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86화 (86/200)

< 86화-지배자 (6) >

86화-지배자 (6)

“에이, 거짓말.”

무심코 이렇게 말해 버렸다. 루시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게 왜 거기 있어?”

[저 역시 사실을 확인하려 노력중이나 관련 데이터를 스캔하고 분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부정한다고 바뀌지 않는다. 루시는 자신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스캔했는데도 그것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최근 마법사들을 심문하며 얻은 정보 중, 교단 측 세력들이 신무기를 들고 전장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신무기······.”

[결국 지금 당장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면 유리아의 동생, 크리스의 입을 통해 듣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쪽 세상일이라면, 루시가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루시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나는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유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루시의 명령대로 움직이며 현재 검문검색을 시도하는 병사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허공에 총을 쏜 사람이다.

단순한 옛날식 화승총도 아니었다. 그 형태와 재질, 심지어 부착되어 있는 액세서리 등.

내가 총기 전문가는 아니지만, 저 자동 소총이 지구에서 만들어진 총과 완벽히 흡사하다는 건 안다. 과연 저 사람은 저 무기가 뭔지 알고 있는 건가?

“마법사란 말이오?”

“이것으로 증명이 되었습니까? 저는 기사 크리스의 누이입니다.”

“으음, 좋습니다. 통과.”

몸을 바꾼 이후 완벽한 한 명의 사람이 된 유리아가 간단한 마법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들은 의심없이 그녀를 통과시켰고, 심지어 그녀의 동생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건 그 동생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게 대체······ 후.”

그 찰나의 틈에 나는 복잡한 머리를 움켜쥐었다. 세상이 엮여있는 일이라고 아무래도 내 상상 이상으로 무언가 깊게 엮여 있는 게 틀림없다. 아무렴 루시라는 존재도 탄생한 것이 저곳인데, 솔직히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건 없지.

***

“설마······ 정말로.”

“크리스, 오랜만이야.”

남매가 상봉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보는 화면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리아에게 병사의 안내를 받는 건장한 청년 하나가 커진 눈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와 같은 금발을 가진 이 훤칠한 청년이 분명 오진혁과 동갑인 18살이라던가.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기세는 이미 완숙한 기사였다.

“믿을 수 없어.”

“난 진짜야. 물론 믿기 힘들겠지. 할 이야기가 많아.”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크리스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리고 유리아의 목이 먹먹해지는 걸 제외하면 이산가족 상봉 치고는 의외로 침착하다.

이미 서로 한 번 봐서 그런 것일수도 있고, 그냥 아직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조용한 곳으로 가자. 우리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이쪽으로.”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유리아의 말에 크리스는 그녀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여기저기 복구 작업이 한참인 도시 한복판에 있는 시설은 그와 같은 기사들이 머무는 일종의 막사.

그는 거기서 아무도 없는 곳에 유리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지금 당장은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 같습니다.]

루시는 유리아의 옷과 피부 조직으로 변장한 나노ㆍ오메가의 일부를 떼어 자그마한 벌레형 정찰병으로 만들어 사방에 흩뿌렸다. 보안을 위해서였다.

“여기라면 안전······ 해. 그러니 솔직히 말할 수 있어.”

[유리아, 어서 총기에 대해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크리스가 그녀를 돌아보며 심란한 목소리로 입을 뗀 순간. 나는 루시가 유리아를 재촉하는 걸 보고 혀를 찼다.

“대뜸 그런 질문부터 하면 크리스는 유리아를 의심할 거야. 지금은 서로 교감하게 두는 게 맞아.”

[그렇다면 크리스가 그녀를 배신할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감정에 기초한 생각이니 넌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

루시는 서로 혈연관계인 루시와 크리스가 서로 믿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곧장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물론 당장은 괜찮다. 내가 막을 테니까.

“유리아에게 맡기자. 그녀가 스스로, 잘 돌파할 테니까. 무엇보다 크리스는 그녀의 동생이야.”

나는 루시의 개입을 차단하고 유리아를 믿어 주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그녀는 꽤 슬픈 눈으로 조금씩 정보를 흘리며 오랜만에 상봉한 동생의 의심을 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난 게 아니야. 왜 죽었느냐지.”

“하지만 분명 알프레드 님은······.”

“알프레드 그리제. 그놈은 배신자야.”

유리아는 진실을 밝히며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터트렸다. 크리스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우리를 미끼로 쓰고 버렸어. 자신의 전공을 위해서! 그리고 돌아와서는 그걸로 떵떵거렸지. 마치 자신이 위대한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그, 그럴 수가. 그럼 설마 그분, 아니 그를 납치한 것이 누님입니까? 다, 다른 마법사들은요!”

“······크리스.”

마왕군에 대해 묻는 크리스에게 유리아는 고개를  떨구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보아도 가슴 아픈, 사연이 많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린 널 혼자 두고 가버려서 미안해. 기껏 가서 싸웠으면서 승자가 되지 못하고 추하게 당해 버린 것도 미안해. 하지만 나는 결국 다시 한번 기회를 받았어. 무슨 기회인지는 묻지 마. 그냥······ 나만 생각해.”

유리아는 마왕군에 대한 언급은 그냥 넘겨 버렸다.

다행히 크리스는 착하고 착실한 남동생. 그는 누나의 진심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도 시시콜콜한 옛이야기, 현재의 이야기 정도였다. 다만 분명 그 이야기들을 통해 크리스는 눈앞의 누이가 진실된 존재임을 확인하고 남았던 경계심도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럼 이제 다시 함께 살 수 있는 겁니까?”

그리고 그 대화의 막바지에 크리스에게서 나온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건 확신할 수 없어.”

“확신할 수 없다니 대체 어째서. 설마 지금 누님에게 명령을 내리는······.”

“난 그분께 진심을 다해 충성해. 억지로 된 명령 따위는 아니야.”

“그렇다면 그자의 정확한 명령이 무엇입니까?”

루시의 이야기에 혀를 찬 크리스가 그녀의 목적을 물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목적은 당연히 하나다.

“그 무기 말씀이십니까.”

예상대로 크리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탐탁찮은 표정인 그는 총기를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다.

“그것은 교단에게서 노획한 전리품 중 하나로, 본래 마법적 연구와 분석을 위해 이곳에 보내진 물건입니다.”

“교단······ 의 신무기.”

“그것만이 아닙니다. 교단이 사용하기 시작한 각종 신기술에 연합군을 결성한 저희가 밀리는 형편이라 했습니다.”

혀를 찬 크리스는 교단이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 증언하고, 종이에 그려진 그림 자료까지 보여 주었다.

그림을 보고 설명을 들으니 더 가관이었다.

각종 총기, 소형 폭탄 등등. 마계의 지배자인 마계 영주들까지 합세해 싸웠지만 세력을 늘려가는 교단은 계속해서 그들의 저항을 깨부수는 중이었다.

[교단 쪽에, 지구와 연결점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내가 알기로 자꾸만 신문물을 꺼내놓은 집단은 하나밖에 없어. 바로 미 정보부.”

크리스의 증언을 바탕으로 빠르게 역추적이 가능했다. 내 뒤를 이어 던전 코어 활성화에 성공한 곳,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각성자들에게 지급하던 곳, 대량의 총기와 탄약을 무리 없이 이세계에 보급할 수 있는 곳.

[교단의 중심, 대성녀 이벨리아. 그리고 대성녀가 믿는 빛의 여신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물건들이 여신의 은혜라고? 그렇다면 그 ‘여신’은 미국인이란 소리네? 그것도 미 정부와 협력하고 있는?”

루시와 나는 상대의 정체를 특정했다. 지구상에서는 평범한 사람이면서, 또다른 세상에서는 빛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사람.

충격적인 결과에 나는 말을 잃고 주저앉은 의자에 기대었다.

[대성녀 이벨리아, 혹은 교단 관계자들. 그들은 차원 이동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흥분하지 마, 루시. 아마 그들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까. 우리처럼 물건을 좀 보내는 게 전부겠지.”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나는 어딘가 급해진 루시를 다독였다.

루시가 바라는 차원 이동까지는 그들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건들만 왔다갔다 할리가 없다.

“······난 그들이 우리 같은 이들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유형인지 그게 제일 궁금해.”

내 기억상 교단은, 정확히는 빛의 여신과 성녀 이벨리아는 이 세상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존재들이었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패색이 짙어지던 이들을 구원하는 한 줄기 빛. 말 그대로 구원자.

그 뒤로 이어지는 파죽지세의 성장 가도는 우연찮게 휘말려서 미궁 밑바닥부터 악착같이 성장해 온 우리와 사뭇 달랐다. 위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계단을 오르듯 그들은 착실하고 지속적으로 성장을 반복했다.

만약 이것이 정해진 일이라면, 그들이 이미 대승리를 거둔 이후에 루시가 이곳에 떨어진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우연 혹은 사고라면 설명이 가능하다.

[방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대응 방안을 설정하기에 데이터가 너무 부족합니다. 제게 길을 알려 주십시오.]

“나도 확신할 순 없어. 그러니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자.”

루시는 물론 나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루시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면 그냥 막 질렀겠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교단과 대성녀. 루시의 성향과 그들의 성향을 볼 때 언젠가는 반드시 충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은 제가 대체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먼저 물러날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알아. 벌써부터 그걸 걱정하진 않아도 돼.”

루시는 내가 그들을 같은 편으로 인식하고 싸우지 못하게 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들이 내 정체를 모르는 이상 이곳에서 싸운다고 현실에서 그들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루시의 말대로 루시가 그들을 대체하지 못할 것도 없으니까.

단지 두려움이 앞섰을 뿐이다. 루시를 도와야 하는 나는 일개 개인에 불과한데, 그들은 거대한 집단이니까.

[그것은 괜찮습니다. 제가 그 이상으로 거대해지면 됩니다. 그들이 없더라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그러나 이번에는 루시가 내 걱정을 불식시켜 주었다.

***

“어쨌든 계속 여기 있을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당분간은.”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지만, 어쨌든······.”

지시를 내려야 할 루시가 잠시 말을 잃은 사이, 유리아와 크리스는 다시 사담을 나눌 수 있었다.

크리스의 눈은 굉장히 복잡했다.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는 유리아 이상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변한 곳이 없어 보입니다.”

“마족들의 포로가 되어 한낱 짐승으로 굴러 떨어진 내가 몇 년이나 목숨을 부지한 것도, 새로운 은혜를 얻은 것도 기적 그 자체니까.”

크리스는 자신과 헤어질 무렵과 다를 게 없는 유리아의 모습에 탄식했고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신체의 최전성기로 복구된 그녀의 얼굴과 몸은, 꽤 나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크리스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유리아, 이번엔 그에게 현재의 전황에 대해 물어보십시오.]

다만 루시의 지시가 계속해서 이어졌기에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계속해서 할 일을 해야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