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지배자 (9) >
89화-지배자 (9)
“너무 급한 것 아니냐? 아직 처리가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제 개인적인 일이랑도 관련 있으니 봐 주세요.”
내가 먼저 연락했을 때, 그가 승인하지 않자 이지연은 그 길로 협회장이자 사장인 백승철을 직접 찾아갔다.
그러자 그가 내 눈치를 보며 그녀를 달랬다. 이전에 있었던 던전 코어 탈취 사건은, 사실 나는 몰라야 하는 일이니까.
나는 그 시간에 그녀가 개인적인 일처리를 했다고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 잠시 나가 있어 주겠나?”
결국 설득할 생각인지 그는 나를 밖으로 내보냈고, 나는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그녀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고, 백승철은 귀중한 인재인 그녀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지금 상황은 어때.”
[새로운 계획에 맞추기 위해 우선 모든 작업을 정지시켰습니다. 유리아는 계속 도시에 머물며 엘프, 라온의 위치를 감시하고 다른 병력들은 중부 지역 영주들을 공격하지 않고 대기 중입니다.]
시간이 생긴 김에 나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듯 루시와 대화했다.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움직이듯, 루시 역시 우리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행동을 맞추는 중이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초거대 비행종의 베이스가 될 표본을 전송해 주신다면 그 즉시 표본을 분석하여, 새로운 병사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서두를게.”
이렇게 우리 둘 모두 기민하고 치밀하게 움직이는데도 마음이 살짝 급했다.
결국 시간에 제한이 있어서 그렇다. 서로 싸우려 드는 교단과 연합군이 딱 충돌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결정한 난입 타이밍이니까.
그들이 크게 당황해서 우왕좌왕 하는 사이 우리는 목표물인 엘프, 라온을 납치해서 복귀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출발 준비하죠. 협회장님이 허락하셨어요.”
“수습은 어떻게 된답니까?”
“국정원과 연계해서 알아서 잘 하겠죠. 거래에 엮였던 이들에게서 정보가 샌 건 분명한데······. 우리나 정보를 제공해 준 미 정보부가 아니라면 상대쪽이겠죠.”
머지않아 협회장실 문을 열고 나온 이지연은 당당하게 허락을 받아 왔다. 닫히기 전 문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백승철의 모습이 보였는데, 역시 책임자의 자리는 스트레스가 많겠지.
“급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출국하죠.”
“어, 그런데 저희만 가는 건 아니에요.”
어쨌든 허가가 떨어졌으니 그렇게 일 처리를 하려던 나를 그녀가 붙잡았다.
“팀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혹시 모른다고.”
“······이해는 가지만 비효율적이네요.”
혀를 찬 내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사람이 늘어나면 당연히 그만큼 늦어지고 할 일도 많아지니까.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덕분에 억지로 버티고 있지만 사실 이 일은 역시 내 적성에 완벽히 부합하는 일은 아니었다.
***
“던전을 공략해야 게이트 발생을 줄일 수 있습니다. 던전 안에 있는 괴물들은 현실로 나오지 않는다고 방치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란 뜻이죠.”
“하지만 저희들은 게이트를 방어하는 것만으로 한계입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겁니다. 세계의 도움이.”
화면 속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주장했다. 다 영어지만, 어차피 루시가 번역해 준다.
“목적이 같다고는 못하지만 어쨌든 괴물과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낭비이고, 인명피해입니다. 세계 각성자 연합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세계를 아우르는······.”
“뭐 보세요?”
그렇게 한창 그의 연설을 듣고 있을 때. 옆자리에서 머리통이 하나 불쑥 끼어들었다.
“데릭, 데릭 크래브.”
“너도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나는 화면 속 사내를 알아본 오진혁에게 되물었다. 설마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 이런 데 관심 많아요.”
녀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최근 들어 각성자들을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더 좋아하는 이들이 생겨나 팬덤 열풍이 불 정도였으니까.
“최근 세계적으로 빠르게 떠오르고 있는 각성자죠. 그 이유는, 그의 출신과 행동 때문에.”
“맞아. 현직 용병이었다던가?”
나는 오진혁의 대답에 긍정했다. 거친 인상의 사내인 데릭 크래브는 본래 PMC의 일원이었다가 각성한 인물. 그러나 그는 팀을 만들고 자신의 일을 계속 이어 나갔다. 다만 그 상대가 사람에서 침략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각성자 연합 기구를 적극적으로 써먹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녀 괴물들을 ‘사냥’하는 자. 사람들은 그와 그의 팀을 평범한 각성자와 구분지어 ‘헌터’라고 불렀다.
당연히 그 터프하고 과감한 모습을 좋아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기본적으로 그가 강했으니까 가능한 인기 몰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 인터뷰 영상을 왜 보고 있어요?”
“그야 이번 작전에서 우리와 함께 움직일 확률이 높으니까.”
“예······?”
생각해 보니 내가 아직 일행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오진혁은 내 말을 듣더니 놀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모습이 꼭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은 소녀팬 같았다.
“짐은 알아서 올 겁니다.”
“살면서 한 번도 못 가 본 해외를 몇 번이나 다니는지 모르겠네요.”
남아시아의 뜨거운 공기가 공항부터 느껴진다. 해외가 어색한 건 이지연은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나는 함께 온 이들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다.
몰래몰래 도와주는 루시의 도움이 없었다면, 장담하는데 이 일 못 했을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나가서 차량에 탑승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 미리 봐 둔 방향으로 일행을 안내하려던 순간, 내 눈에 무언가 보였다.
“여깁니다. 이지연 씨!”
생판 처음 보는 외국인이 어눌한 한국어로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흘리고 있는 미세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루시는 그를 보고 마력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그것은 즉 그가 각성자라는 소리.
“저희 단장이 보내셨습니다. 데릭 크래브, 혹시 알고 계시는지.”
“그분이 왜 사람을······.”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시죠. 이지연 씨는 뛰어난 각성자이고, 앞으로 같이 싸워야 하는 입장이니 단장도 신경 쓴 겁니다.”
영어로 언어를 바꾼 그는 자신을 데릭 크래브의 팀원이라고 소개하며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전화를 돌려보니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결정하시죠.”
나는 이지연에게 선택을 미루었다. 어쨌든 우리 파티의 주체는 그녀니까.
“이번 던전 공략에 참여하는 각성자가 저희만은 아닌데요. 다른 분들에게도 연락을 먼저 시도하신 건지?”
“아니요. 말씀드렸지만, 저희 단장은 이번 임무에 굉장히 진심이시라 핵심이라 생각되는 이들을 따로 부른 겁니다.”
함께 이동하는 차량 안. 이지연의 질문에 직접 운전대를 잡은 그는 데릭 크래브가 왜 우리를 불렀는지 말해 주었다.
이지연은 한국에서도 손에 꼽는 각성자. 게다가 지난번 베헤모스 사건 등에서도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으니, 그 위상이 올라가는 건 당연하다.
“설마 그를 따로 보게 되다니······. 먼발치에서만 봐도 기적이라 생각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오진혁은 이미 잔뜩 흥분했는지 안달이 난 상태다. 분명 이렇게만 본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던전 공략을 앞둔 프로 헌터의 치밀한 일 처리일 뿐.
하지만 어딘가 마음에 자꾸 걸리는 점이 있었다.
[심박과 호흡의 변화, 동공의 움직임, 목소리에 내재된 떨림과 미세한 망설임 등등. 데이터에 근거한 추론에 의하면 그는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루시가 진단해서 내게 알려 주었다.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데릭 크래브가 대체 왜?”
던전 근처에 만들어진 일종의 캠프. 이지연과 오진혁은 이곳에 도착해, 따로 데릭 크래브를 만나러 갔다.
현지 군인들, 관계자들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온 각성자들과 언론인들도 바글거리는 곳이니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생길 확률은 낮지만 어쨌든 변수가 생겼음은 틀림없다.
[그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 판단하기 힘듭니다.]
“아, 아니야. 루시, 너는 네 일에 집중해.”
멍하니 중얼거리며 주변을 서성거리던 나는 루시의 대답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루시의 연산력은 동시에 수많은 일을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하지만, 어쨌든 그쪽 일이 바쁜데 굳이 낭비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네 역할은 충분히 해 줬어. 그걸 해결하는 건 여기 있는 내가 해야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설을 세워 보면, 그가 최근 들어 다른 각성자들에 비해 빠른 성장을 반복해 온 것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는 가설 하나를 제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분명 루시의 가설대로 그는 최근 계속해서 전투에 참여하고 꿋꿋하게 살아남아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다.
“하긴, 무슨 능력이 있을지 모르지. 조심하라고 해야 하나.”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지름 수백 미터짜리의 거대한 균열을 보며 탄식했다.
지금은 유사시 망설임 없는 자살이 가능할 정도로 훈련된 각성자를 파견해서 물건을 탈취하기 위한 공격을 시도할 정도인 시대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안 생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신하자면, 그 일은 우리가 저곳에 들어간 순간에 벌어질 확률이 높았다.
[잠시 멈췄던 라온의 부대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는 정보입니다.]
“그럼 지금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보여 줘.”
물론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원하는 것을 얻어야만 한다. 이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니까.
[잠시 행군을 멈췄던 이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지원군의 합류를 기다린 것 같습니다.]
루시는 정찰병의 시선을 보여 주었다. 마계만큼 많지는 않지만 루시는 유리아와 함께 평범한 날짐승의 모습을 취한 정찰병들을 인간 세상에 풀어두었다.
“마족······이네. 트롤종인가?”
그리고 그 정찰병의 눈에 행군하는 한 무리의 군대가 보였다. 대다수가 인간들로 보이지만 그들 중 일부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한 우락부락하고 거대한 몸. 우리가 죽였던 오리아스의 동굴 트롤은 아니지만 같은 트롤종이 분명했다.
서로 싸워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의 두 군대가 함께 걷고 있으니 어딘가 묘하다.
[그리고 현재 집결 중인 교단의 병력들입니다.]
루시가 이어서 보여 주는 것은 미리 집결하고 있는 교단 측의 병사들. 트롤들 같은 마족들까지 합류한 연합군과 비교하면 겉모습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들이 보여 주는 광기와 거침없음은 나도 분명 보았다.
다만, 이렇게 위에서 훑어보는 것에는 총기 같은 무기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남은 예상 시간은?”
[약 72시간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사흘. 사흘 안에 루시에게 표본을 전송해야 루시가 제대로 된 타이밍에 난입할 수 있다.
내게, 내 손에 결과가 달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