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질서의 붕괴(8)
68화-질서의 붕괴(8)
"아무래도 서큐버스의 특성인 매혹의 마안은 신체 기관만으로 발현하는 특성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네 능력으로 복사가 불가능하단 건가?"
"따로 학습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북부 영지들을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던 루시가 전장 상황 말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목소리를 듣고 화면을 바라보니, 루시는 둥지 내부에서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럼 배우면 되겠네."
"현재 효율을 계산중입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루시는 무턱대고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지 않았다. 소숫점 단위의 효율까지 계산하는 루시에게 숫자든 전술이든 연구 및 개발이든 마왕군 전체의 근본 그 자체가 되는 연산력 배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듣기로 빠르게 성장하는 하위프로그램들도 아직 루시를 제대로 보좌하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들었다.
"설령 배운다 하더라도 개체의 출력이 정해져 있으니 마력을 사용하는 모든 기술은 신중히 익혀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 기술 습득 자체는 해두겠습니다."
"그렇게 해."
루시는 자기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더니 금세 결론을 내렸다. 어느정도 성장한 이후 계속 그래왔지만, 이제 루시는 내게 의견을 묻고 도움을 갈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의적인 판단으로 행동하는 빈도가 급격히 늘었다.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경험들...망각의 축복 따위 모르는 루시는 그것들을 모두 데이터로 치환해 저장한다.
그 모습이 나쁜건지 좋은건지 나는 아직 모른다. 휴대폰에 깔려있던 일개 프로그램에서 시작해 단순한 어린아이 같았던 루시가 단순한 몸집 불리기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즉시, 매혹의 마안에 대한 데이터를 추출하겠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는 한 번 결정된 일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 즉시 실행했다.
"...그래. 이야기 들었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루시가 화면을 바꿔주었다. 루시의 육체가 있는 곳은 마왕군이 둥지로 삼은 곳 중에서도 지하에 위치한 조금 더 깊은 곳.
이곳에 누군가 둥지에서 튀어나온 촉수에 묶여있었다. 다만 모양새가 조금 그렇다, 촉수에 묶여 있는 대상이 헐벗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붉은 피부의 마족이라 더욱더.
"서큐버스 군단장 에리나스."
"목소리도 마음에 드는 걸."
"종족 특성인 매혹의 마안을 사용할 때, 서큐버스종의 안구 세포에서 마력과 상호작용하는 세포군을 찾아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마력을 접촉시킨다고 마안이 활성화되지는 않으니 그 사용법을 말하십시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제압당한 주제에 꽤 여유로워 보였지만 루시는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이어갔다.
"안구 세포니 뭐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보다 괴물 여왕 주제에 정중한 건 좋은데, 착각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에리나스라는 저 고위급 서큐버스 역시 자신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웃기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 친 그녀는 오히려 루시를 비웃었다.
"너희가 우리를 잡아먹고 그 힘을 카피해 써먹는다는 건 알고 있어. 웨어울프들의 광폭화도, 갈색 오크들의 전투술도, 하피들의 공중 격투술도. 그걸 아는데 내가 말할 것 같아?"
"다른 것은 반복 학습으로 습득할 수 있었지만 신체 기관과 기술이 혼합되어 작용하는 당신들의 것은 불가능합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고통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웃기지 마. 우리에겐 긍지가 있어. 너희는 절대 그것을 꺾지 못해."
그녀는 루시의 말에 발끈하며 긍지를 언급했다. 그리고 그 긍지가 무엇인지 마계의 역사에 대해 들은 나 역시 알고 있다.
마왕을 꺾고, 말 그대로 세상을 뒤집은 긍지. 분명 대단하긴 할 것이다. 심지어 그걸 직접 겪은 이들이 아직도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들의 그 긍지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결국 우리의 적이기 때문인가?
"긍지라. 배신한 이후 마왕을 죽이고 경쟁에서 승리한 그 긍지 말입니까?"
아마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루시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한 냉소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는 화면을 등지고 있지만, 나는 흔들리는 에리나스의 눈을 통해 루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루시. 알려줘. 네가, 우리가 누군지."
그 분위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루시가 손을 뻗어 에리스나의 목을 덥석 움켜쥔 것이 그때였다.
"당신들의 긍지는 우리에게 꺾일 것입니다. 당신들에 의해 새롭게 성립된 이곳의 질서는 다시 한번 붕괴하고, 그분의 명령을 받드는 제가 만드는 또다른 질서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커흑...그게 무슨..."
"마왕은 죽지 않았습니다."
루시는 목이 졸려 콜록거리는 에리스나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루시의 정체를 알게 된 그녀는 경악하며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리고 제게는 자신을 따를 부하들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당신들이 가진 생체 데이터, 기술 데이터, 특성 데이터 뿐."
말투는 늘 그렇듯 정중하고 깎듯하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목을 조르며 윽박지르고 있는 루시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
둥지 전체가 그 분노에 맞춰 요동쳤다. 루시가 자신의 몸을 만든 이후로는 나조차도 매번 깜빡하고 있지만 루시의 진짜 정체는 마왕군 그 자체다. 마왕군 전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루시인 셈이나.
"마, 마왕이라고. 그럼 네, 네가 그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그분께선 나의 모든 것입니다. 나의 시작, 나의 끝을 함께 하실 위대하신 분."
심지어 루시는 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조금 당황스럽다.
"마신...! 우으읍!"
"협조할 생각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알아낼 자신은 있으니까."
기겁한 에리나스가 몸을 떨었지만 루시는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화면을 돌렸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오직 고통만을 주기 위한 잔혹한 고문 행위를 지켜보는 취미는 없다.
"고생했어. 그럼 다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까."
그리고 의도적으로 다른 부분으로 화제를 돌렸다.
"전장의 상황은 순조롭습니다."
"그래도 어디 위험한 지역은 있을 것 같은데."
"예상치 안이지만, 전장 효율이 좋지 않은 곳이 분명 있긴 합니다."
혼자 둥지 밖으로 나온 루시는 내 의도대로 금방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 했다. 물론 멀티태스킹 그 자체인 루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하에 갇힌 서큐버스 포로를 고문하며 정보를 뽑아내고 있을 것이다.
"저것들이 뭔지 알겠어. 트롤이지?"
[정확히는 동굴트롤이라고 불리는 트롤의 아종입니다]
루시가 바꿔 준 화면 속에서, 이제 루시 대신 다른 모습들이 보였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왕군과 마족들. 그런데 그 마족들은 최소 3m 이상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거구의 거인들이었다.
[그들의 체급이 상상 이상이라 일반적인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압도적인 체급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처한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묵직한 무기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자기들 보다 작은 마왕군 다수를 손쉽게 상대했다.
일격에 박살나 흩날리는 마왕군 여럿의 갑각과 체액. 무슨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 같은 처참함이다. 그 물리적인 체급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심을 사용해 마력을 사용하는 감마 타입들이 붙어도 어차피 그들도 마력을 쓸 줄 알았다.
[현재 해답은 저들의 약점인 적은 숫자를,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치는 것이지만 그덕에 효율이 나오지 않습니다]
"체급...체급이라.."
루시가 말하는 한계점을 듣고 괜히 중얼거렸다.
현재 마왕군이 보유한 가장 덩치 큰 병사는 덩치 큰 코뿔소 정도의 크기를 가진 마수형 병사들 뿐. 애초에 루시가 획득한 정보를 말하길, 마계의 마수들 중 정말로 강인하고 거대한 이들은 먼 옛날 신화시대에 모두 발전해가는 마족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멸종했다고 한다.
게다가 루시의 합성 개조 능력으로도 애초에 단 한 번도 운용해 보지 않은 거대한 개체는 만들고 움직일 수 없다.
"이 부분은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아직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지금의 내게는 그렇다.
"침략종 베헤모스. 현재 놈들을 처단하기 위해 국제각성자연합이 각국에서 뛰어난 각성자들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내가 강원도의 대형 던전에서 빠져나왔던 직후. 함께 싸우기 위한 대규모의 기갑부대가 던전 내부로 진입함과 동시에 내게 연락이 하나 도착했다. 본사에서 온 메시지였다.
"놈들이 바다를 건너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은덕에 몸을 추스릴 시간은 충분하니까 가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결국 실패했지만, 그래도 갈게요."
나는 그 연락을 이지연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고 있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닙니까?"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분명 힘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 당시에는 계속해서 싸우려드는 그녀의 태도가 살짝 걱정되었지만, 이렇게 루시의 연락을 받고 난 지금은 나 역시 그 기회를 잡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베헤모스라고 불리는 괴물은 바다에서 열린 것으로 추정되는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엄청나게 거대한 괴물이다.
그 데이터를 루시에게 전송할 수 있다면 루시가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생각했다.
"놈들은 지중해에 나타나서 이미 연안에 근접했지. 인접국들은 놈들이 자국 영토에 들어오기 전 막고 싶어해."
"영상 데이터 등은 보았습니다.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습득해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전력이 얼마나 강해질지는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급하게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루시는 화면 속에서 내가 전해준 또 다른 휴대폰을 조작하며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베헤모스에 대한 데이터를 확인하였다.
아마 높은 확률로 베헤모스는 산채로 루시에게 전송된다. 아군이 죽인다면 잘게 조각날 게 뻔하니까.
그러니 루시는 놈을 제압해야지만 그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다만, 루시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었다.
"...좋아. 그때 다시 얘기하자."
대답을 들은 나는 옆자리에서 정신 없이 자고 있는 또 다른 동행자인 오진혁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 어린 애송이, 처음 화염포식자에게서 목숨을 구해줄 땐 미처 못알아봤는데 의외로 국내에서 손에 꼽을 강한 화력을 뿜어내는 강자였다.
"이제 일어나 진혁아. 곧 도착한다."
나는 오진혁을 깨웠다. 어쨌든 긴 시간을 비행한 끝에 나는 난생 처음으로 다른 대륙의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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