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질서의 붕괴(7)
67화-질서의 붕괴(7)
"심연의 짐승들, 흑철충(黑鐵蟲)!"
서큐버스 부대장 레리아. 그녀는 자신들을 향해 몰려오는 적들을 보고 이를 갈았다.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마계 영주들의 목숨까지 앗아가며 서로 견제할 생각만 가득하던 마계 영주들을 긴장하게 만든 적들은 말 그대로 마귀.
마계의 주민들조차 처음 보는 괴이하고 뒤틀린, 도저히 정상적인 생물이라고 봐줄 수 없는 그 괴물들을 그들은 특유의 검은 갑각에 빗대어 흑철충이라고 불렀다.
'많기는 더럽게 많네!'
레리아는 손에 든 채찍을 휘두르며 투덜거렸다.
흑철충의 특징 중 하나는 그 숫자와 병력 회전력이었다. 그들이 괜히 벌레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는 듯, 흑철충들은 정말 끝도 없이 튀어나와 그들에게 끊임없이 소모전을 유도했다.
"저리 비켜라! 서큐버스의 힘은 놈들을 상대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때 덩치 큰 검은 피부의 켄타우로스 하나가 거대한 할버들을 든 상태로 그녀를 밀치며 지나쳤다. 그러고선 단숨에 달려들던 적의 머리를 쪼개버리니, 당황한 그녀는 화도 내지 못하고 속으로 분을 삼켰다.
'대체 이 미친 괴물놈들은!'
대놓고 무시당했지만 반박할 수 없다는 게 제일 열이 뻗쳤다.
방금 지나친 켄타우로스 돌격대장의 말대로, 그녀를 포함한 서큐버스들의 힘은 유독 이 독특한 적들을 상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좀 먹혀보란 말이야!"
[매혹의 마안]
결국 폭발한 그녀는 채찍을 거두고, 자신에게 강습해 오는 [하피ㆍ알파]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힘을 끌어올렸다.
'어째서?!'
은은히 빛나는 눈으로, 투구 속에서 빛나는 6개의 안광을 향해 마력을 쏘아보던 레리아는 얼굴을 구기며 황급히 뒤로 도약했다.
분명 마안에 적중했지만, [하피ㆍ알파는]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이 그녀를 향해 그 큼직한 발톱과 꼬리를 휘둘렀다.
서큐버스의 권능인 매혹의 마안은 본디 대상의 정신을 현혹하고 제대로 된 사고와 행동이 불가능한 매혹 상태에 빠트린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거나 특별한 방어 수단을 필요로한다. 문제는, 지금 그녀가 상대하게 된 [하피ㆍ알파]는 그런 방식으로 매혹의 마안을 피한 게 아니란 것이다.
"한낱 짐승조차도 효과를 보는데 너흰 뭐냐고! 진짜 걸어다니는 인형이라도 된다는 거냐!?"
레리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흑철충들이 마안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한 미물인가? 그건 절대 아니었다. 이미 흑철충들은 마계의 일부분을 완전히 먹어치웠다.
그렇다고 언데드처럼 단순한 시체들도 아니었다. 흑철충들은 분명 자유롭고 변칙적인 전술과 전투법으로 그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자아가, 감정이 없다는 듯 행동했다. 마안이 조금의 흔들림도 주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니까.
레이라는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흑철충 [하피ㆍ알파]가 자아도, 감정도, 이지도 없는 존재임을 이미 알아차렸다.
"씨..."
마력을 담아 휘두른 채찍으로 [하피ㆍ알파]를 쓰러트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에게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 단말이라는 개념은 생소하니까. 그들이 흑철충이라 부르는 마왕군은 애초에 그런 존재들이며, 마왕군을 지휘하는 중앙통제시스템은 그 근본이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생물체의 극의를 기계적인 방식으로 찾아 활용하는 기계화 생명체, 그것이 이 땅에 새롭게 나타난 괴물들의 정체였다.
"그래도 거의 뚫었다! 놈들의 둥지가 코앞이다!"
할버드를 휘두르던 켄타우로스 돌격대장이 고함쳤다. 그 과정이 어찌되었든 마계 연합군은 약하지 않다.
서로 연합한 마계 연합군은 서로의 종족적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직 대전쟁까지 겪은,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서큐버스들이 제 힘을 못쓴다고 다른 이들까지 약해진 것은 아니다.
"둥지를 파괴하면 그 근방의 놈들은 활동을 정지한다. 둥지! 둥지를 부숴라!"
그들은 억지로라도 뚫고 가서 둥지를 부수고자 했다. 이미 둥지에서 양분을 공급 받는 다는 사실도 알아낸지 오래.
적의 보급로를 끊는 것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전술이다.
곧 그들의 선봉대가 마왕군의 둥지 코앞까지 진격했다. 그들의 기세에는 설령 여기서 전멸해도 둥지는 반드시 파괴하겠다는 각오가 느껴질 정도였다.
"언제까지 신경 쓸 건가. 성녀에게 통하지 않듯 당연히 모든 적들에게 마안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는 당신은 신나보이는군요. 전공을 세울 것 같아서 기쁩니까?"
켄타우로스 돌격대장과 레리아는 끝까지 투닥거렸다. 다만 살짝 여유가 느껴지는 대화였다.
서로 계속해서 틱틱거려도 그들이 제대로 손을 잡으면 누구보다 세다고 생각하기에."
"당연히 기쁘다! 증명의 기회니까! 나는 반드시 더 높은 자리에 서겠다!"
호탕하게 웃은 켄타우로스 돌격대장은 손에 든 검으로 방패를 쿵쿵 두드리더니 이내 병력을 이끌고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그는 지금 투지와 열의로 가득 차 있다. 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대전쟁 시절을 겪고 영주가 된 이들처럼 더 높은 곳으로 갈 기회였다.
'승리하고, 더 큰 전공을 세운다.'
그 자존심은 공격 직전 최대를 찍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찾아오며 뇌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했다.
"...어?"
그러나, 그의 염원이 담긴 공격은 채 적장에게 닿지도 않았다.
순간적으로 하늘을 나는 자신의 시야. 그 시야에 반으로 갈라진 상태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자신의 몸통이 보였다.
***
[하위프로그램들 중 스스로 자신의 코드를 개조하기 시작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와 원인을 규명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만 저는 조언을 받아들여 계속해서 스스로 성장하는 그들을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루시는 사실 그 사실이 탐탁치 않았다. '스스로 성장하는' 프로그램은 즉 자신의 하위호환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오히려 이것을 긍정적인 것이라 보았다.
"그들도 곧 너야 루시. 너의 또다른 가능성. 네 분신이라 생각해도 되고, 네 자식이라 생각해도 돼. 확실한 건 그들의 성장이 곧 네 성장이란 뜻이지."
[그렇다면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하겠습니다]
루시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 오히려 해당 하위프로그램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강심을 투자하고, 경험을 쌓을 수 있게 작전지역을 보정했다.
그렇게 탄생한 이들이 스스로 성장하고 개조하는 변종 하위프로그램들, 루시가 미셔너리라고 명명한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의 둥지를 지키며 병력들을 지휘하던 개체였다.
"말도 안 돼!
현장의 모두가 당황했다. 켄타우로스 돌격대장이 이렇게 허무하게 일격살 당할 것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특히 레리아의 충격은 더욱컸다. 일검으로 켄타우로스 돌격대장을 제압한 존재는 겉보기에는 외, 내장형 강심을 모두 가진 오크ㆍ감마와 다를 것 없는 생김새다.
그러나 상대의 감정을 파고들고 이용하는 매혹의 힘을 가진 서큐버스인 그녀에게는 다른 것이 보였다.
차갑고 기계적인 행동 내면에 잠든, 거칠고 투박하며 강렬하게 요동치는 무언가. 그것이 감정 비슷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쩌면 먹힐지도 몰라.'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상대가 무미건조한 인형이 아니란 것은 확인했으니, 자신의 힘이 드디어 먹힐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이다.
"놈들이 더 몰려옵니다...!"
"이럴수가. 어떻게 여기서 더!"
그때 튀어나오는 마왕군의 숫자가 급증했다. 그들은 미처 모르고 있지만, 이미 마왕군의 새로운 양분보급체계는 그 가동을 시작한 상태.
그 효율과 수급량이 폭등한 양분으로 추가로 생산된 병력들이 마침내 리미터를 깨고 계속해서 증식했다.
"후, 후퇴! 놈들이 너무 많다!"
결국 둥지를 점령하려던 연합군은 예상과 다른 적의 전력을 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리아는 굳어버린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몰아치는 마왕군 위에 고고히 떠 있는 적장, 오크ㆍ감마를 바라보았다.
마왕군은 그들을 굳이 곱게 보내주지 않았다. 도망치는 적은 학살하기 딱 알맞은 먹잇감들이니까. 이대로 간다면 그들은 큰 피해를 입을 것이 뻔했다.
"레리아님!"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뛰었다.
'내가 저놈을 쓰러트릴 수 있다면!'
연합군도 이제 어느정도 마왕군의 구성과 습성에 대해 알고 있다. 그들이 상위급이라 부르는 지휘개체들이 일반 병사들의 지휘를 맡으며, 지휘개체들이 제거되면 일반 병사들의 움직임이 둔중하고 단조로워진다는 사실 역시 밝혀낸지 오래다.
그녀는 그것을 근거로 희망을 본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서큐버스의 힘을 사용해 적장을 제거하여, 아군을 구원하는 희망을.
"날 베려고!? 그 전에 나를 봐!"
날개를 펼치고 단숨에 달려드는 그녀에게 오크ㆍ감마는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주변 마왕군이 그녀를 공격하는 것보다, 적의 검이 그녀의 몸을 베는 것보다 그녀의 눈이 번쩍이는 게 더 빨랐다.
"먹혔다!"
레리아는 순간 행동을 정지한 오크ㆍ감마의 행동을 보고 확신했다. 그녀가 날아가 근접하는 순간에도 오크ㆍ감마는 부들거리며 저항할 뿐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확실하게 끝장낸다.'
그녀는 마력을 더 끌어올렸다. 양 손으로 오크ㆍ감마의 얼굴을 붙잡고, 그 거칠고 단단한 투구 속 안광들을 향해 매혹의 힘을 더 들이부었다.
"넌 못 벗어나.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제도 타락시킬 수 있다고 너 따위가 벗어날 수 있을리가 없어."
희미하게 웃은 그녀는 완전히 굳어버린 오크ㆍ감마를 향해 뽑아든 단검을 겨누었다. 그녀가 읽어낸 오크ㆍ감마의 정신은 수행과 인내는 커녕 다듬어지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아, 절대 자신의 힘을 이길 수 없을거란 확신이 있었다.
"...!"
그러나 그 순간. 레리아는 기세가 급변한 상대의 눈에 당황해 흠칫했다.
'잠깐, 이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오크ㆍ감마의 몸과 함께 그녀의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닫고 사고가 정지한 것이다. 그녀는 분명 상대의 거친 정신을 단순하고 미숙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그건 틀리진 않았다.
"꺄아악!"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은 애초에 루시가 미셔너리라고 이름 붙인 이들은 단순한 미숙함을 뛰어넘는 존재들이라는 것. 그들이 가진 감정과 마음의 파편은 미숙함을 넘어 원초적이고 원시적이다.
말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면 현혹과 매혹은 아무 소용 없다. 적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 분노는 본능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
"끄으윽..."
머리채를 잡힌 레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덫에 걸린 파리처럼 퍼덕거리다,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칼날에 피를 뿜으며 의식을 잃었다.
[가설 실행률 63%]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루시는 승리로 판정하고 곧바로 다음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건 겨우 1개의 전장에서 승리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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