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질서의 붕괴(9)
69화-질서의 붕괴(9)
"이것이 성갑과 성검...! 정말로 신의 은총이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 무언가 강인한 힘이 느껴집니다."
"전 세계에 단 3개 뿐인 것들이니 조심히 다루게."
미국의 각성자관리국 국장 넬슨, 그는 자신의 앞에서 한 벌의 갑옷과 검을 들고 신기해 하는 사내를 탐탁찮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이 거구의 이름은 리암 앤더슨. 현재 아메리카 대륙 최강의 각성자로 평가 받는 사람이다.
'에단이 조금 더 강했다면.'
그러나 넬슨은 리암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같은 고위급으로 묶이지만 명문대 재학생 출신으로 완벽한 인성과 행동을 보여주는 에단과는 달리 이 부랑자 출신 최강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칠고 제멋대로인 사내였으니까.
"성수라 불리는 회복제도 그렇고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가져오는 겁니까? 아무리 다양한 능력들이 있다지만."
"자네는 상상도 못할 값을 지불하고 구하는 물건들이니 묻지 말고."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물어보는 리암의 질문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특별한 힘이 깃든 이 물건들은 지구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어쨌든...이것들을 가지고 어디로 가라고요?"
"현재 바다를 가로질러 지중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괴물들이 있지. 몸 길이 수십 미터 이상인 그 거대한 괴물들이 땅에 닿기 전에 처리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네. 이미 전용기가 준비되어 있으니."
"싸우는 것!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 아닙니까."
그의 말에 히죽 웃은 리암은 굳이 그 이상 캐묻지 않고 물건들을 챙겨 다른 요원들과 함께 방을 떠났다.
'저 미치광이를 국외로 내보내도 되는 것인지.'
그 이후 넬슨은 의자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초인이라는 각성자들의 등장, 그러나 그들 모두가 큰 힘이 생겼다고 창작물 속 영웅처럼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이제 만족하시나요?"
그리고 뒤에 있던 비밀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등장한 게 그때였다.
"마리사.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하사품 하사와 제물 수급은 제한이 있어요. 아시잖아요. 이번 주는, 성검과 성갑으로 만족하세요."
"대체 그곳의 전쟁은 언제 끝납니까? 제물이란 방식으로, 그들이 저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죠. 하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하사하는 것은 제한이 없다기에 저희는 전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지금까지 수많은 물자를 지원했습니다."
넬슨은 슬슬 조급해짐을 티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상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정복하는 일...마계 영주들이 반대편으로 참전한 이상 그렇게 쉬울리가 없어요."
마리사는 단호한 얼굴로 목에 건 휴대폰을 내려다 보며 답했다.
넬슨의 말대로 지금까지 마리사는 전 대륙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자신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그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갑옷을 입은 사제들이 손에 첨단 소총을 들고 점령지를 관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이것처럼 정부와 손잡은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니 좀 기다리세요. 지금 그렇게 급해하는 것이, 정말 사람들을 위해서인가요? 이 나라의 권력과 힘을 위해서 아닌가요?"
"그건..."
"전 이벨리아를 믿어요."
그녀는 화면에 보이는 대성녀 이벨리아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과 끝을 같이하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 함께 겪어 온 수많은 경험을 통해 신앙심과 애정으로 이어진 그 단단한 이어짐은 이제 애국심을 포함 그 어떤 것도 방해할 수 없다.
"후, 일단 알겠습니다."
결국 넬슨은 재촉하는 걸 포기했다. 사실 아직 그렇게 많은 것을 투자하지는 않았다.
곡물, 소형화기, 의약품 등등 퍼다줄 수 있는 건 산더미 보다 높게 쌓여있으니까.
"이것이 교단 놈들이 여신의 은총이라 주장하는 신무기인가...!"
물론, 어느 곳에서는 그 사소한 지원이 운명 전체를 요동치게 만들 정도였다.
***
"빛의 여신은 정말로 교단의 편이오. 대체 우리가 악신과 함께하는 교단 놈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제국의 황제는 부쩍 숱이 줄어든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그나마 백중세였던 전장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교단 세력이 여신의 은총이랍시고 들고 오는 각종 수단들 때문이었다.
"..."
정작 황제와 뜻을 함께하는 마계 연합의 수장 바알은 수정구 너머에서 말 없이 황제의 한탄을 듣고 있을 뿐.
바알은 이내 손에 든 그것을 자신의 손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과연 강하다. 마력을 쓰지 않는데 이렇게 빠르고 강하다니."
바알은 손바닥에 맞아 구겨진 총탄을 구겨 던져버렸다. 하지만 분명 그 위력에 감탄하기도 했다.
"어찌 그리 태연한가. 대노한 대성녀가 마계를 가만히 둘 것 같은가. 반 교단파인 우리가 대륙에서 무너지면, 그 다음은 마계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열이 뻗쳐 언성을 높였으나 정작 바알은 코웃음을 쳤다.
"나도 무슨 상황인지는 알고 있다. 단지 불가능한 것을 자꾸 가능하게 하라는 네 모습이 어이가 없을 뿐이다."
"...불가능한 것이라니."
"연합군에서 북부 영주들이 대거 이탈했다. 아무래도 북부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야."
바알은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터졌기에 그러지!? 마계는 이미 자네들 손아귀에 있는 것 아니었나? 무슨 대성녀 같은 존재라도 나타난 게 아니고서야!"
"아니, 바로 맞췄다."
어처구니 없어하는 황제의 말에 헛웃음을 흘린 바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뇌리에는, 직전에 입수한 소식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으아...우웨엑."
자신의 성에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던 서큐버스 여왕 그레모리는 마치 못볼 것이라도 봤다는 듯 눈을 번쩍 뜨고 몸을 떨더니 헛구역질을 해댔다.
'어떻게...!'
기겁한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미친듯이 떨렸다.
서큐버스 여왕의 권능중 하나인 드림 워킹. 꿈을 통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단장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그녀는, 소식이 끊긴 자신의 군단장 중 하나인 에리나스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성공했다.
"어, 어서 통신구를 가져와!"
그리고 포로로 잡혀 고문당하며 정신이 거의 붕괴해가던 에리나스의 눈을 통해 분명히 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리고자 소리쳐 통신구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단순한 괴물 집단이 아니야!'
비록 본인을 마왕이라 선언한 루시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고문 과정에서 아낌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루시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자신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까.
"어디로 연결할까요 여왕님."
"바알...바알에게 연락해!"
다급했던 그녀는 일단 이 사실을 과거 맹주를 자처했던 바알에게 알렸다.
그리고 바알에게, 자신들이 흑철충이라 부르며 자연발생한 재앙으로 취급했던 이들이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 아니라 진정으로 마족들의 멸절을 목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게 정말인가? 너희들이 힘 쓰지 않으려 핑계대는 것이 아니라?"
"진짜라고. 이미 안드라스와 플라우로스도 놈들에게 당했어."
"대체 그놈들이 왜 우리를?"
바알은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단순한 생존경쟁이 목적이라면 사실 증오라는 감정을 품을 이유가 없다. 증오를 품었다는 건 분명 그 원인이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 마족들은 신ㆍ마왕군을 처음 보았다. 기록에도 저런 생물체는 기록도 않았다.
"...뭐, 우리 전체에게 원한을 가질 존재야 하나뿐이지."
다만 바알은 금방 답을 하나 도출하였다. 대전쟁 당시 선봉에 서서 싸웠던 만큼 생각 자체는 하기 쉬웠다.
"흑철충들이 마왕, 메이아의 부하라고?"
"확신할 순 없지. 하지만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메이아의 흔적도 그렇고 의심할 수는 있다."
바알은 의도치 않게 진실에 근접했다. 비록 그것을 확신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연결점 하나는 찾은 셈이다.
"어,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는 지원이 필요해!"
당황한 그레모리는 일단 지원을 요청했다. 실제로 바알의 추측대로 흑철충들이 마왕의 부하라면 이건 전 마계의 문제였으니까.
"...당장은 불가능하다. 이미 미쳐 날뛰는 이벨리아가 인간들의 대륙을 먹어치우려 하고 있다. 놈들이 인간 세상을 완전히 점령한다면 우린 놈들을 막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떡하라고?!"
"북부 영지 선에서 막아봐야지. 너희들도 전력을 다하는 게 아닐텐데? 보나마나, 최대한 전력을 아끼면서 눈치나 보고 있겠지."
"그건 아니...!"
갑자기 선을 그어버리는 바알의 발언에 발끈한 그레모리가 소리쳤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실 거짓은 아니었으니까.
졸지에 적은 개체수로 최전선에 서게 된 그레모리와 서큐버스들은 큰 피해를 보고 있지만 사정을 모르는 북부연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력을 다하지 않고 전력을 아끼기 위해 서로 눈치를 보는 중이다.
"네가 다른 놈들을 설득해 사력을 다해 싸워라. 이건 전 세상을 걸고 벌이는 싸움, 어느 한쪽에서 밀리면 그대로 무너진다."
"야이 개새끼야. 끊지 마. 끊...이런 씹.."
바알은 그대로 정보만 빼먹은 채 통신을 끊어버렸다. 졸지에 뒤통수를 맞은 그레모리는 대노했지만, 그녀에겐 시간이 없었다.
"다른 놈들 다 불러!"
결국 그녀는 일단 자신과 함께 싸우는 북부 영지의 영주들을 전부 소집했다. 자신이 무시했던 플라우로스와 똑같은 처지가 되어버린 그녀는, 이를 갈며 그들과의 통신을 준비했다.
'이참에 북부의 힘을 빼놓을 수 있을 것이다.'
통신을 끊은 바알의 생각 역시 다르지는 않았다.
'설령 정말 마왕의 잔재라 해도 상관없지. 놈들까지 부숴버린 이후 내가 증명할 것이다.'
그는 품에 간직한 마왕의 마정을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스스로 마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은 그에게 다른 마계 영주들의 힘을 빼놓는 작업은 어차피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각하. 놈들이 북부 영지들을 먹어치우고 더욱 커진 덩치로 남하하면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게 의미가 있느냐. 난 오히려 놈들의 등장이 반갑나. 오만한 빛의 여신이 세상의 섭리를 흔들고 바꾸려 할때 그 흑철충이라는 괴물들을 성녀와 싸움 붙인다면 적당한 억제기가 될 것 같지 않느냐."
그는 곁에 있던 측근의 말에 무엇이 문제냐는 듯 웃었다.
그의 욕망은 단 하나였다. 오직 자신이 마왕이 되어 마계의 지배자가 되는 것.
그 마계가 정체불명의 괴물들에게 잡혀 반토막이 나든, 성녀와 괴물과 3파전을 벌이는 지옥도가 되든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반겼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위태로울수록 자신의 지배는 더 공고하고 단단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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