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전쟁의 이유(7) >
77화-전쟁의 이유(7)
[적들이 나름의 방법을 마련했는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흩어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기반이 다른 곳에 존재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제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흩어지고 있습니다]
"흩어진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아닌가?"
루시의 계획은 일단 성공했다. 적들을 흩어지게 만드는 것. 물론 단순히 흩어지게만 만들어선 안 된다.
하나로 뭉쳐 싸웠던 그들이 서로 갈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루시가 각개격파를 시도하는 동안 다시 뭉치지 못하게.
[하피들과 트롤들이 정비를 마친 후 일부 부대를 아군의 영역 깊숙한 곳으로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합의를 본 모양이지만 자신들의 주력이 빠진 이상 그들은 다른 영주들을 돕지 않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하나로 뭉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특히 일이 끝났나고 방심한다면 더더욱."
루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연합군의 영주들은 승리를 확신하고 방심할 것이다. 그리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더욱 견제할 것이다.
루시와의 전쟁은 힘이 균형을 유지해오던 마계 영주들 사이에서, 고착화된 구도를 부수고 새로운 변화를 불러 올 기회니까.
그들이 가진 탐욕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확인했다.
"너도 알겠지만, 최대한 연기하면서 기회를 보는게 맞아. 그들은 네 병사들을 별 볼일 없는 잔당으로 볼 것이고 그 생각에 확신을 가진다면 자기들끼리 견제에 들어갈 거야."
[명령 수신]
루시는 내 의견을 합당하다 판단하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의견을 내는데 딱히 부담은 없다. 루시가 성장하면서 주체성을 가실수록 내 말에만 의존하는 일은 없어졌으니까.
좋은 의견은 수용하고 아닌 것 같은 의견은 본인이 걸러낸다.
"기껏 뭉쳐서 이득을 본 주제에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방심하고 분열하면 끝나는 거지 뭐."
나는 루시의 의도에 우리 예상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마계 영주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단점은 사실 내가 속한 이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득과 손해, 욕망과 희생, 견제와 협력...우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어. 하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조금 답답하네."
나는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뉴스 내용은 새롭게 개정되는 각성자 제재 및 통제 방안.
굳이 일반 사회와 각성자 집단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견제하는 일반인 사회와 각성자 집단은 나라라는 이름 아래 또다시 하나로 뭉쳐 다른 나라와 대립한다.
수많은 견제, 대립, 충돌. 솔직히 고작 72명이던 마계 영주들보다 우리 상황이 더 복잡한 것 같았다.
[지금은 분명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반드시 성장하여 그 걱정과 불안, 무조건 덜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좋겠네."
루시의 말은 말만 들어도 고맙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압도적인 힘이 있다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 어딘가 묘한 거부감이 느껴졌던 이전과는 달리, 나는 어째 가면 갈수록 그 힘을 진심으로 빌려오고 싶어졌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죠?"
"예. 한 15분 정도."
차에서 대기한지 몇 분 되지 않았을 때. 다가 온 이지연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타자마자 의자에 늘어진 그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잘 안 풀렸나요?"
"결과는 모르죠. 사장님...그러니까 협회장님이 마지막 결정을 내리실테니. 사실 전 그냥 꼽사리였어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참여한 회의는 이번에 말이 나온 각성자특별법 발의를 위한 회의.
계속해서 늘어나는 각성자들 덕분에 정치권도 분명 골머리다. 총기 하나 구하기 힘들던 나라에서 마음만 먹으면 강한 힘을 날 수 있는 초인들이 늘어나니 분명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좀 아쉽군요. 상황이 그리 넉넉치 않은데 규제가 늘어나면, 결국 전체적인 손실은 더 커질겁니다."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사회가 감당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아직은 부족한가 봅니다."
이지연이 전해주는 회의장 분위기와 설명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단결의 힘, 그것을 마계 영주들이 보여줬다.
그리고 분열의 대가, 이제 곧 그들이 보여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우리가 가진 변수들이 자꾸만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려 한다는 걸 확인하니 힘이 쭉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괴물들에게 사람이 죽어나가고 공포와 슬픔이 잠식한 그 풍경을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이 시대의 사람들은 공감할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의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
"더 좋은 방안이 나올 때까지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고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때 이지연이 자기 상태창을 보는 듯 허공을 보며 이야기 했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자들이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상태창에 특별한 기능이 해금됩니다. 아주 놀라운 기능이죠. 이것을 공개하는 이유는, 어차피 앞으로 많은 이들이 이 기능을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미 대통령이 직접 연단에 서서 이 사실을 공표했다. 리암 앤더슨이 가장 먼저 각성한 것으로 알려진 각성자의 새로운 경지.
"다름아닌...신령과 대화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올 수 있는 기능."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미 대통령은 해당 사실을 발표할 당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마 종교인으로서는 차마 납득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 법. 결국 성좌와의 대화라는 기능은 그렇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본인들을 성령이라 주장한 그들은 다양한 성향과 종류를 가지며, 자격을 갖추게 된 사람들에게 '배정'되었다 들었습니다."
"저도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려요."
내 말에 이지연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들은 배정이라고 말했다. 즉 성좌라 불리는 이들이 먼저 사람들에게 찾아 온다는 뜻.
그러나 그 배정이 각 성좌들의 의지인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침략종들의 침략 이유도, 각성자들의 각성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각 각성자들에게 성좌들을 배정했다면 대체 그 존재는...궁금해서 참을 수 없어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그 경지에 닿을 수 있게 성장하는 수밖에요."
이지연은 본인도 성좌와 대화하고 싶은 티를 계속해서 내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걸러지고 검열되지 않은 진실을 알고 싶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
"출발하죠."
나는 차량을 출발시켰다. 그녀가 활약해줘야 하는 던전으로. 그래야만 그녀가 성좌를 만날 수 있을만큼 성장할 수 있다.
***
"...역시 방법을 찾아야 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분께서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시나 아직 방법이 없음이 현실입니다."
그가 이지연과 대화하느라 통신이 끊어진 직후.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던 루시는, 유리아의 질문에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어리석은 현실에 그분께서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것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의지만 우리는 아직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
유리아는 그의 맥박과 호흡등 신체적 요소를 전부 측정해서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루시의 말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는 신경쓰지 않고 다른 부분에 신경을 집중했다.
"결론적으로 더 깊고 다양한 마법적 고찰이 필요합니다."
엄청난 양의 양분으로 거대한 세력을 움직이는 루시는 더 많은 지식을 갈구했다. 현재 루시가 가지고 있는 마법적 지식은 유리아가 가르쳐 준 보편적인 인간의 마법과 그동안 쓰러트려 온 마족들이 배우고 있던 주술과 술법 등등.
하지만 루시가 분석력과 연산력을 사용해 그것들을 구조단위까지 해체해 재조합하고 개조해도 아직 자신이 원하는,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연결을 확대하거나 강화하는 기술을 온전히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가 알기로 현재 살아남은 마족들중 체계적인 마법을 정립하고 사용하는 건 극히 일부라고 들었습니다."
유리아는 자신이 아는 바를 이야기하며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개체들의 성장을 억제하던 지배력이 사라지고, 부여 받은 성장의 권능으로 강해진 개체들은 분명 전성기 마왕군에 필적한다 해도 사실 지금의 마족들은 전체적으로 전대에 비하면 약한 축에 속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들은 핍박 받던 약자들. 그런 이들이 상위종들을 몰살하고 이 땅을 차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유리아, 당신이 알고 있던 마법이 마법의 전부입니까?"
"그것은..."
루시의 말에 유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마법사이긴 했지만 사실 그리 수준 높은 마법사는 아니었다. 알고 있는 마법 지식도 그리 많지 않았다.
"제가 들어본 것들 중에는 그런 지식이 없었습니다만 만약 원하시는 것이 각기 다른 계파의 마법이시라면 충분히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한 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유리아, 당신이 일부 병력을 이끌고 인간 세상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마법을 알려줄 수 있는 이들을 데려오십시오."
결단을 내린 루시의 눈이 반짝였다.
사실 지금 이 결단, 지금까지는 조금의 진지한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굉장히 비효율적인 결단이었다.
현재 루시는 아직 눈앞의 전쟁을 끝내지도 않았고 설령 자신이 원하는 방법을 찾는다 한들 그쪽에 힘을 투사할만큼 안정을 찾은 것도 아니니까.
다만 이제는 그 비효율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를 찾고 원하기에 이런 결단을 내리는 게 가능했다.
"어쩌면 인간들에게 저희의 정체를 노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혹시 마신께서 이 사실을..."
"그분은 모르게 진행할 겁니다. 아시면 지금은 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하시며 분명 반대하실 겁니다."
유리아는 출발 전, 그가 이 사실을 지금도 지켜보고 있느냐 물었다.
그러나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들려줄지, 그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이미 알고 활용한 입장에서 루시는 이 일을 그가 반대할 수 없게 극비리에 추진하고자 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지만, 나도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유리아는 그 길로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의 이유는 자신의 원수들이 살고 있는 인간 세상으로 가라는 임무 때문이 아니라 루시 때문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언제나 냉정하고 기계적인 판단을 보여주던 루시가, 실은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다를 인식한 것은 사실 꽤 이전.
그 어린아이는 분명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며 절대적으로 따랐으나 그 정체성이 조금 더 성장한 지금은 자신의 생각을 위해 부모의 의사 없이 주도적으로 행동 하는게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