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질서의 붕괴(2)
62화-질서의 붕괴(2)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누군가에게는 배신자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영웅이라 불렸던 존재의 마지막 불꽃.
분명 그 불꽃은 강력하다. 순간적이지만 한계를 뛰어넘어 그 어떠한 것이든 불태울 수 있을 만큼 뜨겁다.
그런 불꽃을 마왕군은 아직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죽어라! 더 이상 이 땅에 마왕은 존재할 수 없다...!"
루시를 지키기 위해 달려든 상위급 병사들을 일격에 밀쳐내고 베어낸 플라우로스가 뒤로 밀려나는 아군 병사들과는 달리 오히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스스로 마왕군의 품으로 들어가는 꼴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는 지금 하나의 불꽃 그 자체가 되어 그 화력을 뿜어낼 생각 뿐이었으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그 분노. 어디 뿜어보십시오."
마왕군의 정수로 만들어진 단단한 갑주와 가죽들이 무색하게, 짓이겨지고 절단된 신체 조각들이 사방에 흩날린다. 동시에 자신의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고 달려오는 그를 향해 루시는 피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정면으로 그와 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리석고 오만한! 네년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플라우로스는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승기에 취한 루시가 제대로 견적을 보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설령 여기서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마왕을 죽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생각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애송이 마왕!"
플라우로스는 검을 들고 덤벼드는 루시를 향해 땅과 대기가 갈라지는 극강의 일격을 날렸다.
루시는 그것을 피하고 자신 역시 검붉은 참격을 쏘아냈지만, 순간 지면을 뒤틀어 돌기둥을 뽑아낸 그는 그것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 루시를 향해 대검을 내려찍었다.
"무시하지 마라. 우리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싸우지 않은 날이 없느니라."
그 일격은 루시의 검을 단숨에 부러뜨리고, 루시의 무릎을 꺾이게 만들었다. 터져나온 충격파에 흙먼지 섞인 돌풍이 사방으로 몰아치고 무릎 꿇은 루시를 중심으로 땅이 쩍쩍 갈라지며 반경 수 십 미터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메이아에 비하면 너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약하다."
플라우로스는 터져버린 팔에서 체액을 흘리던 루시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강한 충격과 함께 흉부는 금이 쩍쩍 갈라지며 짓이겨지고, 날아가 쳐박힌 루시는 입에서 체액을 뱉어내며 헐떡였다.
플라우로스는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루시의 앞에 서서 검을 들어올렸다.
"...이겼다고 생각합니까."
"웃기는군. 설령 네년 다음의 마왕이 나타나도 우리는 또다시 이긴다. 지금처럼, 다 자라기 전에 짓밟아 으깨버릴 것이다."
한쪽 눈만 겨우 뜬 루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니 플라우로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이 여유는 대체 뭐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은 살짝 흔들렸다. 마왕임에도 끝까지 존대를 고수하는등 묘하게 거슬리는 루시의 말투도 그렇고 루시에게선 자신과는 다른 묘한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 끝났어. 네년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 불안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는 고함치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루시의 팔다리가 모조리 토막나 떨어져나가고, 그는 승리를 확신하며 마지막으로 몸통만 남은 루시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고통을 줄 목적이었지만 정작 루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그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제 목을 베어도 당신 역시 죽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마왕을 죽일 수 있다면. 내 뒤는, 훌륭한 동족들이 마저 이어갈 테니까."
루시의 도발을 무시한 그는 끝내 루시의 목을 베었다.
허공을 나는 검은 머리칼. 체액을 뿌리며 날던 루시의 머리는 철퍽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비록 주변을 애워싼 수많은 마왕군을 보며 그는 자신의 최후를 예상했지만 그래도 사명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후련했다.
"다시 질문합니다. 이겼다고 생각합니까."
"!!!"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바닥을 구르던 루시의 머리에서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그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어, 어, 어떻게..."
"그 육체는 결국 하나의 단말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방을 감싸고 지켜보던 마왕군. 그 틈에서 등장한 또 하나의 루시. 그 루시는 태연히 걸어 나와, 경악한 플라우로스의 앞에서 잘려나간 자신의 또 다른 머리를 주워들었다.
자신을 보는 똑같은 2개의 얼굴. 플라우로스는 순간 사고가 정지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아 입을 벙긋거렸다.
"현실을 직시하십시오."
"데이터를 성실히 수집하십시오."
[당신이 죽여야 하는 새로운 마왕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마왕을 죽이려면]
[모든 개체를 죽여야 할 겁니다]
[병사 하나하나]
[세포 하나하나]
[그렇지 않으면 나는, 마왕 루시는]
[언제고 다시든 부활할 수 있으니]
비단 정면의 루시'들'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빛나고 있는 모든 마왕군의 붉은 안광이 일제히 불타올랐다.
"으, 으아아..."
사방에서 겹쳐 울려퍼지는 수많은 목소리에 그것을 둘러 본 플라우로스는 패닉에 빠져 비틀거렸다. 몸은 미친듯이 떨리고, 눈은 격하게 흔들렸다.
충격을 받은데다 기세에서 완전히 짓눌린 것이다.
루시의 진정한 정체를 깨달은 순간 그저 괴물이라고 여겼던 병사들마저 강렬한 힘을 품고 있는 하나의 군체로 인식되었으니, 아무리 경험 많고 강한 영웅이라 해도 거대한 군체가 가진 존재감을 이겨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자폭을 위해 혼자 덤벼든 그 순간부터 당신의 패배는 99%의 확률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당신의 종족이 멸절할 확률 역시 86%로 크게 상승했습니다."
루시는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동시에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마왕군이 한 치의 오차 없는 균일한 움직임과 함께 적의를 드러내며 그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전군 돌격]
그리고 마침내 명령이 떨어졌다.
오직 하나의 대상을 죽이기 위해 몰아치는 그것은 하나의 검은 파도였다. 설령 일인군단이라 불리는 영웅이라도 지쳐버린 상태에선 절대 견딜 수 없는 거대한 파도.
"..."
더 볼 것도 없다고 판단한 루시는 파손된 육체에서 강심을 적출해 새 육신에 장착한 후 아예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적들의 구심점이 될 존재를 잡긴 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니까.
***
"갈색 오크왕 플라우로스는 처단. 북부 연합군 역시 패퇴시켰으니 이번 전투는 오차범위 이내 아군의 승리입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간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
"...물론 계산의 영역을 벗어나는 변수들이 여럿 등장한 것이 사실입니다."
루시는 흘끔 눈을 피했다. 그 말대로 나는 처음에 루시가 지는 줄 알았다.
적장인 건장한 오크에게 루시가 두들겨 맞고 목까지 베이는 장면에선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일임을 알고 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을 정도였다.
"효율 좋은 속임수였다지만 그래도 놀랐어."
"최적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불편하시다면 고려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그보다 왜 처음에 네 예상보다 많은 연산량이 발생한거지?"
내 말을 생각보다 크게 받아들이는 루시의 말에 고개를 저은 나는 화제를 바꿨다. 다른 모든 것이 예측된 범위 내였으나 유일하게 범주를 벗어난 것이 바로 연산량의 과부하.
루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서로의 대병력이 충돌하니 루시는 연산력의 한계로 마치 렉 걸린 프로그램 마냥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상황에서 루시가 답지 않은 억지를 부리고 용케 그 효과를 봤다지만 사실 그건 임기응변일 뿐 계획된 것이 아니다.
"자체 검진 결과 실상황에 쓰이는 프로세스가 예상치보다 더 복잡해진 탓으로 보입니다. 더 복잡해진 병력구성, 전투법, 전술등이 복합적으로 섞인 탓에 연산량이 급등했습니다."
"그럼 해결 방법은?"
"기존처럼 더 효율적인 새로운 프로그램 언어를 이식하거나, 연산에 필요한 신경체 비중을 더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루시는 이미 원인과 해결법 모두를 찾아낸 상태다. 실제로 루시는 연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지구의 프로그램 언어를 습득하는 등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다만 이미 최신화된 모든 것을 배워간 루시가 더 이상 지구에서 배워갈 것은 없다.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닌 이상.
"내 생각엔 결국 뇌의 효율과 용적을 더 늘려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것이 맞습니다."
화면 속에서 고개를 끄덕인 루시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더 많은 뇌, 더 큰 뇌.
결국 문제 해결의 흐름은 그것을 만들 양분으로 귀결된다.
"더 많은 양분, 더 많은 에너지."
나도 루시도 항상 고민했다. 루시는 항상 양분 부족에 시달려 왔으니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지금까지 루시는 오직 포식만으로 양분을 보충해왔다. 마나 흡수나 내가 주는 던전 코어는 전체의 5%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광합성도 불가능하고.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게 대규모 농사뿐인가."
루시의 능력이 만능은 아니다. 아직 식물체의 데이터를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루시는 생산자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생산자를 인위적으로 키워내는 것 역시 불안정하다. 루시는 두 개 영지를 점령한 이후 이제 겨우 그곳들을 안정화 시켜나가는 상황에서 양분 공급을 위해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대규모 밭에 공을 들이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면 결국 직접 먹어치울 먹이를 생산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광합성이 딱인데."
"생육과 재배에 가장 효율적인 품종을 찾아 대규모로 재배하는 것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마계의 주인인 마족들도 농사를 짓는 판국에 이 부분은 새로운 개념 자체를 습득하는 게 아닌 이상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한계가 명확하여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모양새가 웃기긴 하지만 이 자연에 농사를 짓는 건 인간 말고 다른 생물들도 몇 있으니, 농사라는 게 그리 이상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이제 슬슬 나도 움직여야 하거든. 날짜가 잡혔어."
그리고 사실 나도 이제 바빠질 예정이었다.
"협회장님이 저에 대해 모르시는 건 확실하죠?"
"그럼요. 그 누구에게도 말 안했어요."
루시가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나는 약속 시간 전에 이지연을 만났다.
평소와는 달리 평범한 회사원 같이 검은 정장을 입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사실 나도 대충 입고 다니던 평소와는 옷차림이 좀 다르다.
"덕분에 꼬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귀찮게 되었지만."
"그건 죄송합니다."
"상관없어요. 감수할 일이죠."
멋쩍게 웃는 그녀는 던전 코어 일로 요주의 인물로 올라선 상태다. 내 정체를 숨겨주는 대신, 그녀가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던전 코어를 활성화 하여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알려진 존재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그녀뿐. 관심이 쏠리는 게 당연하다.
"코어 에너지는 이제 시작단계라서 사실 그렇게 빡빡하진 않아요. 그보다는 오늘 면접이나 잘 신경 쓰세요. 협회장님에겐 제 어릴적 친구라고 뽑아달라고 잘 말해두긴 했는데 그래도...크흠."
"기본은 할 줄 압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그녀가 헛기침을 하는 모습에 나는 쓰게 웃었다.
현재 나는 그녀가 속한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상태. 그녀를 따라다니며 던전이나 게이트를 돌아다니기 위해 지원했고, 그녀는 인맥의 힘을 보여주며 대학 졸업도 못한 나를 최종면접까지 붙여놓았다.
이 모든 것이 내 의지로 이어진 일이다.
루시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마계 영주들을 향해 선전포고를 날린 것처럼 나 역시 이제는 내 목적을 향해 앞으로 나설 테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