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지배자(5) >
85화-지배자(5)
“도마뱀 왕 발라크, 웨어울프 대족장 안드로말리우스, 검은 켄타우로스 왕 아미······. 모두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의 주력은 무너지거나 흩어져 도망쳤으며,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저항할 힘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잘······ 했어.”
중요한 순간인 만큼 나는 분명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루시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적들과 싸워서 승리했는지.
그 마음에 부응하여, 자신이 패하는 장면은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루시는 반대로 자신이 이기는 장면은 하나하나 세세하게 보여 주려 노력했다. 심지어 자신이 3명의 마계 영주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장면은 무슨 스포츠 하이라이트처럼 다각도로 보여 줄 정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가 나는 어딘가 묘한 느낌에 쓰게 웃었다.
“네가 자랑스럽지만 나는 마치 게임을 하거나 무슨 영화를 보는 것 같아. 너무 규모가 커져서 그런지 현실감도 별로 없고.”
분명 저쪽 세상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그리고 그들을 패배시키고 그 목숨을 앗아 간 루시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친 존재가 바로 나니까 나 역시 그 싸움에 무관하진 않다.
그런데 그런 나는 지금 편안하게 집에 앉아서, 음료를 홀짝이며 그저 화면을 통해 지켜보고 보고를 받는 게 전부였다.
“저는 방금 하신 말씀이 부정인지 긍정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느낀 것일 뿐. 널 보면서, 때로는 현실에 있는 내 행동 역시 누군가에는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뿐이지.”
루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평범한 세상의 흐름에 속해 있었을 뿐인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단지 지켜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힘을 이용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늘 나를 괴롭히던 생각은 과연 내 선택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들이다. 세계에서 손에 꼽는 영웅인 리암과 충돌하고, 나라에서 엄중히 지키는 재산을 훔치는 등 일개 학생에 불과했던 내가 이 세상에 투영할 수 있는 힘이 많아질수록 이런 고민은 더 깊어졌다.
루시는 끝없이 성장하지만, 과연 나 자신은 성장하고 있는 게 맞는 것인가? 내가 루시에게 끼치는 영향이 과연 긍정적인가?
이런 고민을, 아직은 생각 대부분이 참과 거짓으로 이루어진 루시의 사고방식으론 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 조금 더 부담 없이 지를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보고를 더 듣고 싶은데. 그래서 이번 전투로 네가 얻은 게 정확히 뭐지?”
[마계의 한 축을 담당하던 북부 연합의 영지 전체가 저희 손안에 들어왔습니다. 비록 도망치는 잔당 전부를 잡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당장 획득 가능한 양분만 기존의 2배 이상. 완전 둥지화 시킨다면 최소 10배 이상의 양분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에서, 화면을 돌린 루시는 마치 항공 사진처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마계의 모습을 비추었다.
[북부는 마계에서 개척이 다 되지도 않았던 척박한 땅이고 면적도 넓지 않은 땅. 때문에 이곳을 다스리던 마계 영주들은 자신들끼리의 경쟁에서 밀린 서열 낮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쉽진 않았는데?”
[하지만 이곳이 척박하고 자원 없는 땅이란 것은 그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루시는 내게 화산들을 보여 주었다. 뜨겁게 끓어오르는 용암과 온천수 등. 그리고 마족들이 개척하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짙은 수림과 포악한 마수들 역시 지금의 우리에겐 모두 이용 가능한 자원이었다.
[완전 둥지화가 60% 이상 완료되는 순간부터 이제 중부 지역의 영주들을 공격하겠습니다.]
완전 둥지화란 말 그대로 일대를 완전히 둥지로 만들어 버리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먹어치우며 소화와 생산만 반복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뜻.
이렇게 된 지역은 아군의 영역이 확장되면 곧 버려진다.
루시는 자신의 계산으로, 마계 전체의 생태계를 끝장내는 한이 있더라도 일을 서두르는 게 이득이라 판단한 것이다.
“중부 지역 영주들은 북부보다 강하고 많지. 그리고 정말 그렇게 뒤 없이 먹어치워도 되는 거야? 지열을 이용한 지속적인 에너지 생산이 가능해졌는데도?”
그러면 내 역할은 루시가 생각 못 할 부분에 대해 최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둘은 함께 문제를 찾고 그것을 보완한다.
[현재 중부 지역 영주들 다수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진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전력을 내긴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에너지는 충분합니다.]
“너, 역시 마계로 끝낼 생각이 없구나?”
루시의 대답을 들은 나는 결국 확신했다. 루시는 마왕이다. 내가 들은 마왕의 의무는 단순히 이 마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 비록 지금은 배신자들을 처단한다는 가장 큰 목적이 있지만 만약 그 목적을 이룬다면 루시는 마왕 본연의 목적을 위해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양분을 파먹을 수 있는 새로운 사냥터가 생길 테니 루시는 굳이 마계의 생태계 따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마저 넘긴다면 그 이후에는······ 아니다.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 없겠지.”
나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 내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정보가 좀 부족한 것 같은데. 중부 지역 영주들이 인간들 쪽 전쟁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파견했는지 등은.”
[그것이 사실입니다.]
딱히 문제없어 보이던 루시의 계획을 다시 살펴보던 중 나는 어딘가 허전한 부분을 발견했다. 바로 앞으로 상대하게 될 중부 지역 영주들의 예상 전력 수치가 항상 정확한 값을 찾으려는 루시답지 않게 굉장히 추상적인 것. 루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북부 지역에 집중하다 보니 그쪽에 대해서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정찰병들을 그곳까지 확대할 예정입니다.]
“그거면 충분해?”
[충분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점령지의 완전 둥지화로 전력을 보충하는 사이 따로 정보원을 파견할 생각입니다.]
루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누군가를 보여 주었다. 화면에 보이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아무도 없는 집안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다, 당장 옷 입으라고 전해 줘.”
루시가 예고 없이 바꾼 화면에 새하얀 나신으로 서 있는 유리아가 있었다. 단단한 갑각과 거친 가죽이 아닌, 인간의 살결을 가진. 수많은 데이터를 보유한 루시의 보정이 들어간 것인지 너무나 완벽한 몸이었다.
“빨리.”
두 눈은 차마 뗄 수가 없었지만, 괜히 죄책감이 생겨 루시를 재촉했다. 그녀는 루시에 의해 자기 모습이 내게 보이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곧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본 유리아의 몸에, 무언가 빠르게 퍼져 나가며 한 벌의 옷이 되었다. 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현재 나와 함께하고 있는 것과 같았으니까.
[나노·오메가를 장착한 유리아가 지난번 살려 둔 그녀의 동생과 접촉해, 인간 세상에 잠입하여 그곳의 정보를 얻어 올 것입니다.]
“그곳에 접점까지 있다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네.”
방금 본 것을 애써 머리에서 털어 낸 나는 바닥에 엎드린 유리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인간이었던 존재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으니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 같았다. 이건 내 아이디어이기도 했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
[이제 그분이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현재 그분과 새롭게 증강한 전력으로 어떤 전략을 사용할 수 있을지 토의하는 중이니 당신은 일단 일어나십시오.]
“아.”
자신은 모르는 곳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유리아는, 뇌리에 울리는 루시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가 끝났다면 지금 즉시 인간 세상으로 가십시오. 가서 당신의 동생 크리스를 만나 그의 신뢰를 얻은 이후,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면 됩니다.]
“지금 즉시 가겠습니다.”
루시의 명령에 유리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란함은 컸지만 그만큼 돌아가서, 동생을 만나고픈 마음도 컸으니까.
그동안 마왕군의 지휘 개체로 활동하며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결국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은 탓이다.
‘만나서 무슨 이야길 해야 하지?’
하지만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고 그녀가 이전과 같은 존재란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동족이었던 인간을 배신하고 마왕의 은혜를 얻은 몸. 막상 동생을 만나 이야기 할 생각을 하니 걱정도 크게 앞섰다.
마치 미끈거리는 액체 같은 나노·오메가가 그녀의 몸을 덮고, 빠르게 분열하여 생성한 날개를 펼치는 그 순간에도 그녀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용히 허공을 가로질러 인간계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맥을 넘고, 대전쟁 시절 활약했던 거대한 장벽을 몰래 넘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날의 여파가.’
지난 번 들렸던 도시, 자신의 고향에 다시 도착한 그녀는 여전히 어수선한 도시 분위기를 보고 아직 수습이 덜 되었음을 직감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교단 세력에게 테러 당한 게 전부가 아니다.
도시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던 고위 마법사 일부가 그 혼란을 틈타 실종 당했으니 경계가 삼엄한 게 당연하다.
“후······.”
그러나 지금은 그녀도 보다 철저히 준비해 왔다. 도시 인근 숲 속에서, 은신을 푼 그녀는 전과 달리 평범한 옷을 걸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다. 망토 같은 것으로 몸을 가릴 필요도 없다.
그녀는 당당하게, 길을 따라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들었다.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 같습니다.]
“아마 그게 맞을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도시 입구에서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검문을 실시하고 있었다. 물론 유리아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인간이다. 그것도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 게다가 내부에 자신의 동생인 크리스도 있으니, 그 이름을 댄다면 수상한 자로 몰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 것이오. 신분, 출신 막론하고 협조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무력이 쓰일 수밖에 없소. 그만!”
그런 와중에 뒤쪽에서 누군가 시비가 붙어 소란이 벌어진 듯, 검문하던 병사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나무를 쪼개 만든 확성기를 들고 소리치더니 손에 든 무언가를 하늘로 들어보였다.
‘저게 무슨, 검도 창도 아니고.’
그것을 본 유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생전 처음 보는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기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힉.”
그런데 그 순간, 그것으로부터 귀청을 때리는 섬광과 굉음이 터져 나오며 일대를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었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계산중······.]
눈을 질끈 감은 유리아는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루시마저 그 초월적인 연산력을 가지고 판단이 늦어질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