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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64화 (64/200)

64화-질서의 붕괴(4)

64화-질서의 붕괴(4)

"저기 보이네요."

"...흉흉하군요."

안전지대에 차량을 주차한 나는 이지연과 함께 던전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각성자, 군인, 기자, 정부 관계자 등이 뒤섞여 어수선한 산골 마을 한복판에 보이는 거대한 균열.

게이트와는 다른 그 공간의 균열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아무런 변화 없이 가만히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왔구나.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편하게 대기하고."

그곳 옆에서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자 회사의 사장인 백승철을 만났다.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 하느라 바빠 보이는 그는 나를, 정확히는 이지연을 보고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현재 이 나라에서 상당한 유명세를 자랑하고 있는 그가 각별히 신경을 쓸 정도로 이지연은 중요한 전력이었다.

"관심도가 상당하네요."

"우리나라엔 처음 나타난 대규모 던전...이것을 위해 6개 회사 96명의 각성자가 모였으니 그럴 수밖에요."

이지연 정도의 사람이 관심을 덜 받을 정도로 지금 이곳에 다른 유명 각성자들도 한 둘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언론과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마냥 가볍고 밝은 건 아니었다.

사람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저 멀리 보이는 직경 수십 미터의 균열을 신경쓰고 있으니까. 겨누어진 포신과 총구, 일반인들이 입고 있는 안전모나 방탄조끼등.

말 그대로 폭풍전야다.

"대형 던전은 말 그대로 하나의...지역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외국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탐사대가 2박 3일간 각종 장비를 동원해 탐사했는데도 그 끝을 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저희도 최소 사흘 이상의 시간을 두고 공략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돌입 준비가 끝났을 때. 백승철이 나서서 카메라와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화면 너머나 안전한 앞쪽이 아니라 돌입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뒤쪽에서 들었다.

"게이트가 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방어전이라면 던전 공략은 우리가 적들을 공격하는 일종의 공격...이미 게이트 발생 횟수와 던전 공략 횟수의 상관관계는 분석이 되었습니다.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 저희는 던전 공격을 통해 차후 발생할 게이트를 최대한 줄일 것입니다."

백승철은 던전 공략이 꼭 필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 효과가 외국의 사례를 포함해 입증되기 시작하니 여론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공략한 던전 안쪽에서 발견되는 신세계의 자원들 혹은 전리품들 그것을 원하는 것도 맞을 것이다.

"효율적인 공략을 위해 던전 입구 바로 앞에 일종의 베이스가 만들어져요. 방송팀도 군인들도 연구진들도 전부 그곳에 있을테니 창현씨도 그곳에 있어야 해요."

"위험한 짓은 안 할 겁니다. 걱정 마시길."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백승철의 말이 끝나니 이제 정말로 때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출발하려는 때 나는 팀을 이뤄야 하는 다른 각성자들과 합류해야 하는 이지연을 달래서 보냈다.

그녀는 걱정되는 모양이지만 나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들어갑니다!"

곧 수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이 던전 입구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차원문을 넘는 익숙한 감각. 그 끝을 알 수 없는 균열을 넘은 이후로 보이는 것은 어둑한 먹구름 아래 깔린 척박하고 음산한 풍경이 전부였다.

"지금부터 군의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이미 선투입한 정찰팀이 대강의 베이스는 구축해 두었습니다. 차량은 정해진 위치에 주차하고, 인원들은 절대 개인행동 없이 위치에 있도록 합니다!"

확성기를 잡은 군 지휘관이 긴장한 얼굴로 사람들을 통제했다. 지금 이건 훈련 따위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실상황이다. 긴장하고 예민해지는 게 당연하다.

"으응? 어디가 창현씨."

"시키신 일이 있어서요. 어차피 저희 일은 여기서 대기하는 게 전부니 괜찮지 않습니까."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틈에 슬쩍 자리를 비우려던 나는 함께 온 다른 매니저의 부름에 대충 둘러대었다.

우리 임무는 전방에 나가있는 소속 각성자들의 소식이 들려오는대로 밖에 있을 회사측에 즉각즉각 전하는 것 뿐. 사실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라 희망자만 들어왔고, 우리 회사는 나를 포함 단 둘만 자원해서 들어왔다.

"되게...침착해 보이네. 무섭지도 않아?"

그는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과연 평소에도 특전사 출신이라며 사내다움을 자랑하던 그 역시 지금은 창백한 얼굴로 위축된 상태.

반면 던전을 몇 번이나 경험해본 내 마음가짐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냥 믿으면 됩니다. 앞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들을."

나는 그에게 한 마디 해주고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사전에 짠 메뉴얼이고 뭐고 어수선하고 복잡한 건 사실이니 은근슬쩍 인적이 없는 간이 천막 옆에 몸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루시. 시작하자."

[명령 실행. 호흡, 맥박 모두 정상이십니다]

나는 그곳에서 휴대폰을 들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루시의 답신과 함께 내가 입고 있던 옷이 변형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 얼굴을 포함해 신체 전부를 덮어가는 얇고 부드러운 무언가.

[은신 완료]

내 몸을 덮은 이후 의태와 위장술을 펼치는 생물들에게서 추출한 능력으로 주변 환경과 완전히 겹치는 은신을 끝낸 나노ㆍ오메가 덕에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베이스를 벗어나 앞으로 향한 각성자들의 뒤를 쫓을 수 있게 되었다.

***

"어서 이송해...빨리!"

"다들 비켜! 지금 출혈이 너무 심해!"

다급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그것들만큼은 선명히 들렸다. 게이트든 던전이든 세상을 침략해오는 끔찍한 괴물들과 맞서다 보면 사실 굉장히 흔히 들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대체 이게 뭐지?"

그런 그를 내려다 보는 중년의 동료 각성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그의 상처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썩어가고 있는 그의 상처는 강렬한 부패의 권능이 발현한, 결코 치료할 수 없는 일종의 저주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에단이 어떻게..."

"저, 저희를 감싸다 대신 맞았어요. 정신 차릴 틈도 없이."

그가 이송되어 온 던전 입구 근처로 달려 온 한 무리의 사람들은 멘탈이 반쯤 나간 동료 각성자들의 말에 경악했다.

지금 죽기 일보직전인 그는 나라가 보유한 가장 강하고 유명한 각성자 중 한 명. 유독 '영웅'을 좋아하는 그들의 나라에선 이미 그 누구보다 유명한 영웅 중 하나였으니, 그런 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이 던전 안쪽에 상상도 못한 괴물이 산다고. 놈들은 단순한 괴물들이 아니야. 다 죽을거야. 막을 수 없어."

주저앉아 넋을 잃은 다른 각성자는 소도시 만한 크기를 가진 이 대형 던전의 끝에서 본 존재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단순한 괴물을 본 반응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건 나중에 확인합시다. 일단은 에단을 살려야 하니."

"대체 어떻게 살린다고 그러는 겁니까? 이 상처를 보십시오. 이게 치료가 가능할 것 같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연 검은 정장 사내의 말에 이미 패닉 상태였던 각성자들은 반발했다.

각성자들이 보기에 정부 관계자들은 이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고 떠드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불가능하지 않지. 당신들에게 지급한 성수는 그저 기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국, 국장님!"

국장이라 불린 남성이 균열을 넘어 나타난 것이 그때였다. 다만 그의 곁에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금발의 젊은 여성도 함께였다.

'누구지?'

순간 현장의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실시간으로 의식을 잃어가던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탁드리죠. 에단을 살려주십시오."

국장은 정중하게 옆에 있던 여인에게 부탁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당황했으나, 이어지는 광경은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이럴수가. 상처가...!"

그녀가 손을 뻗자 손에 낀 은반지가 은은히 빛나더니 따스하고 강렬한 황금빛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계속해서 썩어가던 상처에 깃든 부패의 권능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그 깊은 상처를 빠르게 치유해갔다.

기적. 절망했던 사람들에겐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운 힘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멍하니 자신의 상처를 더듬었다. 새살이 돋은 상처는 이제 전혀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국장 넬슨은 그의 말에도 답하지 않고 힘을 거둔 마리사를 뒤로 뺐다.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에단, 그리고 다른 분들도. 우리가 가진 힘은 적지 않습니다. 부디 이 땅을 침략하려는 적들에게 응징을 내려주시길. 지금처럼 우리 모두가 당신들을 도울겁니다."

국장은 그녀의 정보를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을 돌렸고 각성자들은 차마 반발하지 못했다. 어쨌든 미 정부에게서 그들이 받고 있는 특혜는 적지 않았으니까.

"당연합니다."

애초에 벌떡 일어난 에단 같이 사명감과 영웅심으로 가득찬 사람이 절대적으로 충성하니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습니다. 설마 동료들을 지키려고 자기 몸을 던질 줄은 몰랐는데...에단은 귀중한 인재니 잃으면 안 됩니다."

"반지는 이제 못 써요. 다시 받아야 해요."

기적 같은 힘으로 부상 입은 각성자를 살려낸 이후, 소음도 외부의 시선도 차단된 차량 내부.

그곳에 함께 앉은 국장 넬슨과 마리사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밖을 바라보며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받을 수 있습니까?"

"내일 쯤에는."

"그럼 상관없지요."

그녀의 목에 걸린, 잠금장치까지 걸어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휴대폰을 흘끔거린 그는 품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었다.

"이게 그 샘플입니다. 한국에서 가공에 성공한 던전코어. 대체 어떻게 한건지 모르겠지만 자극을 주면 적지 않은 전기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굳이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릴 필요도 없죠."

"전 몰라요. 모든 것은 이 안에서 이루어지니까."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저은 마리사는 자기 손바닥만한 그 돌조각을, 자신의 휴대폰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화면이 켜진 휴대폰 안에는 게임으로 보이는 인터페이스가 가득한 화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사품 전송]

마리사는 아이콘 중 하나를 터치해 작동시켰다. 그러자 휴대폰에서 빛이 터져나오며, 그녀가 올려둔 코어 조각은 단숨에 현실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조사해서 결과를 알려주겠죠."

"...좋습니다. 만약 우리도 활성화에 성공한다면 큰 도움이 될겁니다."

마리사는 휴대폰을 들고 게임에 열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흔한 게임 페인처럼 보일 몰입도였다.

그러나 국장 넬슨이 그 모습을 보고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키듯, 사실 지금 그녀는 결코 가벼운 게임 따위를 하는 게 아니었다.

[대성녀 이벨리아ㆍ5차 각성ㆍlv 150]

"여신께서 내려주신 물건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내도록."

화면 속. 찬란한 백익을 흔들거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은 겉모습일 뿐이다. 대륙 전체가 휘말린 전쟁에 벌써 두 번이나 참여해 그 끝을 모르고 성장하는 대성녀 이벨리아는 이미 규격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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