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질서의 붕괴(3)
63화-질서의 붕괴(3)
"세상이 변했습니다. 이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는 살아갈 수 없죠. 마스크가 일상이 된 모습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적응하고 살아남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격변한 세상에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 협회장이 된 백승철이 국민들에게 한 말이 뇌리에 남아있다.
변화와 생존, 살아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종의 법칙. 마계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생존경쟁을 이어가는 루시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생존을 위해 적응하고 투쟁한다.
이제 나도 마찬가지다. 루시라는 힘이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상, 지금처럼 휩쓸려만 다닐 수는 없다.
"지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별 기준을 엄격하게 둔 것은 이해해 주시길. 아시다시피 각성자들과 함께 험지를 다닐 확률이 높기 때문에, 회사는 최대한 가려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포함해 면접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게 회사 관계자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는 각성자들을 케어해줄 일종의 매니저를 뽑는 자리. 나는 이지연의 입김을 통해 남들에 비하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스펙으로도 단숨에 이곳에 도달했다.
하지만 각성자 전담 담당자에게는 일반적인 연예인 매니저와는 다른 기준들이 요구된다. 군 복무 경험, 강인한 체력과 신체 및 정신적 건강함 등등.
아무리 안전에 신경쓴다 해도 완벽할 수는 없는, 말 그대로 괴물들과 싸우는 전장 근처까지 가야 하는 일이라 그렇다.
"정각이 되면 시작되고 한 번에 5분씩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럼."
관계자는 우리를 슥 둘러보더니 다시 이 대기실을 나갔다. 이곳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대기중이다. 위험한 일인만큼 돈을 많이 주니, 역설적으로 사람이 몰렸다.
"사실 이미 결과가 정해진 면접이었는데, 많이 떨렸어요?"
"살면서 면접은 봐 본적이 없으니 더 그렇죠."
오후 시간, 면접이 끝난 내게 이지연이 먼저 연락하더니 만나자고 했다. 덕분에 인적 없는 비상구에서 그녀를 만난 나는 한숨부터 쉬었다.
아무리 그녀의 입김이 작용했다지만 구색은 맞춰야 했으니 최근 면접 준비한다고 고생한 건 사실이니까.
"상관없어요. 내가 사장님한테도 창현씨 아니면 절대 싫다고 못박았으니까. 회사는 이제 내 말 절대 무시 못해요."
그녀는 히죽 웃으며 무시무시한 말을 뱉어내었다. 이곳 유성의 사장이자 협회장인 백승철...결코 쉽지 않아보이는 남자였는데 그런 사람마저 이겨먹는 게 지금의 이지연이다.
내가 목숨을 구해준 초짜 각성자는 1세대 각성자이자 국민적 영웅이 되어 그 입지가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
"예정대로 창현씨가 저와 함께 움직이게 된다면 당장 다음 주에, 강원도에 위치한 대형 던전에 들어가게 될 것 같아요. 학교는 잘 처리 된거죠?"
"취업계 냈습니다. 이제 출석 안 해도 됩니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은 나와 달리 그녀는 어딘가 들떠보였다. 각성자와 일반인의 차이인가 싶어 나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이거."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휴대폰을 보여주며 웃었다.
"던전 코어를 활성화 시켜주는 대가로 받은 돈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어요. 살면서 가져본 적 없는 큰 돈이...하지만 이건 제 돈이 아니죠."
"많긴 많군요."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도, 나도 불과 얼마 전까진 평범한 신입사원과 학생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생전 처음 보는 자릿수의 돈이 그녀의 통장에 쌓여 있다.
내 제안대로 이지연은 던전 코어를 받아서 활성화 시켜주는 대가로 금전적인 이득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 이 지구상에 코어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건 이지연, 정확히는 나와 연결된 루시 뿐.
이제 겨우 연구 시작단계라지만 어쨌든 우리가 코어랍시고 건네 준 강심에서 추출한 에너지로 터빈을 돌려 결코 적지 않은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 전 지구에서 코어가 몰리고 있었다.
"어째 기쁘지 않은 표정인데요."
"기쁜 건 맞습니다. 하지만 뭔가 확 와닿지는 않네요. 그건 이지연씨도 마찬가지 같은데."
"...그렇죠.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우리 모두 돈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괴물들과 싸워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루시를 키우고 돕는 것이다.
차라리 이지연의 입지가 상승하여 얻을 수 있는 혜택과 이용할 수 있는 각종 권한들이 더 끌리지 돈은 그 부산물에 불과하다.
배달비 하나 아까워서 음식도 못시켜 먹던 가난한 학생이 많이도 변했다. 문득 든 그 생각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
"강원도에 나타난,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 던전. 그 크기는 조사된 부분만 어지간한 동네 수준이래요."
"그걸 잘 해결한다면 해외로도 갈 수 있다는 게 확실합니까?"
"네, 이제 슬슬 정식으로 결성될 것 같은 국제각성자연합. 그곳에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가장 큰 사업이 바로 자유로운 각성자 파견이니까요. 지금 당장 각성자 전력이 부족해서 궤멸 위기인 나라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함께 탄 차 안. 차량이 빠르게 도로를 가로지르는 와중에 조수석에 앉은 이지연은 자신이 직접 브리핑을 해주었다.
사실 그녀를 수행하는 건 예상대로 면접에서 합격하고 이제 정식으로 입사한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어차피 우리 관계는 평범한 관계가 아니니까.
그녀도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침략종 중 하나가 바로 화염포식자...근데 어째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죠? 그 포식 능력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해두죠."
내가 안 그래도 주시하고 있던 이번 던전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신종 침략종 화염포식자.
선발 탐사대는 놈들이 불을 먹어치우고 그것을 에너지 삼는 괴물이라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지도 모른다. 침략종들은 마계의 마수들 이상으로 워낙에 기이하고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었이니까.
하지만 그 화염포식자는 지금의 내게 실마리가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말 그대로 '다른 것을 먹는' 생물이다. 이것이 어쩌면 현재 루시에게 닥친 양분 수급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대형 던전이라서 창현씨도 들어갈 수는 있을거에요. 하지만 대놓고 활동하기는 힘들텐데."
"듣자니 방송팀도 들어가고 꽤 복잡할 것 같은데 어려울 건 없죠."
이지연은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걱정했으나 나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방송팀...솔직히 아직도 시끄럽더라고요. 저도 굳이 필요한가 싶기도 한데."
"저는 꼭 필요하다 봅니다."
던전을 포함, 세상을 덮친 격변은 분명 우리의 일상과 목숨을 위협하는 재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이 싸우기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단결할 수 있는 소재가 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재앙 자체.
재앙과 싸우고 멋지게 격파하는 영웅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힘이 되기에 이쪽은 그것을 포기하는 게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기세.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루시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기세를 끌어올려 루시를 몰아붙이던 마계 연합군이 기세가 무너지자마자 단숨에 밀리던 모습을 보면 감정을 가진 존재에게 마음의 힘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 알 수 있다.
"먼저 가시죠."
"그럼 가서 기다릴게요."
던전 출몰지로 밝혀진 강원도 산골의 작은 마을. 주민들은 모두 대피하고, 군대와 경찰이 동원되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그곳에 도착한 나는 주차를 이유로 이지연을 먼저 보냈다.
"..."
주차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운전 경험이 거의 없는 운전 초보지만, 운전 자체도 사실 굉장히 수월하게 했다.
[주차는 끝났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고마워 루시."
웅-하고 울리는 거치대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 동시에 내 옷등으로 의태해 지금까지 운전을 보조해준 나노ㆍ오메가가 순간 꿈틀했다.
[전송해주실 침략종을 처단할 부대를 이미 각 포인트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전력상 미지수인 화염포식자를 제외, 그라운드스키더, 데스크롤러 등은 충분히 처치할 수 있는 병력들입니다]
이지연이 내린덕에 말문이 트인 루시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보고를 쏟아내었다. 작은 화면 속에서 보이는 화면들도 루시가 이번 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탐사가 덜 되긴 했지만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거야.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정 위급하시다면 이지연 그 여자를 방패로 쓰고 도망치십시오]
"그런 일 없었으면 해."
이지연을 방패로 쓰라는 말에 피식 웃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루시의 자아가 조금씩 성장함은 분명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루시에게 나를 제외한 다른 인간은 그저 써먹을 도구, 혹은 지나가는 자연물 1에 불과하다.
웃고, 울고, 짜증내는등 점점 풍부해지는 감정 표현 속에서도 유독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바뀌질 않는 것 같았다.
'바꿔야 하나?'
내가 걱정하는 요소 중 하나기도 했다. 루시가 이 스탠스를 계속 유지하게 방관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좀처럼 판단하기 힘들었다.
"출발 전에 다른 이야기나 하자. 현재 그쪽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패퇴한 마계 연합군은 마계 영주 그레모리의 영지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아군은 웨어울프들과의 전투에 전력을 집중하는 한편 점령지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계획대로인가..."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을 죽였지만 상대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종들이다.
루시는 계속된 승리를 위해 계속해서 플랜을 세워가며 그들의 방어를 두드리고 동시에 자신의 힘을 계속해서 늘려가는 중이었다.
웨어울프들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는 이유도 그것이다.
이제 마계 영주들이 북부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루시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들이 본격적으로 반격하기 전 적의 전력을 최대한 줄이고 양분을 얻을 수 있는 땅을 더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획득하고 있는 정보상 북부 영지의 영주들이 저희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계 전체가 나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북부 영지 영주들 전체를 적으로 상정하고 계산하는 중입니다]
"결국 양분 때문이란 소리잖아. 이번에 해결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루시가 어떻게든 몸을 비틀려는 것은 현재 주어진 자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루시조차 해결법을 찾지 못한 지금 그걸 해결할 방법은 나뿐이다.
내가 루시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내가 직접 안전하고 따뜻한 방구석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움직인 것이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