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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87화 (87/200)

< 87화-지배자(7) >

87화-지배자(7)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은 것 같습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리아는 당분간 저곳에 상주시키겠습니다. 그녀가 있는 대산맥이 장벽과 멀지 않으니 몰래 다니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크리스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은 루시는 계획대로 유리아를 그곳에 두고,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루시가 수많은 계산과 가설 설계를 거쳐 가장 좋은 것들을 제시해주면 나는 그것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것뿐이다.

다만 내 마음을 계속 무겁게 하는 것은 역시 오늘 알게된 세상의 비밀 때문이다. 저쪽 세상의 운명을 뒤튼 존재들이 내가 사는 현실과 이어져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리가 없다.

"그들의 목적이 뭔지 모르겠어. 단순한 교류인가? 그렇다고 보기엔, 대성녀는 분명 이 전쟁을 여신의 뜻이라고 천명했는데."

어쩌면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일지 모르는 빛의 여신이 바로 전쟁의 배후였다. 전세계를 교단의 발아래에 두겠다는 무모한 전쟁.

그들은 그것이 정답이고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나는 이 세상일에 정답 따위 없다고 믿었다. 이미 그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가, 고통 받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크리스의 증언을 통해 생생히 들었다.

"역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가? 지금 상황에."

[제게 지시하신다면, 차후 대성녀까지 막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아니, 우리는 일단 우리 일에 집중하자. 굳이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당장 교단과 척질 필요는 없잖아."

내 말이면 기꺼이 비효율도 감수하려는 루시의 태도에 쓰게 웃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루시의 성장과 그것을 통한 영향력이지 무턱대고 외치는 평화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교단은 현재 기존 세력들이 마계 영주들과 연합한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지. 그리고 마계 영주들과 우리는 반드시 서로 죽여야 할 적대관계고."

나는 저쪽 세상의 세력도를 떠올렸다. 현재 전면에 나선 세력은 총 3개. 대륙 서부와 북부 일부를 점령한 교단과 그 외를 차지한 연합군, 그리고 마계 북부의 우리다.

"우리는 그들의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좋은거네. 그들 입장에선 우리가 완전한 불청객 같겠군."

[그렇습니다. 비록 완전한 함수식은 아니지만 급한 대로 제작한 제 함수모형에 의하면 현재 상태가 지속될수록 마계 영주들이 가진 자원량은 전체적으로 3%씩 매월 감소합니다. 또한 이 감소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제 마계의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하여 그 환경을 통해 상대의 자원량을 추측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루시는, 오늘 획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상대의 전력을 예측하였다.

내 예상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앉은 자리에서 시간만 질질 끌 생각은 없지?"

[그동안 손실되는 에너지는 아직 제가 이용할 수 없는 형태의 에너지, 그것을 두고볼 수 없습니다]

다만 루시는 가만히 대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더 비효율적이니까. 대신 힘이 빠져있는 적들을 먼저 공격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먹어치울 생각이었다.

[이미 저희의 정보를 알고 있을 중부지역 영주들을 일시에 공격하겠습니다. 그들이 당황하여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사이, 마계 영주들을 하나씩 저격하여 쓰러트리겠습니다]

"그래. 그들을 공격해. 이제 남은 영주는 64명인가? 많기도 하군."

나는 루시의 공격 계획을 승인했다. 죽여야 할 적들의 숫자는 아직 많지만, 계속해서 속도를 끌어올리는 루시를 지켜봐 온 나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을거라 확신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루시가 가진 힘의 총량이 그들보다 크냐 마냐일 뿐, 만약 루시가 가진 힘이 그들을 넘어선다면 정말 한 번에 밀어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지연으로부터 온 전화입니다."

"지금?"

벨소리와 함께 루시가 걸려온 전화를 알려온 게 그때였다. 일단 화면을 접은 나는 예정에 없던 이지연의 전화를 받았다.

"던전 코어를 대량으로?"

"네. 협회장님이 크게 기뻐하면서 먼저 알려주셨어요."

오늘은 휴일인데도 모자를 눌러쓰고 나를 몰래 찾아 온 이지연은 자신이 직접 들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지역 수십 개 나라가 연합해서 던전코어를 처리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기술이 있는 곳에 맡기려 했죠. 꽤 큰 사업이라 경쟁이 붙었는데 이번엔 협회장님이 이겼나봐요."

"경쟁이 붙은 곳은 역시 미국이겠죠."

내가 피식 웃으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던전 코어를 활성화 시키는 기술은 루시가 말하길 마력을 다룰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들이 대체 이 기술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도 결국, 나처럼 일종의 하청을 맡긴 것이다.

"전 상관없습니다. 언제 가능할까요."

"제가 협회장님한테 조건을 말해뒀어요."

헛기침을 한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 대신 전면에 나서준 그녀는 협회장 백승철에게 철통같은 보안이 요구되는 지하벙커를 요구하고 그곳에 던전 코어들을 가져다 두기로 합의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몰래 그것들을 활성화시키면 된다. 듣자니 수많은 나라에서 보내왔다지만 그 양은 결국 캐리어 가방 몇 개분이 전부다.

"잘 하셨습니다. 감사하게도."

내가 웃으며 말하니 그녀가 도움이 되어 기쁘다며 웃었다. 그 웃음, 분명 호의만 가득한 웃음이다.

내가 분명 이지연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를 신뢰할 줄은 몰랐다.

"창현씨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던전 코어를 활성화시켜 차세대 동력원을 확보하고, 괴물들을 사냥하고."

그리고 그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며 농담을 섞어 물으니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저는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닌걸요. 물론 방금 하신 말이 맞을수도 있지만 제 목적은 결국 제 욕심을 채우는 게 가장 우선인데."

"나이를 좀 먹어보니, 때로는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신경 안 써요."

떠나가는 이지연은 한치의 의심 없이 나를 믿었다. 나보다 나를 더 믿는 것 같았다.

과정보다 결과. 누군가는 동의하지 못할 그 말이 내 가슴을 흔들었다.

역시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영웅의 자질이 있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해야겠어. 지금까지 해온거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저 사람을 실망시키면 많이 미안할 것 같아."

[이지연과 만날 때마다 심박과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신경 역시 날카로워집니다. 혹시 모르니 건강을 위해서 관계를 멀리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래."

루시의 티나는 질투에도 나는 이지연을 버릴 수 없다. 이미 많이 뒤틀린 내 인생에, 그녀가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크다.

***

"철저히 경계하고, 보안 유지에 신경쓰게. 특사는 공항에서 도착했다던가?"

"예, 현재 차량을 바꿔 타고 극비리에 이곳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심장 떨려 미치겠군."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평일 오후. 그러나 상황실에서 상황을 보고 받는 백승철은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언론에 떠벌리지 않고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무수한 던전 코어를 실은 차량이,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준비한 장소로 향하고 있다.

"지연이 너, 괜찮은 거 맞지?"

"그럼요."

"보안상 관계되는 인력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런데도 불안해."

백승철은 곁에 있던 이지연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백승철은 이지연이 던전 코어를 활성화 하는 기술을 배웠으며 지금까지 소량 생산된 것이 다 그녀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고 있는 상태, 오직 그만이 알던 비밀이었지만 이제 다른 이들도 그렇게 알게 될 것이다.

"그 정보가 정말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극비리에 움직이는 것이죠."

사뭇 심각한 주변 눈치를 본 그녀의 물음에 답한 것은 백승철이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

정부 관계자인 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 예측한대로 중국, 러시아등의 요원들이 움직였다는 첩보입니다. 반대쪽에서 정보가 샜을 확률이 높죠. 적어도 어디서 어떻게 작업이 이뤄지는지는 모르게 하려는 겁니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요? 타국에서 충돌을 각오할 정도로?"

"...그까짓 돌덩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이지연씨 당신이 제일 문제입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이지연의 반문에 침음했다.

분명 활성화 이전의 던전코어는 빛나는 돌덩이일 뿐이고, 에너지를 품고 있다 한들 결국 소모성 자원일 뿐이다.

고작 그것을 위해 외교적 충돌을 감수하고 허튼짓을 벌일 이들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특수부대, 혹은 공작원이라지만 전 지지 않아요."

이지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무기인 커다랗고 묵직한 방패를 들어올렸다.

튼튼하게 만드느라 온갖 기술이 다 들어간 그 방패는 평범한 인간이 들 수 없는 무게지만, 이지연은 그걸 한 손으로 들었다.

"물론 그렇겠죠. 이지연씨는 국내에서도 손에 꼽는 분이니. 그러나 상부는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떤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나타날지 모른다.  어떤 기술로 상황이 뒤바뀔지 모른다. 애초에 지금은 그런 시대다. 그것을 이해한 그녀는 입을 다물고, 물건을 챙겼다.

"이제 이동하죠."

이지연도 준비된 장소로 향해야 한다. 던전 코어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녀를 태운 차량은 평범한 승합차로 위장한 상태로 조용히 움직였다.

"저곳입니다."

그리고 금방 장소에 도착했다.

도심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버려진 옛 지하벙커는 확실히 지키거나 숨기기에 특화된 장소였다.

'알고 있는 곳에 숨어서 경계하는 이들 말고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역시 너무 지나친 걱정이었을까.'

이지연은 어둑한 벙커의 복도를 홀로 걸어갔다. 비밀리에 운송된 물건은 이미 도착해서 그곳에 준비된 상태다.

그리고 그곳에는, 물건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녀가 방에 들어가는 순간 미리 와서 은신한 상태로 몸을 숨기고 있는 그가 물건에 손을 델 것이다.

"창현씨."

"여기선 괜찮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설치된 추적기와 소형 카메라 등 전기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파괴했으니까."

예상대로 그녀가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간 그 순간, 미세한 파동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가며 동시에 그늘 속에 모습을 감추었던 그가 꿈틀거리는 검은 무언가로 몸을 덮은 채 걸어 나왔다.

"어떻게...그보다 감시장비라고요?."

"기어코 몰래 달아뒀더군요. 미세한 전자파를 방출해 망가뜨린 것뿐입니다. 저기 달려오는 사람들 좀 해결해 주세요. 문제없으니까 알아서 하겠다고."

그는 밖에서 달려오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손가락으로 닫힌 문을 가리켰다. 과연 장비들이 파괴될 줄 몰랐는지 곧바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크, 큰일났습니다! 습격! 습격입니다!"

"...음?"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이들의 다급한 외침은 그가 감시 장비를 파괴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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