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전쟁의 이유(2)
72화-전쟁의 이유(2)
"이, 이 개자식이..."
리암 앤더슨. 섬광의 전사, 북미의 최강자, 거친 영웅.
그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지금 내 발에 걷어차여 바닥을 구르더니, 이내 나를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보며 다시금 일어섰다.
베헤모스를 루시에게 전달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가 나를 적으로 오해하며 싸움을 걸어오는 게 귀찮은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내 정체를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각성자들에 대한 체계, 인식, 관리 등등이 미흡하기 짝이 없는 아직은 더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죽어라!"
그는 부릅뜬 눈을 번득이며 다시 한 번 내게 덤벼들었다. 나를 침략종으로 오해하고 있으니 굳이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 없이 반드시 죽일 각오인 것 같았다.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런 그를 상대해야 하는 루시는 정작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보는지 굳이 싸움을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실제로 그의 순간적인 힘은 현재 내 몸을 뒤덮은, 넘겨 받은 강심으로 마력을 보충받는 나노ㆍ오메가의 출력을 상회한다.
여기서 나는 루시를 믿고 내 몸을 던지는 것 뿐이었다.
"크, 대체 어떻게!"
그리고 루시의 계산은 역시나 들어맞았다. 서로의 검이 부딪히는 순간, 더 명확하고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내 검을 본 그가 흠칫거리며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
[이 단순무식한 검에는 체계도 익숙함도 없습니다. 마치 저희가 마계 영주들을 처음으로 상내하던 시절, 근접전에 대한 데이터를 충분하게 얻지 못해 가진 출력과 병력대비 비효율을 보았던 것과 똑같습니다]
루시는 그의 검을 받아치며 코웃음을 흘렸다.
루시가 보기에 리암 앤더슨의 검은 허술하기 짝이 없던 모양이다. 오직 신체 능력과 자신의 감각에만 의지해 검을 휘두르는 것.
이미 한 번 그것을 경험해 본 루시는 그 상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역으로 그것을 깨부수는 데에도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으아아아!"
거의 폭주모드에 들어 간 리암은 몇 단계 이상이나 차이나는 기술과 경험을 딛고 계속해서 덤벼들었다.
하지만 루시가 늘 말하던 내용이 있었다. 감정은 주가 될 수 없다고. 기본적인 근거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뜨겁게 타오르는 감정은 그저 객기일 뿐이라고.
"커헉..."
굉음과 충격파가 연달아 터지는 싸움에서 나는 또다시 그에게 일격을 먹었다. 정확히 그의 얼굴에 틀어박힌 내 주먹은, 마력의 폭발을 일으키며 강한 힘을 뿜어내 그를 날려버렸다.
[마력 운용도, 기본적인 몸놀림도 기초 수준입니다. 그저 힘만 믿고 돌진하는 짐승과 다를 것 없다고 보입니다]
리암은 듣지 못하겠지만, 루시는 다소 냉철한 말로 쓰러져 꿈틀거리는 그를 평가했다.
[하지만 조금 특이한 점도 있습니다]
"어떤 점이?"
[그가 착용하고 있는 갑옷과, 휘두르고 있는 검. 그것들은 분명 그의 마력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디 그를 이곳으로 전송하여 연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갑옷과 검. 분명 루시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가 걸친 멋들어진 은갑이 어딘가 묘했다.
지금까지는 다른 각성자들도 종종 걸치는 현대적인 보호 슈트라고 봤는데 지금 보니 보호슈트라기 보다는 진짜 갑옷 같았다. 루시가 마왕군을 이끌고 지겹도록 싸우는 전장에서 보는 그런 갑옷 말이다.
"아니, 안 돼. 어쨌든 그는 중요 인물이야. 애초에 우린 적이 아니라고."
루시의 말에 흥미가 생긴 건 사실이지만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루시에게 전송하는 것을 포함해, 애초에 그에게 상해를 입혀서야 나만 손해다. 아무리 말이 많아도 어쨌든 그는 괴물들과 싸우는 각성자고 중요한 인물이니까. 결국 아군이란 소리였다.
"여기서 끝내자. 지금부터 베헤모스를 네게 전송할게."
게다가 시간을 더 끌었다간 다른 방해가 들어올지 모른다. 이미 이 주변을 빙빙 돌며 나를 찍고 있는 저 드론도 신경 쓰이는데 다른 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드론 처리, 이제 전송을 시작합니다]
루시는 나노ㆍ오메가에 감싸인 내 가슴팍, 정확히는 휴대폰이 들어있는 부근에서 푸른 뇌전이 뿜어져 드론을 파괴하고 곧바로 전송을 시작했다.
[전송 시작]
동시에 내장된 강심들에서 힘이 훅 빨려나가는 게 느껴질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움직이며 올라타고 있는 베헤모스의 몸이 뒤흔들렸다.
어지간한 군함에 맞먹는 이 거체가 정말 다른 세상으로 이동당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격이다.
[나노ㆍ오메가 변형]
동시에 내 몸을 꼼꼼히 감싸고 있던 나노ㆍ오메가가 변형을 일으켰다. 나노ㆍ오메가는 강심을 활용해 만능세포라는 나노의 장점을 극대화한 생물체.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한 이 힘으로 내 등에서는 피막에 쌓인 거대한 날개가 펼쳐져 내 몸을 하늘로 띄웠다.
"설마 죽진 않겠지."
나는 사라져가는 베헤모스의 몸에서 바다로 추락하는 리암 앤더슨의 모습을 보고 괜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 되는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을리 없을테니까. 다만 마지막으로 본 나를 노려보는 그 푸른 눈동자는 어째 계속해서 뇌리에 남아있었다.
어쨌든, 내 할일은 일단 이것으로 끝이다.
***
"우리의 임무는 이제 시작입니다."
세상 일에 끝은 없다. 계속해서 끊임 없이 달려야 한다. 그래야만 경쟁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루시가 서서히 정립하기 시작한 가치관이고 자신의 신념이었다.
[그분께서 내려주신 기회입니다. 나를, 우리를 위한 기회. 우리는 그 기회를 먹어치우고 양분으로 삼아 진화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는 루시는 검을 뽑아들고 그곳을, 하늘을 겨누었다.
이곳은 둥지 안이 아니다. 평소와는 달리, 아주 넓은 협곡을 전송 장소로 지정했다. 이번에 전송되는 존재는 그만큼 거대하고 무겁기 때문이다.
[나타납니다. 유리아, 놈은 마력 방어막을 통한 아주 강력한 물리적 방어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관통력이 강한 마법들로 공격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마왕님."
곧 거대한 마력반응과 함께 무언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아는 그것이 소금기를 머금고 있는 바닷물임을 파악하고 당황하여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대량의 물과 함께 지중해를 건너던 거대한 베헤모스의 몸체가 이곳, 마계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냥 시작입니다]
루시는 기다렸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유리아를 포함, 이곳에 자리한 마왕군만 수천. 얼핏 보면 그들이 가진 화력은 지구의 미사일이나 함포에 비하면 약해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리암은 한참 초월할 정도로 살육이란 행위에 익숙한 이들이 바로 마왕군이다.
루시가 쌓아 온 마왕군의 역사는 바로 살육과 전쟁의 역사.
그렇기에 오직 그것만을 위해 진화해 온 마왕군에게 덩치만 큰 이계의 짐승은 그저 무참히 도륙당하는 도축장의 희생물이 될 뿐이었다.
[베헤모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우리는 초대형 병종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루시는 이미 다음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과연 베헤모스의 데이터를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루시는 자신이 원하던 데이터를 얻었음을 확신했다.
"대전사. 아무래도 늑대놈들은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다!"
"비실한 짐승놈들. 고작 그것 하나 해내지 못한단 말이냐."
과거 갈색 오크들의 땅이었던 곳. 이제 마왕군의 완전한 영역이 되어버린 이곳에, 한 무리의 군대가 진입했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는 수하의 보고에 눈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하나 같이 약해 빠져서야. 역시 트롤이 가장 위대한 마족이다."
그는 손에 든 거대한 철퇴를 어깨에 걸치더니 혀를 찼다. 그들은 모두 트롤로 구성된 부대. 본디 다른 연합군과 함께 움직이며 작전을 펼쳤지만, 마왕군을 상대로 체급과 힘에서 앞설 수 있던 트롤들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더 빠르고 강하게 마왕군을 밀어낼 수 있었다.
[트롤 대전사 바쿠ㆍ2차 각성ㆍlv 56]
"너무 깊숙히 가진 말고, 저기 앞에 보이는 둥지까지만 밀어버린다."
고개를 까딱거린 그, 트롤 대전사 바쿠가 쇠곤봉의 끝으로 저 멀리 보이는 마왕군의 둥지를 가리켰다.
단순 무식한 동족들과는 달리 전략과 전술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기에 그에게 지휘관 자리가 온 것이다. 그는 다른 연합군과 발을 맞추기 위해 굳이 무리할 생각도 없었다.
"크흐, 둥지를 지키던 놈들이 몰려온다 대전사!"
그들이 둥지에 접근하자 마왕군이 대응에 나섰다. 다수의 마수형 병사들과, 비행종인 하피 타입을 비롯한 마족형 병사들이 혼합된 수비부대.
'있다.'
바쿠는 눈을 굴리다, 그 수비부대에 끼어있는 존재를 발견했다. 외갑 곳곳에 박혀있는 광석에서 빛을 발하며 창을 들고 허공에 떠 다른 병력을 지휘하는 마왕군의 지휘개체.
게다가 평범한 지휘개체와는 다름을 바쿠는 발달한 트롤의 감각을 활용해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서서히 자아를 각성해가는 루시의 하위프로그램 미셔너리. 그 중 하나가 지키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오크ㆍ감마의 형태를 띄고있는 미셔너리는 바쿠가 이끄는 트롤들을 보자마자 분노의 감정을 끌어올렸다.
"흐핫! 쳐라! 감히 이 땅을 좀먹으려 하는 괴물들을 치워버려라!"
상대의 감정을 알아챈 바쿠는 오히려 웃으며 부하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을 시발점으로, 양측 군세가 육중한 몸을 쿵쿵거리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대형종 병사들에도 체급에서 밀리지 않는 동굴트롤들은, 충돌 직후 다부진 체격을 활용한 강공을 마구잡이로 흩뿌렸다.
"더 많이 몰려오지 않으면 비실비실한 너희는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이 멍청한 괴물놈들아."
바쿠 역시 상대와 충돌하며 동시에 상대를 비웃었다.
실제로, 마왕군의 갑각과 힘은 트롤들의 힘에 밀리고 으깨졌다. 미셔너리의 창 역시 마찬가지다.
강심을 최고 출력으로 가동해 찌른 공격도 바쿠의 마력과 트롤 특유의 항마력에 막혀 생채기를 내는 게 전부였다.
"우리는 이 힘과 몸으로 이 마계를 정복했다. 너희 따위가 감히 따라올 수 없는 힘이란 말이다."
묵직한 쇠곤봉을 휘두른 바쿠의 일격이 단숨에 미셔너리의 방어막을 부수고, 상반신 일부를 터트려 버렸다.
그는 비틀거리는 상대의 머리를 붙잡아 히죽였다.
"약하고, 가벼우면 죽어야지."
그리고 곧바로 그 머리를 가격해 터트리고 으깨버렸다.
동시에 지휘개체의 사망으로 마왕군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안 그래도 유리하던 트롤들은 손쉽게 수비병력들을 제압했다.
"이겼다!"
바쿠는 곤죽이 된 미셔너리의 머리를 들어올리며 승리를 선언했다. 그가 이끄는 트롤 부대의 사기는 이미 절정에 달한 상태.
이제 남은 건 둥지를 파괴하는 것 뿐이다.
"음?"
남들보다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던 바쿠가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린 게 그때였다.
땅에 닿고 있는 발을 통해 점차 크게 전해지는 이것은 바로 거친 진동. 바닥에 있던 돌들이 움찔거릴 진동이 전해질 즈음 기겁한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황폐지의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저건 무슨..."
바쿠는 순간 충격에 빠져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더욱 더 거세지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흙먼지를 동반한 그것은 하나의 행진. 그리고 그 행진은 곧 돌진이 되어 정확히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파도.'
바쿠는 흙먼지 속에서 달려오는 그 거대한 짐승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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