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난입 (5) >
95화-난입 (5)
“시간이 좀 걸린다고?”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라온은 스스로를 봉인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간과 양분을 투자한다면 금방 뚫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긴, 비장의 한 수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
시간에 쫓겨 다소 촉박하게 실시한 작전이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성공이다. 상대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이점을 살린 루시의 기습적인 공격이 예상 이상의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원하는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사로잡는데 성공한 목표물, 라온은 패배 직전 자신의 몸을 스스로 봉인해 버렸다.
“봉인을 깨는 한편, 인간 세상을 주시하며 잠시 미뤄 두었던 중부 지역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나도 여기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거든.”
어쨌든 한 시름 덜었다는 것은 사실. 다소 급박하게 움직여서 그런가, 루시에게 아일랜드를 전해 주기 위해 꽤 큰일을 겪었는데도 나는 꽤 덤덤했다.
“협회장님은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화가 많이 나 보이십니다.”
“그럴 수밖에요. 데릭, 그 자식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요.”
협회장실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내게 다가온 이지연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당연히 성좌의 지시를 받은 데릭 크레이브의 살인 행각을 폭로하려 했지만, 협회장이자 사장인 백승철이 막아 버린 탓이다. 백승철은 그녀에게 폭로하는 게 더 위험하고 귀찮을 것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범죄 행각을 자백할 관련자들은 생포의 여력이 없던 그 날 상공에서의 추락으로 다 죽어 버렸습니다. 믿기 힘든 사실을 폭로한다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반발을 사게 되죠. 하물며 그런 증거도 없다면 저희는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서도 사람들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죠.”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화를 내고 있지만 그녀도 성격상 굳이 나서서 손해될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사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먼저 공격당하긴 했지만 공격자를 포함 싹 죽여 버리는 것으로 복수는 끝냈고, 애초에 내게는 그런 일보다는 화면 너머 루시의 일이 더 중요했으니까.
“성좌는 분명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죠? 같은 사람을 죽여 자신의 힘을 성장시키다니. 그런 끔찍한······.”
“······그 성좌는 그것이 진실된 도움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죠. 실제로 데릭과 그 패거리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알 것 같았다. 이지연은 물론 많은 이들이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착각하는 사실이지만, 사실 침략종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상태창의 목적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기존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상태창의 목적은 오직 각성자들을 단련시켜 괴물들과 싸우고 이기게 만드는 것. 그 과정에 우리네 사정과 질서, 법체계 따위를 고려할 리가 없다.
마치 루시가 자신의 몸을 성장시켜 나가는 것처럼. 상태창에게, 그리고 그 상태창에서 발현한 성좌에게 살인 따위는 결국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단 것이었다.
“그리고 저보다 진혁이가 더 걱정이거든요. 아직 어린 데다 데릭을 마음에 들어 하던 애였는데 그렇게 배신을 당해 버렸으니.”
“진혁이에게는 제가 가 보겠습니다.”
사실 이지연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함께 나보다도 단단한 마음을 가진 어른이었지만, 그날 함께 움직였던 오진혁은 아니었으니까. 괜히 미성년 각성자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는 게 아니다.
게다가 오진혁은 그날, 나노·오메가를 착용한 나를 보았다. 사정을 알고 있는 이지연과 달리 그는 내 정체를 모르고 있으니 그 혼란함은 더할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내 책임도 없지 않으니 챙겨 주는 게 당연했다.
“몸은 괜찮지?”
그래서 나는 그 길로 오진혁을 찾아갔다. 몸은 괜찮냐는 어색한 인사는 덤이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니 몸은 당연히 괜찮겠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괜찮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몸은 괜찮죠. 죽을 뻔하긴 했는데, 결과적으로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네 마음이 어떨지 짐작은 하겠어. 하지만 사람들이 널 걱정하는 건 당연해. 너는 아직 어리니까.”
당연히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배신당하고 목숨의 위기도 겪었는데 데릭 패거리의 몰살 사건에서 함께 작전을 뛰었다는 이유로 구설수까지 오르는 게 힘들만 하다. 다 큰 어른인 연예인들도 가끔가다 사람들 입방아를 못 견디는 걸 보면 화젯거리가 되어 버티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협회장님은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게 좋다고 하셨어.”
“어, 어째서요!? 저희는 그 쓰레기 자식한테 죽을 뻔했다고요!”
“그게 네가 덜 힘들 테니까. 결과적으로 데릭 패거리는 몰살당했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커지면 이지연 씨와 네가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도’ 제대로 공개해야 해.”
“그, 그걸 형이 알아요?”
그는 내가 그날 사건을 언급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은 나노·오메가를 착용한 나인 미지의 생물체에게 구해졌다는 사실, 덕분에 자신들은 추락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들을 베이스에서 대기하던 것으로 알려진 내가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지연 씨가 말해 줬어.”
“으음, 사실 형한테 말할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나는 태연하게 이지연을 팔았다. 그러자 오진혁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반응은 내 예상과는 살짝 달랐다.
“둘이 사귀는 거 맞죠?”
“아니야.”
“에이.”
그는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물론 이런 오해를 받은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그리고 예상은 하던 일이긴 하지만 나와 이지연은 매번 그 사실을 부인해 왔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형이 학교도 그만두고 이 일 하는 것도 그렇고, 둘 사이의 관계가······.”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네 마음이지. 네 의지가 가장 중요해. 이번 일을 겪고도, 계속 괴물들과 싸우고는 삶을 살고 싶은지.”
나는 억지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효과가 꽤 좋은지 실실 웃던 오진혁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 버렸다.
“저마다 싸우는 이유는 다양하겠지. 하지만 그 확고한 이유가 없다면 힘들 거야.”
“전 이유도 있고,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는 형은 그 이유가 지연 누나가 아니라면 뭐죠? 왜 좋은 대학도 그만두고 이 일에 뛰어들어서 우리를 따라 위험한 곳을 다니죠?”
나의 이유. 오진혁을 달래 주려던 내게 역으로 찾아온 그 한마디가 유독 크게 다가왔다.
“당연히 나도 이유가 있어. 그런데 말은 못 하지.”
“역시 사귀는 거 맞······.”
“마음대로 생각하렴.”
그럴 줄 알았다는 그에게 히죽 웃는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나와 루시의 관계는 분명 상호 보완적 관계다. 나도, 루시도 서로의 성장으로 서로를 돕는다.
루시를 성장시켜 그 힘을 빌려 오겠다는 것이 지금의 내 목표지만 과연 그것이 진심인가? 나를 만나겠다는 열망 하나로 백방으로 움직이고 있는 루시가 만약 이곳에 오지 못한다 하면, 나는 루시를 버릴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너무나 쉬운 답이었다. 지금의 나는 루시를 버릴 수 없다.
***
“······.”
“백날 노력해 봐라. 너 같은 괴물은 절대 풀지 못할 것이다.”
“복잡하게 꼬인 식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변수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결국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충분히 역산할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 주변 문제를 해결하고 다니는 사이, 루시 역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충격과 혼돈에 빠져 버린 사이 마계로 복귀한 루시는 당연히 라온이 만든 봉인식을 풀기 위해 자신의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마치 네가 태초부터 존재해 내려오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보다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 같구나.”
그런 루시를, 마치 얼음 같이 투명한 광물 안에 꼼짝 못 하게 봉인된 라온이 비웃었다. 패배한 건 자신이지만 결국 루시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으니,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대로 잠들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지.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너는 결국 패배하여 죽을 것이다.”
라온은 계속해서 루시를 도발했다. 루시의 입을 열게 만들어 어떻게든 정보를 더 드러내게 할 의도였다.
“대체 너 같은 괴물이 왜 다른 세상으로 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지?”
“당신은 알 것 없습니다.”
“꼭 찾아야 하는 것이라거나, 만나야만 하는 이라도 있나?”
본래라면 자신의 감정마저 이용하는 루시는 그 어떠한 도발에도 타격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내가 맞춘 건가?”
라온은 루시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감정이란 양날의 검, 성장을 반복하고 그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루시의 감정은 이따금 제멋대로 튀는 빈도가 늘어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라온에게 지적당한 순간 마왕군 그 자체인 루시는 굳이 육신을 계속 그 눈앞에 둘 필요가 없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이제 몸을 따로 가지고 활동하는 게 더 익숙해진 탓이었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런 식으로?”
“못할 것 없습니다.”
“아니, 넌 실패할 것이다.”
틈을 찾았다고 생각한 라온은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꿈틀거리는 루시의 감정이 결국 폭발한 것도 그때였다.
“허. 냉혹한 괴물인 줄 알았더니.”
라온은 자신의 팔이 부러질 정도로 주먹을 휘두른 루시의 모습에 침음했다. 흡사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루시는 그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이루어 왔어. 죽이고 먹어치워서. 부족하면 더 죽이고, 더 싸운다. 모든 생명체를 죽여 이 땅을 시체로 덮고 이 바다를 피로 채워서라도.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라온.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당신은 결국 제 뜻대로 움직일 테니까.”
“······미친년.”
한순간 본심을 내보인 루시는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더니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지금 당장은 라온의 봉인식을 풀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라온은 그런 루시의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까지는 루시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흘리는 웃음이었다.
“분명 검은 땅의 오크들이 독과 봉인에 능숙한 주술을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독과 해주 능력 역시. 그들이 가진 능력을 이용한다면 라온의 봉인식을 깰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자신의 데이터 베이스를 전부 뒤져 봉인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찾아낸 루시는, 마침 자신이 공격해야 하는 중부 지역의 마족들 중 하나가 해당 분야에 특출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희생을 내고, 피폐해지는 땅을 감수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야만 하는 것이 루시가 여기까지 온 근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