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난입(4) >
94화-난입(4)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라온을 포함, 현장의 그 누구도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지면에 가까워진 아일랜드·알파의 몸에서 수많은 마왕군이 뿜어져 나와 전장에 난입하는 그 순간에도 그랬다.
그나마 마왕군의 칼날과 이빨이 자신들의 몸을 베어내고 꿰뚫는 순간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이것들 설마! 흑철충!”
“뭐?! 마계 북부의 그 괴물들 말이냐!?”
그런 와중에 부상 입은 몸으로 전투를 벌이던 트롤 대전사 바란이 그동안 소문이 무성하던 마계 북부의 마왕군을 알아보고 고함쳤다. 그 말을 들은 라온은 기겁하여, 자신에게 덤벼드는 오크·감마의 검을 활로 겨우 쳐냈다.
“그 괴물들이 왜 여기 나타난 것이지? 그, 그보다 저 거대한 것은 도대체.”
그러나 마왕군을 알아보았다 해도 혼란함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그들로서는 대체 왜 마계를 어지럽히는 신흥 세력인 마왕군이 대뜸 이곳에 나타났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마왕군은 교단이든, 연합군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격하여 학살하는 중이었다.
“이 사악한 마족놈들! 결국은 이런 미친 괴물들까지 동원하느냐!”
그런 상황에서, 마왕군에게 산채로 뜯겨나가는 아군을 보던 교단의 대사제 헤르만은 마왕군이 마계에서 온 이들임을 엿듣고 연합군이 마왕군을 불러들인 것이라고 오해했다.
“다들 들어라! 저 간악무도한 놈들이 결국은 최소한의 선마저 어겼느니라! 이 마계의 괴수들은 저놈들이 부리는 것이다!”
“저 개자식이! 지금 우리도 공격받고 있는 건 전혀 보이지 않는 건가!?”
연합군이 마왕군을 부른 것이라 소리치는 헤르만의 모습에 총사령관인 러셀 백작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억울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다들 들어라! 흑철충들은 마계에서도 마족들의 적이다. 미친 광신도들이 결국 괴물들과 손을 잡은 것이다!”
러셀 백작은 질세라 병사들을 향해 마왕군이 교단과 손잡은 이들이라 우기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두 집단 모두를 공격해 공멸시킬 생각이었던 루시에겐, 그들이 어쩌든 신경 쓸 일 아니었지만.
“각 세력의 주요 인물들을 저격한 이후, 원래 목표였던 엘프 라온을 공격합니다.”
루시는 이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했다. 미리 구성한 상위급 병사들을 이용해 각 세력의 주요 인물들을 저격하게 만들고, 안 그래도 힘이 빠져있던 그들을 제압해 변수를 제거했다.
“이, 이것들이 감히!”
트롤 대전사 바란이 그런 경우였다. 안 그래도 부상을 입어 제 상태가 아니었던 바란은 자신에게 덤벼드는 트롤 베이스의 상위급들에게 봉쇄되어 이곳저곳 베이기 시작하더니, 끝내 트롤·감마의 마력 두른 도끼에 머리가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쓰러졌다.
“대, 대사제님!”
“너무 많습니다!”
교단쪽도 마찬가지였다. 순조롭게 연합군의 기사나 마법사들을 상대하던 교단측 병력들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다수 괴물들과의 전투에 그대로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이런 괴물들이 수십 만, 그 이상이라고?”
그때 바람을 찢으며 날아간 화살 하나가 연합군 기사를 공격하던 오크·베타의 몸을 관통하며 그 충격파로 완전히 박살내었다.
“엘프 영웅 라온.”
끝까지 아일랜드·알파의 내부에 남아 기회를 노리던 루시는 마력을 가득 담은 화살을 쏴대는 라온을 보고 눈을 번쩍였다.
이미 전장의 주도권은 마왕군이 가져온 지 오래. 제대로 된 준비는커녕 정보조차 거의 없던 상대는 마왕군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 분명 이곳에 모인 전력은 상대를 철저히 부수기 위해 준비한, 마계 북부 영지를 상회하는 전력이지만 경험의 부재로 오히려 계속해서 마왕군과 싸워 온 그들보다도 못 싸웠다.
“너, 설마 이 괴물들의 우두머리, 아니 여왕인가.”
라온은 비명과 고함, 피와 폭력만이 가득한 야생 그 자체에 나타난 루시를 보고 이를 악물었다. 마력으로 강화한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그의 앞에 나타난 루시는 손에 든 거대한 쌍날검이자 마왕군의 전략병기, 롱기누스를 말없이 그에게 겨누었다.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당해주진 않을 것이다. 이래보여도 마왕군까지 이겨 본 몸이다.”
라온은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 남은 힘까지 모조리 끌어올렸다. 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 그런데다 성녀 이벨리아에게 받은 힘으로 대전쟁을 거치며 꾸준하게 레벨을 올려 온 라온의 힘은 분명 기존의 엘프라는 범주를 벗어난지 오래다.
[엘프종의 정령술...]
루시는 요동치는 땅을 보며 자신이 미리 습득했던 정보를 토대로 지금 라온이 발현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단순한 정령술도 아니었다. 레벨링을 통해 한계를 돌파한 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경지를 넘어선 힘이었다.
“모, 모두 조심해라! 땅이 흔들린다!”
라온 곁에 있던 러셀 백작이 기겁하며 타고 있던 말에 꼭 매달릴 정도. 곧 지면을 뚫고 나온 두께 십 수 미터의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일제히 루시를 향해 쇄도했다.
“대체 이걸 왜 미리 안 쓴 겁니까!?”
“티타니아는 자기한테 일 시키는 걸 제일 싫어하니까.”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러셀 백작은 왜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이 힘을 쓰지 않았느냐 투덜거렸다. 그리고 쓰게 웃은 라온의 말대로, 마구 요동치는 나무뿌리들은 그 움직임에서 분노와 짜증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롱기누스·출력전개]
루시는 그 분노와 짜증을 향해 쌍날검을 겨누어, 그대로 내장된 마력을 뿜어내었다.
‘이긴다.’
라온은 루시가 뿜어낸 마력포가 쇄도한 나무뿌리들과 충돌하는 순간, 자신이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너, 너무 강해! 순수한 마력을 뭉쳐서 쏘아내는 거...견디기 너무 힘들어!]
“뭐? 티타니아 네가 밀릴 정도라고?”
하지만 뇌리에 울리는 정령의 비명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붉은 광선이, 서서히 나무뿌리들을 가르고 태우며 뿌리들을 밀어내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조금 더 힘쓰자. 아무래도 반드시 잡아야 할 것 같아.”
라온은 전력을 끌어올린 화살을 루시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 마침내 루시가 자신을 휘감으려던 나무뿌리들을 전부 밀어낸 순간. 그가 쏜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루시에게 날아갔다.
‘잡았나?’
루시가 둘러친 붉은 마력 장막이 박살나며, 한줄기 섬광이 된 그의 화살에 상반신 일부를 관통당해 그대로 몸이 터져나갔다.
“큭...”
[징, 징그러워]
그러나 루시는 그 정도로 죽지 않았다.
상반신 절반이 날아가고, 체액을 흩뿌리며 살점을 떨어트려도 눈 하나 깜짝 않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의 모습에 정령인 티타니아도 라온도 당황하여 식은땀을 흘렸다.
“엘프 라온, 당신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만약 모른다면 당신의 동족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무, 뭐?”
“순순히 대답하지 않겠다면 힘을 쓰겠습니다.”
루시의 경고는 표정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라온은 순간 큰 부상을 입은 루시가 무슨 방법을 쓰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빠르게 어두워지는 하늘에 고개를 들고 경악했다.
“모두 도망쳐! 떨어진다!”
“으, 으아악!”
거대한 몸체를 가진 아일랜드·알파가 말 그대로 몸을 던져 지면을 짓누르기 위해 빠르게 하강했다. 바로 라온의 머리 바로 위로.
당연히 마왕군을 제외한 일대의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 힘이 부족해!]
급한 대로 뿜어진 나무뿌리들이 그것을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힘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덩치에 비해 가벼운 아일랜드·알파의 질량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라온은, 그 입을 쩍 벌린 초거대 비행종의 내부로 일대와 함께 통째로 삼켜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방법, 그걸 너 같은 괴물이 왜 찾는 거지?”
“당신에겐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걸 알기 위해 내 고향으로 가는 법을 알려 달라? 순순히 알려줄 것 같나?”
“상관없습니다.”
속이 텅 빈 공갈빵처럼 비어있는, 어둑한 아일랜드·알파의 내부. 하지만 공허한 어둠뿐인 이곳에서도 꿈틀거리는 육벽과 혈관등으로 이곳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내부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라온은 미리 준비한 유리아의 육체를 이용해 파츠를 교환하듯 신체 조각을 갈아 끼우며 순식간에 복구를 끝낸 루시를 노려보았다.
[아, 안 돼. 땅이랑 떨어져서...내 힘이..]
정령 티타니아는 땅의 정령. 계약자인 라온이 땅에 접하지 않으면 그 힘을 쓸 수 없다. 아직 정령술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던 루시가 노린 건 아니지만 덕분에 라온은 가장 큰 힘을 잃었다.
“2차전인가? 좋아. 널 죽이고 이곳을 탈출하겠다.”
“탈출?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고도 5600m 상공입니다.”
“...뭐?”
라온은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활을 들었지만, 루시는 그의 각오를 듣고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루시의 말을 들은 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아직 지상에 네 병사들이 남아있다.”
“양산기들은 굳이 회수하지 않아도 이득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상대하는 것 역시, 저 혼자가 아닙니다.”
라온의 모든 상식과 예측이 빗나갔다. 그는 슬금슬금 다가오는 상위급들을 흘끔거리며 침음했다. 루시가 회수한 것은 생산에 강심이 소모된 상위급이 전부.
다수를 차지하던 양산기들은 임무를 마친 그 즉시 자리에서 자폭했다. 마왕군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생체 독가스와 함께.
라온을 생포한다는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란 계산 덕분이었다.
“전체 공격.”
루시는 그 상태에서 총공세를 명령했다. 아차하는 순간 여기까지 와 버린 라온에게 선택지는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계속해서 싸우고 싸우다 끝내 꺾여버리는 것.
***
“꿈..인가?”
“갑자기 지원요청이 쇄도해서 급히 왔더니 이건 대체...”
하늘을 가로지른 거대 생물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보였다. 그러나 그 거대 생물의 모습이 목격된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도시에서 출발한 지원군은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장의 모습에 다들 굳어버렸다.
볼 것 다 보고 지낸 베테랑 기사마저 눈을 찡그리고 구역질을 참는 끔찍한 광경.
토막 난 시체, 짓이겨진 시체, 폭발한 시체, 녹아내린 시체 등은 종족과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이 너른 들판에서 살아남은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이제 어쩝니까 단장.”
기사 중 하나가 반쯤 타죽은 연합군 시체의 눈을 감겨주며 입을 열었다.
“주변을 수색해라. 생존자가 없을리 없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살려서 데려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 한다.”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기사단장은 일단 부하들에게 생존자를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곧 명령을 받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기 위해 애썼다.
“크리스, 우린 이쪽으로.”
그들 중에는 선임과 함께 움직이는 크리스도 있었다. 다만 크리스의 얼굴빛은 굉장히 어두웠다. 단순히 이 끔찍한 광경을 봐서 그런 것이기 보다는 형체도 없이 녹아 없어진 흔적들 중,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익숙한 검은 갑각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