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지배자(4) >
84화-지배자(4)
“그 시절부터 살아온 오래된 종족······. 하지만 이종족들은 신화시대 이후 각자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수집한 데이터에는 대전쟁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예. 엘프 영웅 레온이나 용병으로 간간이 참전했던 수인족 같은 이종족들 말이지요.”
유리아는 루시의 말을 듣고 긍정했다.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족은 의외로 많았다.
“하지만 마왕님, 지금 그들을 노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필요한 데이터를 손에 넣을 테니까.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루시의 눈이 순간 번득였다. 동시에, 짙은 먹구름이 덮여있는 하늘을 향해 뻗은 루시의 손으로 무언가 둥지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165cm를 겨우 넘는 루시가 들고 휘두르기엔 너무나 큰 쌍날검은, 자체적으로 소유한 마력을 은은히 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이것을 만드는데 단순 계산으로 일반 마족 10만 개체분, 혹은 도시 10여 개 면적만큼의 마력이 소모되었습니다. 그것을 응축하고 집속하느라 소모된 양분은 주력인 베타 타입 5만 기분입니다. 그러니 그만큼의 효율을 반드시 뽑아야 합니다.”
날개를 편 루시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유리아는 어느 때보다 파괴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대체 끝이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다.’
분명 숱한 위기가 있었다. 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위기도 그중 다수였다.
그러나 루시와 마왕군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위기를 돌파해 나갔다. 그러면서 끝없이 성장을 반복했다.
심지어 거기서 만족하지도 않았다. 유리아가 내심 두려워하는 것 역시 그것이었다. 루시의 욕망이, 그 끝없는 탐욕은 채워지긴 커녕 점점 더 커지고 넓어질 뿐이었으니까.
***
“다음 계획이 뭐지? 역시 그레모리인가?”
“그렇습니다. 그들이 제정신을 차려 혹시 모를 변수를 만들기 전에, 하나씩 빠르게 제거하겠습니다.”
루시는 혼자서 허공을 가로지르며, 동시에 전방에 미리 집결시킨 군대를 움직이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와 통신했다.
목적은 지난 번 공략을 시도했다 실패했던 서큐버스 여왕 그레모리의 영지. 현재 마계 영주들은 오리아스와 말파스가 죽었는지도, 아니 애초에 루시가 살아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루시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들이 하나로 뭉쳐 다시 한번 ‘변수’를 생성하기 전에, 그 변수를 하나하나 줄여 나가려는 게 루시의 목적이었다.
“그레모리 하나라면 승률은 98%. 절대 지지 않습니다.”
눈을 번득인 루시가 저 밑 평원에 펼쳐진 자신의 군대를 돌진시키며 전장에 합류했다.
그러자 선두에 선 초거대종 한 개체를 포함한 수만에 달하는 마왕군이 일제히 그레모리가 있는 성을 향해 몰려들었다.
어둑한 먹구름 사이로 간간히 태양빛이 내리쬐는 이곳은 이전, 마왕군이 패배한 바로 그 평원. 자신의 목이 잘려 장대에 매달렸던 그곳을 루시는 완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황급히 성벽에 올라 온 그레모리는 완전히 부활한 루시가 돌진하는 초거대종의 머리 위에 올라타, 손에 든 거검을 자신을 향해 겨누자 경악하며 소리쳤다.
잔당 소탕만 남았다 생각한 입장에서는 애초에 지금 상황 자체가 재앙이다.
“이제 시작입니다. 마계 영주 사냥.”
[롱기누스ㆍ최대 출력 전개]
하지만 철저한 변수 통제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루시에게는, 기회와 영광의 순간.
곧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응축한 롱기누스에서 뿜어진 힘이 서둘러 방어 준비를 서두르던 성을 그대로 덮쳐 버렸다.
“······이번엔 정말로 네 계산대로네.”
화면을 보던 그가 멍하니 감탄할 정도의 압도적인 전공.
서큐버스들이 황급히 시전한 방어 마법은 분명 어느 정도 위력을 상쇄하긴 했지만 결국 한 점에 집중된 순수한 마력의 파동에 그대로 박살 나고, 휘말린 이들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산채로 찢겨 나갔다.
“공성할 필요도 없이 성벽을 부수겠습니다.”
루시는 텅 비어 버린 그들의 방벽에 초거대종을 그대로 돌진시켰다.
이번에는 진창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평야를 달려 속도를 유지한 초거대종은, 자신의 턱이 박살 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 육중한 머리로 성벽을 들이박았다.
“으, 으아아악!”
“자리를 지켜!”
이미 여기저기 금이 가고 흔들리던 성벽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초거대종의 충돌과 함께 터져나간 성벽은 그대로 붕괴하고 그 위에 타 있던 루시는 도약하여 단숨에 당황한 그레모리의 앞에 도달했다.
“너, 너 대체 어떻게······.”
"고작 이 몸 하나 죽였다고 이긴 줄 알았습니까. 이제 대가를 치룰 시간입니다. 배신자들."
루시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초거대종의 뒤를 따라 폭발하듯 쏟아져 들어오는 마왕군은 거의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성 내부로 난입해 전투를 벌였다.
이제, 그레모리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서큐버스 여왕 그레모리ㆍ2차 각성ㆍlv 70]
“건방지게 굴지 마!”
일말의 자비도 없는 잔혹한 마왕군에게 자신의 병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그나마 루시를 막을 수 있는 건 지금 자신뿐이란 사실을 확신한 그녀는 직접 루시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분명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으나 루시는 이미 자신의 계산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죽어 버려!”
서큐버스 여왕이 시전하는 한 차원 높은 매혹의 마안. 두 눈을 빛내는 그레모리는 자신 없는 육탄전을 벌이는 대신 자신의 특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지금이다!’
찰나의 순간 롱기누스를 휘두르려던 루시가 매혹의 마안을 정통으로 맞으며 움직임이 멈췄다.
그것을 기회로 본 그레모리는 루시의 목을 향해, 손에 든 채찍을 휘둘렀다.
“캬흑.”
“매혹의 마안은 오직 번민을 가진 이들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 그러니 제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곧바로 팔을 움직여 역으로 그녀의 목을 잡아챘다. 강한 힘에 목이 졸린 그레모리가 다급히 루시의 손을 잡았지만 그 손은 풀리지 않았다.
“끄윽, 그럴 리가 없······ 없어. 감정이 있는 존재에게 빈틈이 없을 리가 없다고······!”
“당신은 매혹의 마안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당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힘이 자신의 어떤 신체기관에서, 어떤 신경과 호르몬 작용으로 발현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본능적으로 사용할 뿐이니,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루시는 그녀를 비웃었지만 그레모리는 억울함에 몸을 부들거렸다. 그녀의 입장에선 오히려 루시의 말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 모든 원리를 알고 있는 제가, 당신의 어설픈 힘에 당할 리 없습니다. 감정이란 결국 이용할 수 있는 요소에 불과할 뿐.”
“잠까, 잠깐 기다려! 잠······.”
루시는 자신의 손에 그대로 힘을 집중시켜, 버둥거리는 그녀의 목을 더 세게 졸랐다. 마침내 힘을 끌어올리지 못한 그레모리의 육체 내구도보다 그 힘이 더 강해졌을 때.
그레모리의 몸은 굵은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축 늘어졌다.
“이제 겨우 다섯. 하지만 속도는 더 빨라질 것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게.”
“고생했어, 루시.”
우두머리를 죽인 이후 아군에 무난하게 밀려 가는 적들을 보던 루시가 중얼거리자 그가 답하며 칭찬했다.
그러나 루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계산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사실상 속도전입니다. 소식이 퍼지기 전에 다른 이들도 서둘러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부 영지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고, 중앙으로 뻗어 나갈 수 있습니다.”
“자원이 많이 필요한 건 알지만, 롱기누스 같은 무기를 더 만드는 건 불가능한가?”
“보유한 자원이 더 늘어나면 모르겠지만 현재는 유지가 아슬아슬합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루시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롱기누스 같은 특별한 결전 병기를 더 만드는 게 어떠냐 제안했으나, 계산을 마친 루시는 오히려 그것이 더 비효율적임을 결과로 내놓았다.
하지만 그 계산도 결국 지금을 기준으로 계산한 것뿐이다.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하고 세력을 늘려간다면 그만큼 보유한 자원도 늘어날 테니까.
***
“그레모리의 영지가 함락?! 그럴 리가!”
“사, 사실입니다. 가까스로 도망친 생존자의 증언입니다!”
“대체 어떻게······!”
그레모리의 사망과 함께 퍼져 나간 소식은 단번에 북부 영지를 뒤흔들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당연히 루시가 살아 있다는 것.
이쯤 되니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다 연락이 끊긴 오리아스와 말파스 역시 당했다는 게 사실이 되어 버렸다.
“어, 어서 다시 영주들을 모아라! 우리가 놈들의 계략에 당했다!”
리자드맨들을 이끌며 착실히 마왕군을 상대하던 발라크가 기겁하여 서둘러 연락을 돌렸다. 그러나 이제 집결할 수 있게 된 북부 연합의 마계 영주는 3명뿐, 단순히 계산해도 그 출력이 이전에 낼 수 있었던 힘에 비해 반으로 줄었다는 뜻이다.
그걸 아는 루시는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그동안 흩어져서 그들의 영지를 공격하던 군단을 하나로 모아 거대한 덩어리를 생성한 루시는 다급히 집결하는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레모리의 영지가 함락되었다는 소문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루어진 빠른 공격이었다.
“이런 미친······.”
기껏 다시 힘을 끌어모은 발라크는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초거대종들을 보며 외마디 탄식을 흘렸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저 돌진은 말 그대로 성이었다. 움직이는 거대한 성이 돌진해 오는 것이다. 마법이든 주술이든 마왕군의 요격을 뚫고 그들에게 타격을 주는 건 불가능했다.
땅은 근처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울리고 그 위압감과 공포심은 대열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그레모리와 서큐버스들이 궤멸당한 이상, 이제 전과 같은 방법으로도 저 돌진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뇌리에 지난번 전투에서 초거대종들을 끝내 죽이지 못한 사실이 짙은 후회가 되어 떠올랐다.
‘설마 그때부터 여기까지 계산을?’
그의 눈이 곧 휘둥그레 커졌다. 처참하게 패배하는 순간에도, 자기 목이 베이면서도 굳이 초거대종들을 모두 살려 보낸 루시의 판단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패배든 공포든 고통이든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오직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계산하여 그 결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확신한다.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항상 자신의 감정과 싸워야 하는 자신과는 그 근본부터 다른 사고방식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가진 것이다.
“대체 넌 무엇이냐? 정체 따윌 묻는 게 아니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존재냔 말이다.”
“제 자신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전과 달리 어떠한 방해도 없이 연합군을 들이받아 한 번에 쭉 밀어 버리고 짓밟는 마왕군의 파도 틈에서, 발라크는 자신의 앞에 등장한 루시를 보며 이를 갈았다.
사실 이미 승패는 갈렸다.
“하지만 딱히 걱정하진 않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저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새로운 존재라고 말하셨으니까.”
그럼에도 루시는 흔들리지 않고 그를 향해 손에 든 거검을 겨누었다. 가장 척박하고 작기는 해도 엄연히 마계의 한 축을 담당하던 집단이 멸망하고, 새로운 지배자가 등장하려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