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전쟁의 이유(4) >
74화-전쟁의 이유(4)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나서기로 했다. 오진혁은 처음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꿈벅거렸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아듣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설령 힘이 있다 해도 괴물과 싸운다고 마음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세상이 창작물처럼 쉽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각성했다고, 돈을 준다고 무턱대고 괴물들과 싸우겠다는 호기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기에 싸우길 선택한 각성자들을 영웅으로 여기는 시선이 계속 남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의지하고, 무력하게 지켜보기 싫었던 것뿐이야.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고 싶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의 말을 들은 오진혁의 눈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전사한 전우의 자리를 자신의 몸으로 다시 채워 넣은 현지의 군인들. 그들의 눈빛은 결코 명령에 의해 억지로 싸우는 이들의 눈빛이 아니었다.
‘믿을 수 있을 것 같기도.’
그리고 이 시점을 기점으로 오진혁은 그를 거의 신뢰하게 되었다. 애초에 그에게선 처음부터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유로움과 신비로움 사이의 그 분위기가 처음엔 경계되었지만, 신뢰 관계를 쌓으니 오히려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진혁이도 감이 좀 좋은 건가? 보이니 뭐니 중얼거리던 리암처럼.”
[현재 추정되는 원인은 하나뿐입니다. 일단 내장된 강심들이 지속적으로 내뿜는 마력을 제어할 방도를 따로 찾겠습니다.]
그런 시선을 그 역시 알아차렸다.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오진혁의 곁을 떠났을 때, 쓰게 웃은 그의 말에 루시는 진지하게 반응하며 원인을 찾아내었다.
“여지를 안 주는 게 좋으니 그렇게 하자. 그나저나 궁금하긴 하네. 마지막에 날 노려보던 눈이 꽤 살벌했는데.”
그 이후 루시와 그의 대화 주제는 오진혁의 언급으로 인해 리암으로 옮겨졌다. 오진혁은 리암의 사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들이 리암을 신경 쓰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그와 싸울 때, 네가 받은 느낌이 근거 없는 직감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 검과 갑옷은 물론 다른 물건들까지. 아무래도 미국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지구에서 이렇게 체계적인 마력 물품이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외부적 요소’가 작용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외부적 요소라. 마치 내가 너에게 전해 주는 것들 같은 것 말이지?”
그는 휴대폰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각성자 집단의 일원이 되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 몇 개가 문제였다.
다름 아닌 미국 국적을 가진 각성자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특수한 약물. 상처를 치유하고 체력을 보충해 준다는 그 기적의 단물은 성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오직 루시만이 가능한 줄 알았던 던전 코어의 활성화까지 해냈다는 소문도 돌았다.
루시는 상태창으로 힘을 습득하고 익히느라 정작 그 근원인 마력을 컨트롤하는 능력은 미숙하기 짝이 없는 지구인들이 그것을 해낼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지금 당장 알 수는 없고, 사실 딱히 상관도 없지만, 혹시 모르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 생각을 일단 머리에서 털어 내었다. 어차피 현재 인류는 같은 편이니까. 그 힘의 출처가 어디든 인류가 강해지는 것이 결국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루시에게 말하며 안심하라고 말한 변수들이 있으니까. 마족들에게 적용한 것과 똑같다. 그는 그 변수들이 늘 희망차고 좋은 쪽으로만 작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
“몸 상태는 정상입니다. 그래도 혹시 불편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길.”
다른 쪽에서도 한창 수습을 하느라 바쁠 때.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곳보다 더 삼엄한 보안과 경계가 자리한 이곳. 물론 나라에 귀중한 자원을 살펴야 한다면 마땅히 갖춰야 할 것들이기도 했다.
“그런 거 없으니 비켜.”
침대에서 일어난 리암은 이곳에서 자신의 몸을 봐주던 의료진을 차갑게 지나쳐 다시 옷을 걸쳐 입었다.
“기분은 여전히 별로인가? 그래도 조금은 대기해야겠어. 중국 쪽 요원들 몇이 접근하려는 걸 방금 차단했다.”
“별 지랄들을 다 떠는군요.”
그런 리암에게 국장 넬슨이 직접 찾아왔다. 기분이 저기압인 리암과 마찬가지로 넬슨 역시 얼굴 자체는 심각했다.
“결국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얻은 정보라고는, 그 괴물이 자유자재로 자신의 몸을 변형하며 뛰어난 은신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 정도.”
“그놈은 단순한 괴물 놈이 아니란 말입니다.”
넬슨의 말에 이를 간 리암의 눈앞에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검은 갑피와 자신을 노려보는 가슴팍의 큼직한 외눈 등.
베헤모스 위에서 벌어진 짧은 격투. 그러나 그동안 자신의 힘에 큰 자신이 있었던 리암은 기술, 경험 등 정말 모든 부분에서 상대에게 밀려서 패배했다.
상대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기계 같았다. 조금의 비효율도 없는 움직임으로 그의 허점을 파고들어 일방적으로 난타했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그렇기에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힘이 상대보다 강했기에.
“추적을 해 보긴 할 테지만 사실 불가능에 가까워. 몸이나 추스르고 본국으로 복귀하게. 어차피 원하던 바는 거의 이루지 않았나. 베헤모스의 경험치를 독점했으니까.”
“······.”
그러나 국장 넬슨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다만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혼자서 뭘 할 수는 없는 노릇.
어쨌든 목표로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성취를 이루었으니 그는 상태창을 통해 더 많은 힘을 부여받고 전보다 더 강해졌다.
<새로운 기능―성좌와의 대화 해금>
“이건 뭐지?”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세워져 있던 벽을 드디어 넘었다는 듯 무언가 그의 상태창에 추가되었다.
[네가 가진 불만, 해결할 수 있다면 너는 어떤 대가를 치르겠느냐.]
동시에 그의 뇌리에 남들은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전율한 리암은 걸음과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대답하기 어려운가?]
결코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니다. 그 목소리는 다시금 울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
“분명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지구 쪽에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 그곳에 개입할 수 없는 것도 사실. 일단은 눈앞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 마신께 무슨 일이 생기신······.”
“그런 건 아닙니다.”
창현과의 통신을 유지하면서도 루시는 동시에 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최근 발견된 변수에 대해서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째 루시는 곁에 있던 유리아가 눈치를 볼 정도로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고 승기를 굳힙니다. 적들은 결국 하나로 뭉치는 데 실패했습니다.”
루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흩뿌려 둔 정찰병들을 최대한 이용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획득했다.
그리고 그렇게 획득한 정보를 통해 마계 영주들이 하나로 뭉치지 않고 반으로 갈렸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즉 루시는 북부 영지의 영주들만 상대하면 된다.
이 상황을 의도한 바알의 목적은 모르지만, 루시는 이렇게 주어진 데이터를 계산에 사용해 모든 것을 예측했다.
“이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돌진하여 전부 부수면 됩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막히는 그 순간까지.”
루시는 아마 언젠가는, 자신의 계산식에 포함되지 않는 변수들이 추가되는 그 순간에는 결국 막힐 것이라고 예측하고, 당연히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런 과정들을 전부 겪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루시는 불필요한 걱정 따위는 아예 배제한다. 설령 그런 순간이 다시 온다 해도 다시 넘어버리면 그만이다.
[전군 출격.]
곧 착실히 모아온 마왕군의 주력이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초거대종을 앞세운, 일대를 전부 채워 버리는 거대하고 무수한 군세.
최선두에 선 초거대종의 머리 위에 선 루시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물론 육체의 눈이 전방을 본다고 전방만 보고 있는 건 아니다.
뿌려 놓은 정찰병들을 포함, 자신과 연결된 병력이 있는 곳 어디든 그녀의 눈이 닿는다.
***
“더 이상 영주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마계 전체의 문제다.”
“그렇다기엔 바알 그놈과 남부 놈들은 우리를 배신했다. 마계 전체를 배신했다고.”
“······어쩔 수 없다. 일단 놈들을 막아 낸 이후 응징하든 해야지.”
그레모리의 영지로 향하는 루시와 마왕군의 진격 소식은 당연히 북부 영지의 영주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심각성을 인지하고 플라우로스 때와는 달리 진심을 다해 마왕군을 막고자 했다.
“개자식들······. 이제 와서 그러는 게 무슨 소용이야. 플라우로스가 살아있을 때, 그때 다 같이 진심으로 짓밟았어야지.”
“시끄럽다. 너도 플라우로스를 내쫓으려다 약속한 땅을 얻기 위해 참전했던 주제에.”
자신의 영지가 타깃이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한 그레모리의 중얼거림에, 자리에 참석한 켄타우로스가 앞발로 바닥을 두드리며 으르렁거렸다.
“놈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마족의 뿌리를 뽑아 먹고, 자신들이 이 땅을 점령해 그 자리를 대체하려는 놈들이다.”
“그놈들이 어떤 괴물들인지는 잘 알겠으니, 막을 방법이나 생각하자고. 높은 성벽에 맞먹는 몸 크기를 가진 거대 마수들을 앞세운 놈들이야. 대체 어떻게 막지? 단순한 마법이나 주술로는 흠집도 못 낸다고.”
어쨌든 절박한 건 모두가 마찬가지니 전투 의지야 이제 다들 충만하다.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전승 속에서나 등장하는 거대 마수의 등장에 그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난이도로 마왕군과의 전쟁을 풀어나가야 했다.
‘지금이 제일 중요하다.’
동시에 현장에 있던 이들 다수가 직감했다. 이미 그들은 몇 번의 기회를 놓쳤다. 고블린 왕 안드라스가 쓰러지는 순간, 갈색오크 왕 플라우로스가 죽임당하는 순간 등등.
심지어 그 기회를 놓칠 때마다 상대는 계속해서 강해졌다. 따지고 보면 전쟁을 반복하며 급격히 강해지는 상대에게 일말의 여지를 주며 계속해서 성장의 기회를 준 것은 그들인 셈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은, 그 기회가 이제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이번마저 놓친다면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전부 합친 것보다 커진 상대를 막지 못하고 그대로 먹이로 전락해 잡아먹힐 것이다. 게다가 그 데이터를 전부 뽑아 먹혀, 철저하게 이용당할 것이다. 루시에겐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말 그대로 자존심마저 완전히 짓밟아 버리는 행위다.
“난 직접 싸울 거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진심을 다해, 전력으로 싸워라. 마왕과 싸웠던 그 날처럼.”
웨어울프 대족장 안드로말리우스가 으르렁거리며 다른 영주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을 다들 알고 있으니 반대 의견은 없었다.
처음으로 그들이 분열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일치단결하는 순간. 그가, 그리고 루시가 예측했던 변수가 이번엔 자신들조차 모르게 마계 영주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