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난입(2) >
92화-난입(2)
“여유가 있었다면 나머지 이들도 남김없이 이곳으로 보낼 수 있었을 테지만.”
루시는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으로 전송해서 그 시체를 처리한, 창현을 공격한 용병단원처럼 추락하게 내버려 둔 데릭과 그 패거리까지 싹 이곳으로 불러 진정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고 처리하고 싶었지만 베헤모스보다 더 단단하고 거대한 아일랜드를 전송하는 것만으로 한계였다.
“일단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하지만 루시는 이미 지나간 일에 후회 따위 하지 않는다. 이미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에 집중하며 해결 방법을 생각할 뿐이다. 그것이 효율적이니까.
“강인한 방어력을 갖춘, 공중을 부유하는 km급 초거대 비행종.”
그 눈앞의 일이란 바로 이곳에 전송된 아일랜드를 분해 및 분석하여 그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 그것을 위해선 필연적으로 저 거대한 생물을 죽여야 한다.
갑작스레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한 것이 당황스러운지,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듯 당당하게 하늘을 부유하던 아일랜드는 마계의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했다.
[전군 공격]
루시는 미리 준비시킨 비행종들을 동원해 아일랜드를 공격했다. 이곳으로 전송당하며 품에 키우고 있던 저항 능력을 대부분 상실한 아일랜드를 향해, 족히 수천에 달하는 이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물론 저 거체에 비하면 가장 큰 비행종도 모기 수준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사방을 들러붙어 마구잡이로 몸을 공격하고 있는데도 아일랜드는 구슬픈 울음소리만 흘릴분 막상 큰 타격을 입어 지상으로 추락하지는 않았다.
“역시 화력이.”
이미 예상한 광경이긴 하지만 루시는 미약한 마왕군의 데미지를 신경 썼다. 마법이든 주술이든 무슨 방법을 써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강심을 이용해 마나를 쓸 수 있는 감마나 델타 타입들도 결국 개인의 출력으로는 저런 거체를 쓰러트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자, 루시가 더 강한 화력을 원하게 된 순간이었다.
결국 자신이 직접 하늘로 날아 오른 루시는 손에 든 롱기누스를 자리를 벗어나려는 아일랜드를 향해 겨누었다.
[롱기누스·최대출력 전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엄청나게 응축한 마력을 그대로 쏘아 보냈다. 수많은 대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덩치와 화력은 비례한다는 일종의 법칙을 부숴버린 마왕군의 이 전략병기는 다른 이들의 공격과는 달리, 아일랜드의 단단한 갑피와 가죽을 부수고 그 내부에까지 힘을 뿌릴 수 있을만큼 강했다.
“떨어집니다.”
곧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트린 아일랜드가 점점 기울며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가 완전히 추락할 때까지, 루시는 충전이 끝나는 대로 계속해서 마력포를 뿜어내어 끝내 이 거대한 생물체의 목숨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이쪽도 대충 수습 되는 중이야. 그나저나 아일랜드를 분석하고 개조하는 건 오래 걸릴까?”
“아일랜드 전송 및 포획은 예정시간보다 약 2시간 12분 32초 정도 앞당겨 졌습니다. 분석과 개조 역시 변수가 없다면 계획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습니다.”
“좋아. 후...이제 한시름 놓겠어.”
창현은 루시의 보고를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가 아일랜드와 싸우고 지상으로 떨어트리는 사이, 이지연과 오진혁을 구출한 그는 뒷수습을 해야 했으니까.
비록 데릭이 먼저 적의를 드러내고 공격했다 하더라도 최근 그 주가를 빠르게 올리고 있던 유명인, 그런 사람이 자기 패거리와 함께 몰살당했으니 파장이 적을리가 없다.
‘...개조를 서둘러야겠습니다.’
루시는 그의 한숨을 듣고 행동을 더 재촉했다. 지금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 서둘러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뿐이라 판단한 것이다.
다행히 루시에게는 이미 거대한 생물체를 분해 및 분석하고 개조해 본 경험이 있었다. 저장소 역할을 하는 뇌용적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하는 등, 생체 컴퓨터처럼 행동하며 한 번 습득한 경험은 결코 잊지 않는 루시는 베헤모스를 개조한 경험을 통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이 구상한대로 아일랜드를 분해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무궁무진하지만 일단은 가장 필요한 대량 수송 능력을 발달시키고, 은신 능력을 추가하며, 강심을 활용해 그 효율을 극대화하겠습니다.”
일종의 설계도 역할을 하는 아이디어는 그가 제공한 것이었다. 비록 현실적인 개조를 거치며 그 모양과 형태 등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덕분에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생물체가 하나 탄생한다.
마왕군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렇지만 짐승의 형태를 한 마수형이나 마계의 마족들을 베이스로 한 마족형등, 설령 루시가 완전히 처음부터 만들어낸 합성생물이라 쳐도 적어도 지금까지의 마왕군은 어느 정도의 ‘상식’내부에 존재해왔다.
하지만 지금 탄생하는 초거대비행종 아일랜드·알파는 달랐다. 심장 같이 생물이라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내부 장기를 통째로 강심과 마력으로 대체하고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하위프로그램을 복사해 뇌에 주입하는 등 루시의 개조 능력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점차 생물의 범주에서 벗어난 그것은 생물이라기보다는 하늘을 나는 함선에 더 가까웠으니까.
다만 오직 전쟁을 위한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루시도, 루시의 근본이 인공지능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그도 이런 방향으로의 진화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쓸데없는 신체부위를 모두 축소해 오히려 크기는 조금 줄었지만 내부에 담을 수 있는 용적은 늘어났습니다. 현재 아군의 주력 중 하나인 신장 2m 언저리의 마족형 병사들은 약 1000기 이상, 그보다 더 큰 마수형 병사들은 약 500기 이상 우겨넣을 수 있는 수치입니다.”
“생긴 모습은 무슨 부풀어 오른 가오리 같은데...방어 능력은? 덜어낸 만큼 원본만큼 단단해 보이진 않아.”
“그렇습니다. 기존보다 방어력이 대폭 약회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부분은 방어 병력까지 따로 운용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긴, 사실 제일 큰 문제는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긴 하지. 과연 그들이 이걸 막을 수 있을까? 거대한 비행 생물체를 동원한 기습적인 강습, 마치 수송기를 쓰는 것처럼 말이야. 상상도 못하지 않을까?”
휴대폰 화면으로 예상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쓰게 웃었다.
당장 지구인들 역시 대형 이상의 침략종들을 상대하는데 애를 먹고 있는데, 전투법이 다른 방향으로 발달했다지만 과연 현지 세력들이 이 거대한 생물체를 막을 수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이제,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채 며칠이 되지 않아 마침내, 루시의 설계대로 완성된 새로운 병기가 성장을 마치고 눈을 떴다.
***
“고생했네 찰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늘 그렇듯 심심하기만 할 뿐이지.”
거대한 장벽 위. 드문드문 놓여진 초소에서 병사 몇이 서로 교대를 진행했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대산맥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차갑고 건조해 농사도 안 짓는 이 땅은 한때 치열한 전투로 긴장을 놓을 틈도 없는 곳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계와의 적대 관계가 풀어진 이후 정말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 관리하는 그런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평화롭기 짝이 없군.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잠자리에 들면 아직도 그날의 꿈을 꾸는데.”
꽤 나이 있는 병사인 찰스는 교대 이후 자리를 떠나며 뒤를 돌아보곤 중얼거렸다. 대전쟁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병사인 그는 아직도 그때의 악몽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 악몽과 대비되는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은 이질감과 동시에, 그에게 악몽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 어쨌든 이 평화는 그와 같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이루어낸 것이니까.
비록 내륙에선 그 평화가 같은 인류의 손에 의해 끝나버렸지만 적어도 한평생 이 일대에서 살아 온 그에겐 다시금 저 대산맥에서 적들이 몰려오는 게 아닌 이상 무의미한 이야기었다.
“날이 흐려지나?”
성벽을 내려 온 그는 갑작스런 그림자에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있는 구름들이 눈부신 햇살과 함께 푸른 하늘을 유영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들의 움직임은 어떻다던가. 먼저 이 일대를 공격하지 않고 기다리는 게 누가 봐도 물러서지 않고 우리와 한번 싸우겠다는 모양새던데.”
“똑같습니다.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말씀하신대로 저희가 도착하면 바로 움직일 기세입니다.”
“슬슬 지치는군.”
혀를 찬 그가 손에 쥔 고삐를 움켜쥐었다. 겉모습은 갈색머리를 한, 훤칠한 젊은 청년이지만 얼굴을 찌푸리니 주변의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뾰족한 귀가 움찔거렸다.
엘프 라온, 방랑자로 시작해 한때는 대전쟁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이들 중 하나. 그는 피로감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히 이 전쟁, 이 싸움은 그가 원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직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지치면 어떡하지?”
“닥쳐라. 남의 땅에 와서 싸우고 있는 너희들은 알 턱이 없지.”
그런 그를 비웃는 이가 있었다. 고개를 돌린 라온은 참지 않고 반발했다.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닐 텐데. 게다가 남의 땅에서 싸우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나 상대도지지 않고 낄낄거렸다. 땅을 걷는데도 말을 탄 그보다 훨씬 키가 큰 자주빛 피부의 트롤전사. 갑주를 걸친 육중한 걸음걸이가 이어질 때마다 근처의 땅은 울릴 정도였다.
비록 서로를 도발하고 비웃고 있지만 엘프와 트롤이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울 준비를 한다는 것, 마왕이 살아있던 대전쟁 이전에는 상상조차 못할 광경이었다.
“지금 마계도 여러모로 시끄럽다던데 여유로워 보이는군.”
“흥, 이상한 벌레들이 창궐해서 발생한 사소한 소란일 뿐이다.”
라온이 북부가 완전히 멸망한 현 마계의 상황을 가지고 도발하니 트롤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본진인 마계 상황이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흑철충이라는 벌레들, 북부 영지들을 죄다 먹어치운 이후 조용하다더니 그건 다행이다.’
불과 며칠 전 본국에서 받은 연락에는 수많은 난민들을 만들어 낸 괴물들이 당장이라도 중부지역으로 쳐들어 올 것 같았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작스레 활동을 정지했다고 쓰여 있었다.
“덕분에 북부에서 영주를 잃은 아주 많은 도망자들이 생겼단 말이지, 잘하면 그놈들도 이번 전쟁에 동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당연히 더 유리해지겠지.”
“하. 너희는 동료 의식도 없는가.”
자기들 전력을 아끼기 위해서 도망쳐 온 북부 영지의 마족들을 이 전쟁에 밀어 넣을 것이란 말에 탄식한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한때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같이 싸웠고, 지금도 힘을 합친 건 마찬가지지만 사실 엘프와 마족은 상극에 가까웠다.
“급보입니다! 지금 교단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방향은 정확히 이곳입니다!”
“...역시 쉴 틈은 안주는가.”
그리고 그 순간, 이제 막 도착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규모의 적들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인다는 소식이 그들에게도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