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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75화 (75/200)

< 75화-전쟁의 이유 (5) >

75화-전쟁의 이유 (5)

“저들은 하나로 뭉쳐 맞서길 선택한 모양입니다.”

북부 지역 마계 영주들의 단결 소식은 루시 역시 금방 알아차렸다. 사실 그들이 흩어져서 국지적으로 싸우는 것으로는 애초에 마왕군을 이길 수 없으니 예정된 수순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은 마왕군에게 정면 힘 싸움에서 사용할 강력한 무기가 쥐어진 상황이다.

“그들이 과연 어떤 변수를 준비해 왔을지, 그것이 가장 궁금합니다.”

“······.”

루시는 다른 지방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연합군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전이라면 이런 식으로 공백이 생겼을 때, 정면 싸움은 포기하고 더 빠르고 유동적으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의 강점을 활용하여 빈틈을 찌르고 다니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곁에 있던 유리아가 슬쩍 눈치를 보는 것도 무시한 루시는 오직 눈앞에 닥친 싸움에 집중했다.

그의 조언을 받아들인 탓이다. 상대방이 품고 있는 변수로 인해 자신이 성립한 계산식이 무너지는 것은 오히려 그 변수를 이용해 계산식을 더 단단하게 만들 기회.

그렇기에 루시는 오히려 전대 마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전공이 있는 저 연합군이 자신의 군단을 상대로 뛰어난 전술을 보여 주며 선전하길 원했다. 약점을 찾아내고 후벼 파서 처절한 전투를 이어 가길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이 그것을 보완하고, 더 진화할 수 있으니까.

‘마왕님의 생각은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전달받지 못한 유리아는 상대방의 분투를 바라는 루시의 태도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상대방의 기술을 역설계하거나 습득하는 능력이 강한 마왕군의 강점을 이용하겠거니 할 뿐이다.

“지금까지 습득한 데이터로, 그들은 초거대종의 한 줄 돌진을 막을 힘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쨌든 방법을 찾았다는 것. 그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모든 힘을, 낱낱이 확인해서 분석한다면 승률은 낮아질 수가 없습니다.”

루시는 저 멀리 보이는 주둔한 연합군을 향해 그대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선두에 선 것은 베헤모스·베타.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몸과 가속도로 말 그대로 일대를 쓸어버리는 강력한 돌진 공격은 그 무엇보다 파괴적이다.

거기다 곧바로 본대까지 돌진시키며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규모 전투의 시작을 알린 루시는 여전히 돌진하는 초거대종의 머리 위에 서서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곧, 곧바로 온다고?”

“그럼 저놈들에게 예우와 예절 따위를 바란 것인가? 바로 준비하라!”

연합군 역시 눈을 마주치자마자 돌진하기 시작한 거대한 군세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시도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역시 지축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는 거대한 짐승들의 돌진. 1차적으로 저것을 막지 못한다면 애초에 전투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발라크, 정말 할 수 있나?”

“안 돼도 어쩔 수 없다.”

녹색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이 긴장 탓인지 신경질을 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들이 마왕군의 초거대종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묘수가 바로 리자드맨들.

곧 엄선된 리자드맨 주술사들이 장신구가 달린 고목나무 지팡이를 딸랑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저 미친 거대 마수들의 튼튼한 몸을 직접 타격해서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다른 곳을 공격해야지.”

습지의 왕이라 불리는 리자드맨들의 지도자, 발라크가 자신 역시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리자드맨들이 익힌 주술은 물을 움직이는 힘.

곧 초거대종이 달려오는 평원 중간 즈음에 흐르던 지하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몸이 커도 결국 발로 땅을 밟고 달리는 건 똑같지 않은가.”

“애초에 거대 마수들은 모두 우리 선조들의 사냥감이었다.”

작전의 성공을 확신한 발라크의 말대로 지하수가 역류하며 메말라 있던 토지 표면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을 먹은 토지는 질척거리는 진창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아예 물웅덩이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레모리, 마력 보충이 필요하다.”

발라크가 넓은 평원 전체를 채울 만한 지하수를 끌어올리느라 마력 탈진으로 쓰러지기 시작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고 외쳤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 서큐버스들. 그레모리를 비롯한 서큐버스들이, 자신들의 능력인 정기 추출을 사용하여 다른 마족들에게서 뽑은 마력을 리자드맨들에게 부여해 힘을 보충해 주었다.

“놈들의 돌진은 저곳에서 멈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저 짐승들을 사냥하는 것.”

달려오는 적들이 피하거나 우회할 수 없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찰나의 순간 습지를 만들어야 하기에, 무리하게 끌어올린 힘을 전부 탕진한 리자드맨 주술사들이 뻗어 버리는 순간.

이제 평원은 인공적인 습지가 되어 버렸다. 적어도 돌진해 오던 그 순간에는 멈추거나 피할 수 없는 인위적인 환경 변화다.

스스로의 가속도를 조절할 수 없었던 초거대종들은 그대로 그 습지에 뛰어들었다.

[역시, 그들이 가진 변수는······.]

거대하고 육중한 몸이 진창길에 파고들어, 그 움직임이 봉쇄되었다. 루시는 자신이 원하던 변수를 직접 확인한 덕에 눈을 빛내며 흥미롭게 바라보았고, 연합군은 이것을 기회로 먼저 공격에 나섰다.

“전부 죽여라!”

하피 왕 말파스가 직접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하늘을 가로질러 하늘 위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진창이 되어 버린 전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격하겠다는 의도였다.

역할과 과정을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배분하고 조합한 전술. 루시는 하나로 모은 그들의 힘이 자신의 예상 이상임을 직감했다.

[베헤모스·베타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루시 역시 곧바로 계산을 시도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병력을 움직였다.

“이, 이런 미친······ 이놈들이!”

덕분에 연합군은 크게 당황했다. 초거대종의 뒤를 따라 돌진하던 마왕군이 발밑이 어떻든 그냥 몸을 던지듯 돌진하여 진창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넘어지는 것도, 짓눌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의 몸으로 이 진창길을 채워 넣으려는 듯이. 실제로 다른 마왕군 병사들은 동료들의 몸을 짓밟고 으깨며 앞으로 달려왔다.

“마, 마왕님.”

“병력을 돌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베헤모스·베타들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투입되는 자원, 생산에 걸리는 시간 등등. 계산 결과 일부의 병력을 희생시키는 이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유리아도 당황했지만 한번 결정을 내린 루시의 판단은 빨랐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결국 마왕군과 연합군은 움직임이 봉쇄된 초거대종을 사이에 두고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다.

“역시 저 괴물들은 상식을 벗어난 놈들이다. 전부 돌격해라!”

초거대종을 잡기 위해 계획한 하피들의 일방적인 공격이 실패했으니 이제 연합군도 대응이 필요했다. 몸으로 습지를 채우고 돌진해 오는 적들을 향해, 연합군 역시 일제히 돌격하여 맞섰다.

[생존한 70명의 군주 중 6명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얼마나 진심을 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네년······ 지금 웃고 있는 것이냐.”

일대를 가득 채운 두 군세가 충돌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루시에게, 마왕군 비행종들의 견제를 뿌리치고 날아온 하피 왕 말파스가 분노하여 외쳤다.

웃고 있다. 그 말에 루시는 그때서야 자신의 얼굴 표정을 확인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워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무, 뭐라?”

“그러니 더 힘내십시오. 마계의 지배종들이 고작 이 정도로 스러지면 얻을 데이터가 너무 적습니다.”

평온하면서도 은은한 감정이 느껴지는 루시의 목소리에 말파스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황했다.

희열, 흥미. 이전부터 조금씩 느껴 오던 그것이 자아가 성장한 지금은 더 크게 다가왔다. 루시에게 전장은 성장의 기회라 더욱 그렇다.

물론 유리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고방식을 말파스가 이해할 리 없다. 의도치 않은 도발을 듣고 격노한 그가 마력을 끌어올려 덤벼들자, 루시 역시 검을 들고 그것을 받아쳤다.

“헛소리하지 마라. 너희가 이길 것 같으냐. 우리는 이미 한 번 승리했다. 이 땅을 지배하던 거대한 법칙과 싸워 이겼단 말이다.”

강력한 마력을 휘감은 발차기가, 루시의 검격을 뚫고 틀어박혔다. 그는 뒤로 밀린 루시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루시는 마법으로 화력을 지원해 주는 유리아와 함께 그를 협공했다. 두 명분의 출력이 함께하자 이제 말파스가 밀려났지만, 그는 힘에서 밀렸다고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다고 자만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로 뭉쳐 이보다 더한 것도 이겨 왔다.”

[······기대 승률 30% 이하.]

그의 말이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동시에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전황을 넣어 계속해서 승률을 계산하고 있는 루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계산의 영역 밖에 있던 변수들. 그것들이 일제히 터져 나온 결과였다.

***

“이놈들, 나름 노림수는 확실하다. 사악한 놈들 같으니.”

말파스가 루시와 충돌하던 그때. 지상에서 거대한 대검을 풍차처럼 휘두르던 동굴 트롤들의 왕 오리아스는 자신에게 덤벼들던 거대한 거미들을 일격에 쳐 죽인 이후, 자신을 저격하기 위해 다가온 이들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건장한 체격과 두꺼운 몸 등. 비록 전신이 검은 갑각으로 덮여 있는 등 다른 점이 있었지만, 그 베이스가 된 존재가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지난번 전투에서 획득한 동굴 트롤을 베이스 삼아 개조한 마왕군의 새로운 타입, 트롤. 루시는 영주들을 저격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타입의 병종들을 따로 파견한 것이지만 오리아스는 이것을 자신들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였다.

“다들 봐라. 이런 놈들에게 우리가 져야 하느냐.”

그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앞장서서 싸웠다. 루시가 영주들을 저격하기 위해 나름의 계산을 거쳐 준비한 병력들은 그 계산을 뛰어넘는 그들의 힘에 오히려 밀려서 하나하나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우리를 먹고 만들어 낸 병사가 이렇게 허약한가!”

마력이 넘실거리는 검으로 쏘아 보낸 참격을 통해 트롤·감마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린 오리아스가 고함치며 날뛰었다. 일인 군단으로 평가받는 영주급이 날뛰기 시작하니, 그 주변의 마왕군은 추풍낙엽으로 쓰러지고 베여 나갔다.

심지어 다른 곳도 사정은 똑같았다. 마계 영주들은 괴력을 발휘하며 전장의 균형을 부수는 크랙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연합군은 그들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마왕군에 맞섰다.

정작 아직 단일 개체로 그들을 잡을 수 없었던 마왕군은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서서히 앞으로 전진해 온 그들은 결국, 멈추지 않고 전진하여 루시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보이느냐. 너만 성장하는 게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장한다. 그것이······ 우리가 마왕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이다.”

[그것이 성장의 권능.]

루시는 마왕군을 격살하며 기어이 자신의 앞에 도달한 영주들을 보며 계산을 수정했다. 대성녀 이벨리아가 영주들에게 부여해 준 힘은 그들에게도 기적에 가까운 성장을 가능하게 해 준다.

“······여왕을 잡아라!”

곧 그들이 일제히 루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승률 0%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어차피 도망가도 값은 똑같았기에 루시는 굳이 그들의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결과에 만족해했다. 이 결과를 가지고 수정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도달한 영주들도 아직, 루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 1군은 전멸 예정이지만 주요 개체들을 살린 이후 제 2군을 준비하여 몰아치겠습니다.]

한 순간의 전투는 상대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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