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난입 (6) >
96화-난입 (6)
“로스 평원 전투에서 의문의 패배? 여기 이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왕이시여. 평원 트롤들과 함께 전투를 수행하던 부대가 교단과의 전투에서 의문의 패배를 당했다고 합니다.”
“아니, 의문의 패배는 대체 무슨 패배란 말이냐?”
그는 보고를 받고 코웃음을 쳤다. 대륙 전체에 걸친 교단과 연합군의 전쟁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의문의 패배라는 단어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었다.
“진실로 보입니다. 적들이나 아군은 물론 전장 부변의 모든 생물이 죽어 버렸고, 생존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아직 정신을 차린 이가 없다고 합니다. 듣자니 그 원인을 아직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나마나 교단 놈들이 무슨 해괴한 수를 쓴 것 아니겠느냐. 그놈들이 벌인 짓거리들은 이미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꽤 충격적인 소식에 그는 혀를 차며 탄식했지만 그뿐이었다. 압도적으로 패배하여 전장의 판도가 바뀐 것도 아니고, 그 전투에서 몰살당한 병력이 자신의 병력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다른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전쟁을 계속하여, 이득이나 계속 취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보고 중 하늘에서 나타난 거대한 괴수라던지, 엘프 영웅 라온이 행방불명이 되었다든지 하는 소리는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는 이내 신경을 꺼 버렸다.
“쿠르스, 우리는 계속 얻을 것만 얻으면 된다. 전쟁의 승패에 목숨을 거는 건 다른 놈들이면 족해. 이렇게 한 발 걸치고 있으면서 인간 대륙에 있는 물자와 씨받이를 끌어모으면 된다.”
이를 드러낸 이 검은 피부의 오크는 손목에 걸친 금붙이를 짤랑이며 히죽였다. 그와 같이, 모든 마계 영주가 이 전쟁에 진심인 건 아니다.
대성녀 이벨리아가 갑자기 여신의 뜻이라며 자신에게 반하는 모든 세력에게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지만, 마계의 힘이 더해지며 연합군이 크게 유리한 것이 사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의 마계 영주들은 이번 전쟁으로 지지부진한 마계 내부 세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한몫 단단히 챙기려 할 뿐, 진심으로 전쟁의 승패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하오나 왕이시여, 흐르는 소문 중에는 전장에 난입한 괴물의 정체가 흑철충의 일부 아니냐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북부에서 난동을 부리며 덩치를 불려, 끝내 영주들까지 살해한 그 괴물들이? 그럴 리가. 그놈들이 장벽을 넘었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그의 신하 쿠르스는 최근 마계 북부에서 흑철충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냈지만,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애초에 그는, 거대한 생물체의 몸속 가득히 병력을 실어 장벽을 넘어 공격을 간다는 것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크,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저 후방에서 야금야금 이득이나 볼 생각이었던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자, 저게 대체······. 설마 저 괴물이!”
다급히 궁전 밖으로 뛰어나온 검은 오크 왕 카임은 저 멀리 탁한 하늘에 점만 하게 보이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하늘을 나는 초거대 비행종, 방금 전 전장에 나타났다는 소문으로나 들었던 그 괴물이 지금 정확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직행하고 있었다.
***
“중요 인물을 납치, 혹은 적의 주요 거점을 타격하는 데 이 강습 작전이 꽤 쏠쏠한 것 같습니다.”
카임이 이곳을 보듯, 루시 역시 수많은 시야를 통해 자신이 공격할 대상들을 보고 있었다. 마계 중부, 검은 토지 지역을 영역으로 삼고 있는 오크종의 하나인 검은 오크들.
루시는 모든 준비를 마친 본대에 명령을 내려 중부 지역의 영주들을 대규모로 공격하는 한편 초거대 비행종인 아일랜드·알파에 일부 병력을 태워 곧바로 목적지로 직행하는 중이었다.
“검은 오크 왕 카임, 정말 그가 엘프 라온의 봉인식을 풀 방법을 알고 있을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혹시 모르니 나도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야.”
그런 루시를 화면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는 그 역시 지금은 이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루시가 실패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채워 줘야 하니까.
‘봉인과 관련된 능력자,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인터넷을 사용해 봉인과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각성자 몇을 찾아내었다. 사실 그가 루시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지금처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넣어 주는 것.
다만 만약 이 방법을 사용할 경우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고 그 신변에 위해를 가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되도록 루시가 검은 오크들을 공격하는 이번 기회로 원하는 것을 얻기를 원했다.
“아닙니다. 비효율로 인한 부담을 가지실 일 없게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 온 데이터가 있던 루시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리고 먼저 말을 꺼냈다. 동시에 루시의 영향을 받는 모든 마왕군의 감정이 순간 꿈틀거렸다.
“반드시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더라도.”
곧 아일랜드·알파가 혼비백산하는 검은 오크들을 향해 감속 없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내부에 탑승한 루시는 물론 다른 마왕군 역시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지면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흐, 흐아악!”
“전부 자리를 지켜, 아니 피해라!”
하지만 생전 처음 이런 공격을 당해 보는 오크들은 달랐다. 허겁지겁 모여든 왕궁 수비대는 그 거대한 몸체를 완전히 드러내며 다가오는 초거대 생물의 모습에 당황하여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쏴, 쏴라! 오기 전에 떨어트려라!”
오크들은 급한 대로 주술과 마법을 난사했다. 저 거대한 것이 완전히 근접하게 두어선 안 되며 그 전에 막아 내야 한다는 본능적인 직감, 그러나 쇄도하는 그들의 공격을 보고 있던 루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마력을 움직였다.
애초에 적의 대공 사격을 배제할 리 없었으니까.
[집단식·중첩 방어막]
루시는 아일랜드·알파의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 강심에서 마력을 뽑아 그것을 마법으로 변환시켰다. 중첩된 수십 겹의 방어막으로 아일랜드·알파의 몸을 완전히 뒤덮으며 조금의 틈새 없이 채워졌다.
너무 급하게 쏜 탓에 한 점에 집중되지 못한 오크들의 원거리 공격은 대다수가 이 불그스름한 방어막에 막혀 상쇄되었다.
“으, 으아······.”
“전군 강습 실행, 검은 오크 왕 카임의 존재 확인, 작전 시작.”
결국 아일랜드·알파는 그 무식한 몸통 박치기 공격을 성공시켰다. 일대의 지배자가 된 카임이 가장 먼저 짓도록 명령한 위풍당당한 왕궁은 그대로 박살 나고 무너지며, 수많은 오크들은 그대로 잔해에 깔려 뭉개졌다.
“어, 저놈 도주한다.”
“잡을 수 있습니다.”
너무 크게 당황한 카임은 8갈래로 쩍 갈라진 아일랜드·알파의 입속에서 수많은 마왕군이 쏟아져 나오자 몸을 돌려 냅다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시는 당황하지 않고, 마치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날아올라 곧장 카임을 쫓아 하늘을 가로질렀다.
[롱기누스·출력 전개]
애초에 루시는 모든 상황에 대한 가정을 이미 세워두었다. 망설임 없이 손에 든 쌍날 검을 겨눈 루시는 집속한 마력을 폭사하여 도망치던 카임과 그 주변을 그대로 쓸어버렸다.
차라리 가만히 서서 반격했다면 모를까 무방비하게 당해 버린 그들은 일제히 넘어지고 쓰러져 바닥을 굴렀다.
“커, 커헉······.”
“검은 오크 왕 카임, 엘프의 봉인식을 풀 지식을 원합니다. 내놓으십시오.”
처참한 시체들과, 그슬리고 부서져 난장판이 된 지면에 착지한 루시는 바닥에서 콜록거리는 카임에게 다가갔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전방 지역에만 병사들을 배치했을 뿐, 정작 하늘과 중요 거점들은 텅텅 비어 있으니 대응하지 못한 겁니다. 거기에 대공 공격 능력도 형편없었습니다. 방어막은 그 규모가 커질수록 더 균형 잡히고 단단해지니 돌파를 위해 한 점에 힘을 모아야 하는데도.”
덜덜 떨며 현실을 부정하는 카임에게 루시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말했다.
“이딴 공격을 대체 어떻게 예상한단 말이냐!”
당연히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한 카임은 버럭 화를 내었으나, 루시를 올려다본 그는 당황하여 침음했다.
‘설마 진심으로?’
루시의 눈에서 조금의 거짓도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발하는 광기와 대비되는 또 다른 광기에, 그는 주춤거리며 뒤로 기었다.
“이 끔찍한 괴물 년,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엘프가 스스로에게 시전한 봉인식을 깰 방법이 필요합니다.”
“에, 엘프를 어떻게······ 설마, 라온!”
눈치를 보던 그는 루시의 대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결국 방금 전 보고 받았던 ‘의문의 패배’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된 탓이다.
“고작 그것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봉인식을 풀 지식을 구하기 위해?!”
“고작 이런 짓?”
그러나 루시는 경악하는 그를 오히려 비웃었다. 천천히 다가와, 비틀거리는 그를 걷어차고 발로 짓밟았다.
“크윽······.”
“더한 짓도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당신들은 반드시 처리해야 할 배신자에 불과하니까.”
“아주 기세가 등등하군. 언제까지 그렇게 승승장구 할 것 같으냐.”
“물론 계속 이렇게 쉽게 이기진 못하겠지요. 당신의 동류들은 당신의 패배를 타산지석삼아 대응 전술을 발달시키고 우리에 대해 분석해 방어 준비를 갖출 테니까.”
카임은 말로도 루시를 이기지 못했다. 다른 마계 영주들이 오늘 벌어진 자신의 패배를 거름으로 삼을 것이라는 루시의 말에 그는 표정 관리를 실패하고 얼굴을 구겼다.
“혀, 협조하면 살려 주는 거냐.”
하지만 마음 속 분노와 달리 머리는 차갑다. 결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던 그는 목숨을 구걸할 의지가 충만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린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답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카임이 그걸 알 턱은 없다.
***
“그렇게 하겠다고 답해, 루시. 거짓말을.”
루시가 검고 탁한 피부의 오크를 짓밟고 협박할 때. 나는 루시의 시점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오크를 보며 루시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명령했다.
사실 루시가 저자를 살려 둘 리가 없다. 모든 정보를 뽑아먹고, 그대로 양분으로 써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걸 솔직히 말해서 굳이 상대가 저항하게 만들 이유는 없으니까.
거짓말을 잘 못 하는 루시도 내 명령대로 말하는 건 할 수 있다. 곧 루시는 전리품과 함께 당당히 병력을 회수한 이후 아일랜드·알파에 탑승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곧바로 복귀하여, 레온의 봉인을 깨고 일을 진행시키겠습니다.]
“과격한 움직임 덕에 쉽게 성과를 봤어. 하지만 상대가 바보일 리는 없으니 네 말대로 이런 기습적인 강습이 계속 통하지 않을 게 뻔해. 자신 있는 거 맞지?”
[그렇습니다. 전쟁과 경쟁을 반복하며 강해지는 것은 모든 생물들의 능력. 하지만 저는 그보다 더 빠르게, 더 다양하게 진화할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거침없고 망설임 없던 루시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 자신감이 남들이 대응하기 어려운 이런 과격한 작전의 원천이고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