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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65화 (65/200)

65화-질서의 붕괴(5)

65화-질서의 붕괴(5)

"지금까지의 던전이 다 그랬지만 역시나 지구도, 그렇다고 마계도 아니야. 어딘가 기분이 이상하네."

각성자들의 흔적을 뒤쫓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은은한 보라빛이 깃든 흙바닥과 기암괴석들에 우중충한 하늘.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식물들까지.

마계 덕분에 다른 세계의 풍경에 익숙한 내게도 영 꺼림직한 풍경들이었다.

[다시 한 번 탐지 마법을 발동하겠습니다]

루시는 그 상태에서 마력을 탐지하는 탐지마법을 발동했다.

내 몸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옅은 바람, 곧 루시는 미세한 흔적말고는 아직 느껴지는 것이 없으니 흔적을 따라 앞으로 더 전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넓기는 굉장히 넓군."

내 걸음은 쉬지를 않는데도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를 뚝 떼어 온 것 같은 어지간한 동네 하나보다 크다는 거대한 공간. 구조와 통로가 정해져 있어 금방금방 적들을 만나 싸울 수 있는 작은 던전들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오픈월드를 달리는 게임 캐릭터가 된 느낌이다.

[전방에 마력 다수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계속해서 마력 탐지를 시도하던 루시의 탐지망에 각성자들로 추정되는 마력들이 다수 감지되었다.

"....해!"

"측면에서도 온다!"

이제 그들의 고함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다수의 괴물들과 평원에서 싸우고 있는 각성자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아군과 싸우고 있는 괴물들의 숫자 역시 거대한 던전 크기에 맞먹는다. 족히 수 백은 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전쟁이다.

"그라운드 스키더."

나는 그 괴물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겉보기는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이족보행을 하는 창백한 청회색 피부의 괴물. 그러나 특이한 점은 놈들은 각각 마치 서핑을 하듯 돌조각 위에 올라타 지면 위를 자유자재로 휘젓고 다닌다는 것.

그 속도가 어지간한 전동기와 맞먹는 것 같았다.

[부족한 데이터로나마 계산해보면 각성자 측의 예상 승률이 83%입니다]

"그래? 나도 질 것 같지는 않아."

루시는 그 상황에서 각성자들의 승리를 점쳤다. 나 역시 그들이 이길 것이라 직감했다.

아무리 상대가 더 많아도 아군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전력을 모두 긁어 온 최신의, 최강의 전력.

부지런히 그들을 훑던 내 눈에 순간적으로 찾고 있던 이지연이 보였다. 나와 함께 싸울 때처럼 가장 앞에 서서 싸우는 그녀는 말 그대로 철괴.

다른 화려한 능력자들과는 달리 맨 몸으로 버티고 서서 손에 든 거대한 금속 방패로 공격해 오는 놈들을 하나하나 때려잡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놈들이 전멸할 것입니다]

"우회하자. 우린 샘플이나 몇 얻으면 족해."

넋놓고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루시의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각성자들을 따라잡았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그 뒤를 따라다니며 취할 것을 취하는 것 뿐이다.

***

"...후. 쉽지 않은데."

"통신은 양호합니다. 조장들은 조원들 챙겨주십시오. 피해 상황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 남은 적이 아군이 쏘아낸 화염포에 맞아 죽었을 때. 여기저기서 숨을 헐떡이던 그들은 쉴 틈도 없이 현황을 확인하고 사방을 경계해야 했다.

지금까지 지구의 인류가 쌓아 온 그 어떤 전쟁 데이터도 도움이 되지 않는, 신유형의 전쟁. 아무리 초인들이라지만 그 최전선에 선 이들에겐 행동 하나하나가 부담이고 스트레스였다.

"저희는 사망 1명, 부상 3명인가요?"

방패를 내려놓은 이지연은 자신이 맡은 조원들을 챙겼다. 사망자도, 심한 부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는 부상자도 있다.

그것을 확인하는 그녀는 겉보기엔 덤덤해 보여도 그 마음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정신적 침식.

초인인 각성자들의 가장 큰 적은 다름아닌 정신의 오염이다.

"부상자들을 수송할 헬기가 도착할 겁니다. 인계되면 다시 앞으로 전진하죠."

"입구가 넓은 게 도움이 되는군."

대형던전답게 입구가 커 대형 장비도 내부로 쉽게 들일 수 있는 게 장점 중 하나였다. 곧 소음과 함께 군용 헬기 몇 대가 일제히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그냥 탱크를 몰고와서 다 밀어버리면 안 되나?"

각성자들 중 하나가 다가오는 헬기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현대 화기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적들이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굳이 경험치를 버릴 이유가 없지. 크롤러 상대로는 총탄이나 포탄도 안 먹히고."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의 말대로 굳이 그러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오직 인간의 군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발달하고 훈련해 온 군대를 동원할 때 발생하는 비효율은 차치하고, 각성자들 역시 싸워서 얻는 이득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원해서 여기 들어올 정도의 각성자들은 애초에 싸움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는 않았다.

'던전, 짐승의 평원이라.'

상태창을 보는 건 이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떠올라 있던 퀘스트를 확인한 그녀는 지금 자신들이 어디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미리 탐사된 곳은 여기가 끝입니다. 드론들을 미리 보내긴 할건데, 그래도 다들 긴장 풀지 마십시오."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이 이탈해도 그들의 전진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내부의 괴물들을 소탕하고 던전 코어가 있는 던전의 최심부로 들어가 그것을 파괴하는 철저한 공격이니까.

'스키더들은 단순히 우리가 보여서 싸움을 건 것인가?'

이지연은 통솔을 맡은 각성자의 말대로 자리를 잡고 앞으로 걸으며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전세계에 걸친 대형 던전이 발견된 적은 여럿 있어도 아직 공략된 적은 없다. 이곳이 규모를 제외하고 다른 던전과 무엇이 다른지 아직 파악된 것도 전무했다.

"...이런 미친, 저것 좀 봐. 저게 뭐지?"

그러던 중에 마주한 것이 이것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본 이지연의 눈은 휘둥그레 커졌으며 얼굴은 창백히 변했다. 본능적으로 움켜쥔 손은 덜덜 떨렸다.

저 멀리 바위산에 흐릿하게 보이는 거대한 요새. 그러나 그 요새는 지금 당장으로는 배경에 불과하다. 진짜는 그 앞에서 위풍당당히 이곳을 향해 행군하고 있는 '거대한 군세'.

다양한 괴물들이 혼합된 그 군세는 정확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 너무 많은데?"

"후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패닉에 빠진 몇몇 각성자들이 흔들렸다. 그럴만 한 것이 지금 적들은 단순히 많은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체계와 규율을 갖춘 하나의 군대가 되어 다가오는 중이었다.

군대와 군대의 싸움에서 그 기세에서 찍혀눌리면 이길 수 없다.

"이럴수가..."

<짐승의 평원(S)>

그런 와중에 상태창을 살피던 이지연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지금껏 표시되지 않았던 등급표가 던전 이름 옆에 나타났기 때문시다. 그리고 그것이 알려주는 이 던전의 난이도는 극상.

이제와서 도망치기는 늦어버렸다. 전력으로 도주한다 해도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한 괴물들을 전부 따돌리는 건 불가능하니까.

"자리 잡아요 당장! 이대로 등을 보이고 도망치면 다 죽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들은 공격자의 입장입니다. 상대의 기세에 눌려 수비적으로 군다면 자신들의 이점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건 당연해. 루시, 예상 승률은?"

[약 42%. 하지만 오차범위가 큽니다]

전투 직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가 있었다.

전장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자신이 보아도 그리 유리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역시 무력하다. 이럴때 루시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루시가 벌이는 대규모 전투를 계속 봐 온 그의 눈에 솔직히 지금 벌어지는 전투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적들에겐 분명 일인군단으로 활약할 수 있는 대전쟁의 영웅들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복종하며 하늘을 뒤덮는 대규모의 군단은 다른 세상에 있을 뿐이다. 지금 그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 하나만 겨우 있을 뿐.

그는 그 아쉬움과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곁에 있다면, 더 많은 병력과 더 강한 화력으로 당신의 적을 세포 하나 남기지 않고 죽일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그러나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굉음, 고함소리와 함께 엉겨붙은 두 진영이 치고박는 동안 그는 슬며시 옆으로 이동했다.

유의미한 도움은 주지 못해도 도움 자체를 주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휴대폰을 들어올린 그가 적들을 겨누었다. 우선 원래의 목적대로 루시에게 표본부터 보낼 생각이었다.

"뒤로! 물러나면서 싸워!"

"무너지지 마! 으아악!"

전장은 늘 아비규환이었다. 단지 승기를 잡는다면 좋은 쪽의 혼돈이 될 뿐이다. 다만 지금은 명백히 나쁜 쪽의 혼돈이었다.

"으, 으아..."

지금까지는 잘 싸우던 각성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뜨거운 그의 불꽃은 분명 적들을 효과적으로 태워왔으나 지금은 달랐다. 마치 거대한 악어 혹은 도마뱀처럼 생긴 침략종 화염포식자.

모든 불은 놈들에게 입을 쩍 벌리고 열기를 빨아먹는 이놈들에게는 먹이에 불과하다. 가진 능력이라곤 뜨거운 불을 뿜어내는 게 전부인 화염계 각성자들은, 놈들의 앞에서 자신들의 힘을 모조리 봉인당하고 화력 지원이라는 역할을 잃어버린 일반인이 되어 버렸다.

'계획이 전부 어그러졌어.'

이지연은 자신의 몸을 향해 창을 찌른 적의 몸을 걷어차며 따끔한 통증에 눈을 찌푸렸다.

화염포식자의 정보는 이미 있었으니 당연히 상대할 계획도 있었다. 다만 지금 미리 계획한 작전을 실행할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겠어. 그러니 나서지 말고 뒤에 있어."

"...네."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얼굴에 아직 앳됨이 남아있는 그는 화염계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고등학생. 오진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아무리 자원했다지만 미성년자까지 끌어 쓸 정도로 상황이 빡빡하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그렇게 상황이 나쁘지 않아. 이대로 버티다 보면 우리가 이길지도 몰라."

어쨌든 이지연은 자신의 조원이자, 화염포식자를 처단한 이후 화력을 보충해줄 그를 지켜야 했다.

자기 몸보다 큰 거대한 방패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몸을 움찔거렸다. 최전선에 서서 수많은 괴물들을 눈앞에 둔 그녀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적들의 무기가, 이빨이, 발톱이 몸을 덮쳐도 그녀는 피를 흘릴지언정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모든 공격을 감당해냈다.

"화염포식자를 먼저 공격해...! 그래야 제대로 싸울 수 있다고!"

"잠깐! 이놈들 설마."

그러나 그 순간 전장의 기류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화염 포식자를 잡으려는 그들의 움직임을 마치 미리 알았다는 듯, 적들은 몸을 비틀어 틈을 만들더니 희생을 감수하고 후방으로 빠져있던 화염계 능력자들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뚫렸다...!'

자신의 다리를 붙잡는 적의 머리를 밟아 으깨버린 이지연은 사색이 되어 자신을 지나치는 적들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이대로 자리를 비우면 뒤에 있는 전체가 무너지니까.

"큭!"

그런 상황에서 오진혁은 살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진영을 이탈해 무작정 내달렸다. 그자리에 계속 남아있으면 다른 이들이 위험하단 생각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그리 멀리 가지 못한 상태에서 화염포식자를 비롯한 괴물들의 추격에 눈을 질끈 감은 그는 점차 다리에 힘이 빠짐을 느끼고 절망했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처음의 젊은 패기는 사라지고 두려움이 그 자리를 채워넣었다.

"끄륵."

그런데 그 순간. 뿜어진 검은 참격에 바닥에 넘어진 그를 덮치려던 화염포식자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사색이 되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괴물.'

'그것'을 처음 본 오진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검을 쥔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전신을 검은 무언가로 두르고 있는 무언가.

그 가슴팍에서, 꿈벅이는 큼직한 눈알 하나가 나타난 순간 그는 숨이 멎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돋은 몸을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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