정확히 그레모리의 영지 앞에서는 날뛰지 않고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플라우로스는 어쩌면 마왕군이 단순히 본능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란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고 전율했다.

"나가. 당장!!"

자신의 친위대를 이끌고 온 그레모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오크들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마치 당장 나가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런 그녀를 넘어서 다른 마계 영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위기 상황이 필요했지만 마왕군은 그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좋다. 내가 마지막으로 제안 하나 하지. 땅을 되찾기 위해 진격할 테니 그때 네 힘을 보태다오."

"내가 왜?"

"...만약 승전할 경우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

결국 플라우로스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그에 맞는 대가를 내놓아야 했다.

"땅을 주겠다고...? 그게 정말이야?"

길게 늘어진 적발을 찰랑인 그레모리의 눈이 커졌다. 그만큼 플라우로스가 내건 제안이 끌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놈들을 공격하려면 지원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안드라스 그놈의 땅은 무주공산이다. 네가 원한다면 그것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단 뜻이지."

'이렇게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레모리, 더 나아가 이 북방 영지 영주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야 한다.'

이를 악문 플라우로스는 손해를 감수했다. 어차피 지금 아쉬운 것은 자신. 종족의 명운이 걸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한 줌의 땅이 아니라 마계 영주들을 결집시켜 적을 처리하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웨어울프들을 돕지는 않았다. 플라우로스 입장에선 자신이 손해보는만큼 이웃 영지인 웨어울프들도 함께 망하는 것이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눈빛부터 바뀐 그레모리는 잠시 생각하겠다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그레모리가 이 제안을 거절할리 없다고 확신했다.

"좋아. 힘을 보태주지."

실제로 그레모리는 채 하루가 되지 않아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다른 놈들에게도 네 제안을 전해달라고? 굳이?"

"하라면 해라. 솔직히 그것도 부족할 것 같으니까."

플라우로스는 거기서 더 나아가 그레모리를 통해 주변 다른 영주들에게도 자신의 땅을 걸고 동일한 제안을 건넸다.

'이 미친 하이에나들.'

제안한 플라우로스가 진절머리 칠 정도로 그것은 마계 영주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

다른 곳에 신경쓰느라 바쁜 와중에도 다른 영주들은 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앞다투어 연합군에 합류했다.

"마계에 이렇게 다양한 마족 군대가 모인게 얼마만이지? 대전쟁 이후 처음 아닌가?"

그레모리는 임시 집결지로 결정된 자신의 영지에 모여들기 시작한 다양한 종족의 군대를 보며 감탄했다.

과거 마왕군을 상대하기 위해 뭉쳤던 배신자들의 군대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일부나마 다시 한 번 마왕군과 싸우기 위해 뭉쳤다.

"끝났네."

팔짱을 낀 그레모리가 그 광경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경쟁에서 승리한 이 마계의 지배자들. 평소에는 티격태격해도 그런 자신들이 이렇게 뭉쳤다면 이 땅에서 이기지 못할 적은 없다. 이미 기존의 지배자마저 자신들이 죽였으니까. 그 자부심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런 자신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새로운 타입의 도전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오직 직접 겪어 본 플라우로스와 갈색 오크들만이 긴장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

"마계 영주들이 손잡은 것 같다고?"

[현재 그레모리의 영지로 수많은 세력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가설 4번대로 모종의 수단이 동원되어 서로 견제하던 영주들을 단합시킨 것 같습니다]

"그래도 꽤 빠르네. 그들 중 누군가가 나름 현명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긴 그러지 않은 게 더 신기한가? 어쨌든 왕들인데."

루시에게 소식을 보고 받은 그는 살짝 웃었다. 사실 마계 영주들이 뭉치는데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 예상한 탓이었다.

마왕군을 최우선 적으로 둔 플라우로스의 과감한 결단은 계산에 없는 변수였다.

"대응할 수 있지?"

[충분합니다]

상대할 수 있냐는 말에 루시는 담담히 답했다. 이미 계산이 다 서 있기에 가능한 발언으로 그는 루시가 이렇게 말하면 애초에 크게 걱정하지도 않았다.

"알고 있겠지만 이번 전쟁에서 이기면 슬슬 견제 받을 게 뻔해."

[그렇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필요했던 일. 때가 온 것 뿐입니다]

둘은 이미 이번 전쟁 그 이후를 보고 있었다.

루시의 목표는 이번 전쟁을 통해 갈색 오크를 완전히 궤멸시키고 그 여파로 서큐버스 여왕 그레모리의 영지까지 침략하는 것.

그쯤되면 이제 더 이상 다른 영주들도 마왕군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루시가 본격적으로 마계 전체의 질서를 뒤흔드는 혼돈이 되는 것이다.

"좋아. 작전을 실행해 루시. 전쟁을 벌여. 그리고 승리해. 네가 기존의 지배자들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가 될 때까지."

[명령 실행]

루시는 그 즉시 군체 전체를 움직였다.

"..."

자신의 몸을 직접 움직이며 미리 생산해두고 휴면 상태로 보관하던 대량의 병사들과 함께 행진했다.

지평선 너머 평범한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자신의 대적자들을 보는 루시의 눈에는 철저한 근거와 계산을 기반으로한 승리에 대한 확신이 가득하다.

그렇게, 서로 질 생각은 하지 않는 두 군세가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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