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전쟁의 이유 (6) >
76화-전쟁의 이유 (6)
“루시.”
[저는 괜찮습니다. 많은 자원이 소모된 베헤모스ㆍ베타를 지키는 것이, 제 단말 하나를 던져 주는 것보다 효율적입니다.]
갑작스럽게 화면이 암전되고 루시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루시가 예상 이상의 힘을 보여 주며 기존의 계획을 무력화시키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마계 영주들에게 맞서려는 그 순간에.
[제 몸을 대가로 시간을 버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유리아는 베헤모스ㆍ베타들을 구조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군은 빠르게 물러나고 있습니다.]
루시는 말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마치 우리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그때처럼. 그래서 마냥 어색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단 점이 내 마음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지금의 루시는 그때처럼 순수하지만은 않으니까.
설마 거짓말을 할 것이라 생각하진 못했지만 내게 자신의 모습을, 그러니까 ‘자신의 몸’이 적들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고의적으로 숨기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런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보여 줘도 돼. 네 말대로 네 몸은 그저 단말기에 불과하잖아. 플라우로스에게 당하는 것도 이미 봤었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지금은 제 모습보다는 전체적인 상황을 보여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루시는 다시 화면을 보여 주었지만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후퇴하는 아군의 모습이었다. 결국 나는 거기서 포기했다. 하긴, 아무리 일개 단말기에 불과한들 얼굴은 똑같다. 억지로 보여 달라 해 봤자 보기 유쾌한 장면도 아니긴 하다.
[그들은 승리했지만 지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하려 할 때, 이번 전투로 얻은 데이터를 보완하여 다시 공격할 것입니다.]
루시는 내가 이해하기 쉽도록 수치로 이번 전투의 결과를 보여 주었고, 이렇게 보니 정말로 무슨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루시의 할 만하다는 말이 거짓도 아니었다. 분명 마계 영주들의 개인당 힘은 강력했지만, 집단 전체로 보았을 때 생산력과 병력 효율 면에서 우리가 오히려 앞선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적들을 죽이고 잡아먹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다른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모든 힘을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붙었을 때. 마계 영주들을 어떻게 막지? 그들이 가진 힘, 솔직히 규격 외로 봐야 할 것 같았는데.”
루시가 전략을 짜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계 영주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미 두 명의 마계 영주를 죽여 본 경험을 바탕으로 저격 팀을 만들었다.
전원 강심을 가진 상위급 개체들이었으며 루시는 그들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가진 힘은 그 계산을 벗어났고, 그래서 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영웅이 되었다. 함께 싸우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영웅. 그 힘은 변수가 되어 루시의 전체적인 계산식을 완전히 부숴 버렸다.
[현재 단일 개체로 그들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더 효율이 좋은 강심이 필요합니다.]
“역시 아직은······ 힘든가? 그들은 기존부터 강자였고, 성녀에게 받은 힘으로 계속해서 성장하니까.”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내가 쓰게 웃으니 루시가 반사적으로 방법을 찾겠다고 말했다. 역시 본인 스스로도 꽤 많이 화가 나는 모양이다.
냉철하게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 어지간하면 근거 없는 추측성 발언은 거의 하지 않는 루시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러나 지금 당장 그 방법을 찾는 것은 불가능. 그러니 일단 가장 확률이 높은 전략으로 상대하겠습니다.]
“역시 각개 격파? 그게 제일 효과적이지.”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그들 역시 대비하겠지만 생산성에서 저희가 앞서는 것은 바뀌지 않을 사실입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다시 화면에 나타난 것은, 질척한 점액을 털어 내고 생산장 밖으로 걸어 나오는 루시의 모습. 예비로 만들어 두었던 몸을 완성시켜 다시 가동한 것이다.
끝내 루시는 내게 자신의 몸이 어떤 식으로 파괴되었는지 보여 주지 않았다.
***
“······.”
현실에서의 일이 있던 그와의 통신이 종료된 이후, 루시는 새롭게 기동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이 육신은 일개 단말일 뿐이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그런데 이 감정은.]
루시는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했다. 솔직히 자신도 왜 그에게 그 모습을 숨겼는지 명확히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게 틀리거나 이상한 반응은 아닙니다, 마왕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비록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육체라 한들 그분께서 그 모습을 봤다면 상심하셨을 것이니, 마왕께서 그분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루시의 혼란스러움을, 곁으로 날아 온 유리아가 잡아 주었다. 루시가 내적으로 겪고 있는 혼돈이 냉철한 이성과 피어오르는 감정의 충돌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루시는 유리아의 위로를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마음속 술렁임은 그 위로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 술렁임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감정을 배워 가는 인공지능이라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재인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현재 아군이 점령한 땅은 북부 영주들이 모여 만든 연합의 1/8수준. 하지만 아군의 양분 수급 효율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유리아, 일단 서로 연합한 북부의 마계 영주들이 서로 뭉치지 못하게 만드십시오.”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루시는 연합군이 수습조차 끝내지 못한 지금 시점, 곧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 목적은 사실 기존과 같다. 한 점 돌파를 포기하고 사방을 공격해서 상대를 흔드는 것. 화가 나도 어쩔 수 없이 루시는 사실상 지금 당장은 정면에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마계 영주들의 숫자가 줄어든다면 다시 도전합니다.”
하지만 루시가 정면 대결을, 특히 마계 영주들과의 육탄 대결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 그것은 자신이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일종의 목적이 되었다.
인공지능다운 차가운 이성으로 묻어 둔, 적들에게 복수하고 증명해 보이겠다는 뜨겁고 강렬한 욕망과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루시의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중이었다.
“혹시 방법이 있으신 것인지.”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지만 이번 전투에서 그들이 가진 변수가 좋은 쪽으로 작용했기에 저희가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그 변수가 반대로 작용한다면, 우리에게 이득입니다.”
패배하긴 했지만 단순히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것을 넘어서 배운 게 분명 있는 전투였다. 루시는 이제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하고자 했다.
***
“피해 현황은?”
“아직 집계가 다 되지 않았습니다. 워낙 큰 규모의 전투라······. 솔직히 역사에 기록될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틀리지 않다. 적어도 우리에겐 대전쟁에 맞먹는 전쟁이었다.”
밝게 떠오른 달빛에 비치는, 수많은 시체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전장. 수습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그 전장을 북부 대습지의 리자드맨을 이끄는 도마뱀 왕 발라크가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승리로 끝났지만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대전쟁 이후 처음으로 치루어 본 대규모 전쟁에 모든 영주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럼 이 전쟁은 이것으로 끝난 것인가? 정말로?’
그러나 마음속 한편에 일말의 불안함을 품고 있던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높게 세워진 장대가 하나 있었다. 그 장대에 꿰여 있는 것은 치렁한 머리칼을 늘어뜨린, 누군가의 잘린 머리.
인간과 똑같은 그 머리는 그들이 베어낸 루시의 머리다. 전통적인 승전의 기념으로 늘 하던 것처럼 적장의 목을 베어 장식한 것이다.
'우리가 점령한 이 마계에서 이만한 군세를 일으키고 여기까지 왔던 적장이 이렇게 쉽게 잡혀 죽었다?'
하지만 발라크는 생기 없이 텅 빈 루시의 눈을 보면서 기쁨과 만족 대신 탐탁찮음을 느꼈다. 어떻게든 살려서 데려간 베헤모스ㆍ베타와 유리아의 모습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어째 이 전쟁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만 자꾸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그리고 머지않아, 그의 불길한 예감은 사실이 되어 현장을 덮쳤다. 단숨에 시끄러워진 일대의 분위기에 발라크 역시 허둥지둥 다른 영주들에게 향했다.
"한 발 물러선 줄 알았던 흑철충들이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한 기세로! 난 가봐야겠다. 이대로 가다간 마지막 발악을 해대는 놈들에게 내 땅이 망하게 생겼다."
"나도 마찬가지다!"
영주들에게 들려 온 소식은 현재 그들이 자리를 비운 그들의 영지에, 마왕군이 사방에서 침략해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발라크의 영지였던 대습지 역시 마찬가지다. 주력군을 모두 이끌고 이곳에 왔으니 그들은 이제 서둘러 돌아가 자신들의 땅을 지켜야 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발라크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분명 있었다.
"오리아스! 네 영지는 공격 받지 않은 건가? 말파스 자네도!"
"...그렇다."
모든 영주들이 공격 받은 게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마왕군의 공격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진영도 존재했다.
"그, 그렇다면 지원을! 이미 옛적부터 놈들과 싸웠던 우리는 피해가 크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와줄 거면 우리를 도와줘. 당장 놈들이 노리던 곳이 이곳이라고!"
이를 드러내고 다급히 으르렁거리는 안드로말리우스와 기겁한 그레모리가 외치듯, 다른 영주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돕기를 원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적장은 이미 죽었고 이제 이 전쟁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다시금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러니 영지가 공격 받지 않은 영주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자신들은 아쉬울 게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상황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는 정치적인 생각이 가장 먼저 앞섰다.
'설마?'
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발라크는 퍼뜩 스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이 일들이 안 그래도 위태로웠던 연합군의 단결을 후벼 파는 계책이라면.
"놈들의 둥지는 아직 무수히 남아있다. 어떤가. 자네들은 우리를 돕는 대신, 그곳들을 공격해서 마저 정리하는 것이. 그렇게 하면 놈들을 말끔히 치워내고 땅을 재분배한 다음 우리를 배신한 중남부 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두가 납득할만한 계책을 내었다. 명분과 실리 전부를 만족시키는 나름 훌륭한 계책. 결국 모두가 그것에 동의했다.
다만 발라크 역시 애초에 상대의 의도는 그들을 조각조각 흩어지게 만드는 것이며 방금 자신이 그것을 도운 셈이란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