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난입 (7) >
97화-난입 (7)
“현재 생포한 포로, 카임을 통해 봉인식 해제법을 알아내는 중입니다.”
“그래. 굳이 보여 주지는 말고.”
성과를 얻은 루시는 늘 그렇듯 조금의 휴식도 없이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 과정이야 전과 다를 바 없을 테니 나는 굳이 그것까지 보지는 않고 루시에게 위임했다.
애초에 계속 휴대폰만 붙들고 있을 순 없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신경을 끌 수는 없었다. 만약 루시가 검은 오크 왕 카임에게 정보를 알아내는 데 실패한다면 그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니까.
“뭐야, 오늘 이지연 씨 안 나갔어?”
“예. 계획이 갑자기 취소되어서요.”
내가 서 있던 자판기 옆으로 누군가 다가온 게 그때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퉁퉁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중년의 아저씨인 그의 이름은 고준혁.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각성자 담당 매니저이자 입사 동기기도 하다.
“1인 전담은 다들 편할 거라 생각하는데, 오히려 이지연 씨 따라 위험한 곳 쏘다니 는거 생각하면 난 못할 것 같아. 홀몸도 아니고.”
그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으며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장단점이 명확하다. 강한 각성자의 전담으로 붙으면 일은 좀 편해질지언정 위험해질 확률은 올라가니까.
반면 케어 정도가 낮은, 다소 약한 이들 다수를 맡으면 위험도는 내려가도 그만큼 일은 많아서 바빠진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최근 나를 찔러 죽이려던 놈을 처치한 게 생각나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좀 위험한 거 같기도 하다. 사람을 죽이라고 부추기는 성좌란 놈도 있으니 앞으로도 무슨 미친놈을 만날지 모르니까.
“정말이야. 어린 자식들 생각하면, 도저히 위험한 일은 못하겠어. 하긴 애초에 이 일이 다른 일에 비하면 위험한 게 맞지만. 그러니 돈을 더 주는 거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충분한 열정이 있다면 할 수 있겠지. 젊은 혈기라던가, 아니면······ 크흠. 확실히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일하면 버틸 만할지도.”
대충 맞장구 쳐 주는데 그가 나를 보며 히죽 웃더니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문득 오진혁이 언급했던 소문이 내 머리를 스쳤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오해하고 있다던가? 고준혁 역시 나와 이지연 사이를 오해하는 것 같지만 과연 이걸 해명한다고 해도 믿어줄지 의문이었다.
“그나저나 팀에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나는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사실 억지는 아닌 것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원래 이 말을 하려고 했었다. 단지 그가 먼저 입을 열어 타이밍을 놓친 것뿐이다.
“새로운 멤버, 분명 들어왔지. 어떻게 알았어?”
“내부 정보를 좀 뒤져 보다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나는 일단 적당히 둘러대었다.
내부 정보로 확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처음은 인터넷이었다. 봉인과 관련된 능력자들을 찾다가 발견한 한 사람이, 최근 우리 회사에 들어왔다는 정보였다. 그 이후 회사 내부 정보를 이용해 그 사람이 고준혁의 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김서윤 씨라고, 아마 기사까지 났을걸. 게이트 발생 현장에서 각성해서 자기 목숨은 물론 위기였던 각성자 팀까지 구해 냈거든.”
“저도 그 기사보고 찾아보다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고. 그런 능력들 보면 참 신기해, 무슨 게임 같아서.”
고준혁은 의외로 쉽게 정보를 술술 불어 주었다. 그녀가 왜 괴물들과 싸우는 길을 택하고, 왜 우리 회사로 왔는지 등등.
“지금 가십니까?”
“오후에도 일이 있어서. 방금 이야기 한 김서윤 씨, 오늘이 첫 활동이야.”
그 이후 고준혁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음료수 캔을 모두 비우고 자리를 떠났다. 이야기의 주제였던 김서윤이 오늘 처음 공식적인 실전에 나선다는 말과 함께.
일단 지금까지는 여기까지만 알면 족하다. 루시가 정말로 실패할 경우에만 찾게 될 테니까.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그것이, 원하던 지식을 완전히 습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변형시키고 하나하나 적용해 보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다만 루시에게서 좀 늦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 그날 저녁이었다.
***
“어디서 뭔가 배워온 것 같기는 한데 백날 시도해 보아라. 되겠느냐?”
“아직 조합 가능한 가능성은 3148가지나 남아있습니다.”
루시가 파훼법을 만들어 와서 라온의 봉인식에 적용하면, 라온은 그것을 보고 비웃었다. 시간이 걸린다는 게 이것 때문이었다.
루시는 자신의 연산력으로 단숨에 수많은 조합식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막상 그것을 하나하나 적용하는 데는 시간이 소요되는 게 필수적이었다.
“시도해 볼 방법이 삼천 가지가 넘는다니 많기도 하군. 확실히 그중 하나 정도는 얻어걸릴만 해. 그러나 그걸 다 시험해 보려면 대체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걸 아는 라온의 입은 쉬지를 않았다. 본인도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저런 도발이 상대를 흔들고 타격을 입힐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써먹는 것이다.
본래라면 루시에게 저런 도발 따위 먹히지 않겠지만, 루시는 본능적으로 비효율을 세상 그 무엇보다 싫어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화면은 루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 그 직후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고 뜬금없이 큼직한 양분과 자원을 물고 열심히 꼬물거리는 노동병들의 모습이 한 차례 화면에 비춰졌다. 적당한 배경음만 깔리면 영락없이 예능 프로에서 쓰이는 화면 전환용 영상이다.
“괜찮은 거지?”
[······.]
그 뒤 다시 돌아온 화면 속에서는 여전히 비웃음을 머금은 라온의 모습과, 누가 봐도 화나서 내리치다 부러진 팔을 재생하는 루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괜찮냐는 내 물음에 루시는 답하지 않았다. 거짓을 말하느니 입을 다물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화산지의 끓는 용암에 던져 버리거나, 지하 수백 미터에 파묻어 영원히 봉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결국 육신의 입을 꾹 다문 루시는 라온이 듣지 못하도록 내게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말해 주었다. 욕설만 안 하지 화가 단단히 난 게 확실했다.
[죄송합니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좋지 않은 일인데도.]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우리는 계속 끝에서 달리고 있으니, 벽을 만나면 잠시 멈추는 게 당연해.”
나는 루시의 그런 모습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
시간을 가지고 기다릴 수는 있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데 시도조차 해 보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네게 사람 하나를 보낼 거야. 하지만 그 사람에게서 뭔가를 배울 순 없어. 각성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배워서 쓰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그 사람이 직접, 라온에게 자신의 능력을 쓰게 만들어.”
[그렇다면 그 이후 그자를 양분으로 처리해서······.]
“아, 안 돼. 죽여선 안 돼. 그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이야.”
당황한 나는 계획을 정정해 주었다. 무고한 사람을 강제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하물며 위해까지 가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희의 정보가 외부인에게 새어 나가게 됩니다.]
“그게 걱정이야. 뭔가 방법이 없나?”
가장 큰 걸림돌은 이 계획대로 김서윤을 루시에게 보내는 순간, 우리의 정체가 김서윤에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미 저쪽 세상과 연결된 세력이 지구상에도 존재하는 이상 정말 단 하나의 가능성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뭐, 기억 소거 마법이나 그런 건 없어? 마법사 다수를 먹어치웠잖아.”
[그런 마법은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편안한 방법은 루시가 그녀의 기억을 지워서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는 방법인데 그런 속편한 마법은 저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기생충인 뇌아귀·알파를 뇌에 집어넣고 협박하자고? 그게 위해를 가하는 거잖아. 안 돼. 그건 최후의 방법으로 두고 다른 방법 먼저. 언제든 터트릴 수 있는 마법진을 몸에 새기는 것도 마찬가지······. 정말 답이 없는 건가.”
하지만 루시가 제안하는 몇 가지 방법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다 보니 정말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그렇다면 내 목적을 위해서, 일면식도 없는 김서윤이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맞는 것인가?
“······몸에 새기는 마법진. 그걸로 협박을 해 보는 수밖에.”
밤을 새우는 고뇌였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결과에서, 나는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진 선택을 내리고 말았다. 그동안 루시의 행적을 지켜봐 오며 숭고한 희생이니 정당한 착취니 하는 것들 따위는 없다는 걸 마음에 새긴 나는 내 선택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변명의 여지 없는 내 선택이지만 동시에 널 믿고, 널 위해서 내린 결정이야. 네가 언젠가 이 모든 희생을 감출 수 있을 만큼 성장해서, 그 결과를 보여 줄 거라고 믿으니까.”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넌 나와 하나야. 루시.”
점차 밝아 오는 여명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사고방식, 생각하는 패턴, 감정 등등 내게서 많은 것을 배워 가는 루시는 점점 나를 닮아 간다. 반대로 루시에게 많은 것을 위임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점점 루시를 닮아 간다.
처음과 비교하면, 둘 다 많이 변했다.
***
“고준혁 실장님 팀이요? 지금 출동했을걸요? 게이트 발생지역에 긴급 지원 요청이 와서.”
“그래서 전화를······ 아무튼 알겠습니다.”
이른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고준혁을 찾았다. 고준혁의 팀에 속한 김서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른 직원에게 들으니 그들은 이미 출동한 상태. 아무래도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어제 잠시 이야기 나눈 것 때문에.”
이지연이 그런 모습을 보고 의문을 가졌지만, 나는 이번엔 그녀에게도 사실을 숨겼다. 그녀와 굳이 관련 없는 일이다. 좋은 일도 아니었으니 그녀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긴급 지원 경보.”
삑삑거리는 알람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한 게 그때였다. 직원들의 휴대폰에 깔린 어플을 통해 비상시 다이렉트로 회사에 알림이 오는 시스템.
“지연 씨, 저희는 지금 일이 없지만 매뉴얼대로 일단 여기서 대기······.”
“어서 가요!”
뭐라 말릴 틈도 없었다. 이지연은 평소처럼 겉옷도 챙기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을 박차고 뛰어나갔고, 나는 혀를 차며 일단 그 뒤를 따라 뛰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게이트 발생 지역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 비상 알림이 도착한 지역, 저희 목표인 김서윤이 출동한 바로 그곳 같습니다.]
루시가 알아서 휴대폰을 확인하고 무슨 알림이 도착했는지 말해 주었다. 일이 터진 곳이 하필이면 고준혁의 팀이 파견 나간 바로 그곳.
괜히 들끓는 불안함을 억누른 나는 이지연과 함께 차량에 탑승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