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난입 (9) >
99화-난입 (9)
“······심박도, 호흡도, 말 그대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육신으로는 더 이상 당신을 살릴 수 없습니다.”
허공에서 나타난, 붕대에 휘감긴 작은 여체. 그것을 받아든 루시는 의식 잃은 김서윤을 내려다보며 동시에 근처에 있던 둥지로 걸어갔다.
그곳에 하나의 몸이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몸이. 그 체격과 골격 등이 눈대중을 보고 맞춘 듯 김서윤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다.
“되살아나십시오. 그리고 봉사하십시오. 당신에게 투자된 자원이 효율적으로 바뀔 만큼.”
루시는 그 몸뚱이와 김서윤을 동시에 끈적이는 점액 웅덩이 속에 던져 넣었다. 수많은 나노들이 모여 만든 그 점액은 루시의 명령대로, 김서윤의 몸을 서서히 분해하며 동시에 복제해 새로운 육신에 새롭게 결합시켰다.
모든 세포를 나노로 대체한, 이런 식으로 탄생한 존재가 김서윤이 맞는지 아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영혼을 소재로 한 주술과 마법도 실존하는 세상이지만, 루시는 데이터 부족을 근거로 영혼을 믿지 않았으니까. 영혼이란 것을 믿으면, 그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은 설명할 수 없으니까.
“모든 신체 활동 정상. 이제 정신이 듭니까, 김서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촉수를 사용해 점액 웅덩이에서 건져 낸 김서윤은 불구가 되었던 몸에서,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서히 눈을 뜨는 김서윤의 눈이 루시의 무심한 눈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내가······ 살았어······?’
루시가 김서윤의 육체를 재구성하는 순간, 김서윤은 이미 그 순간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비록 몸의 통제권은 되찾지 못했지만 어쨌든 기억은 전부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일 놀라웠다.
마지막 기억은 끔찍한 괴물이 동료들을 난도질하고, 자신마저 덮쳐들던 기억.
두 번의 일격에 도망치던 한쪽 다리가 베여 나가고 얼굴을 가렸던 두 팔이 잘려 나갔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움직여.’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조금씩 몸의 감각이 돌아옴을 느낀 그녀는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이고 경악했다.
분명 다쳤을 팔다리에 멀쩡히 감각이 느껴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지금 자신이 병원에 있는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듭니까, 김서윤.”
그리고 앞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녀는, 자신을 응시하는 루시를 포함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 후세계?”
그리고 속으로 생각해야 할 멍청한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 버렸고, 루시는 예상 밖의 대답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당신의 의식이 전신을 장악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립니다. 아직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하니 걱정 마시길. 그리고 이곳은 사후 세계 같은 근거 없는 곳이 아닙니다.”
“그, 그럼 제가 정말로 죽지 않았다고요? 대체 여긴 어디죠? 그리고 내 몸에 무슨 짓을······. 당신은 누구고요?!”
“설명할 수 있지만 과연 당신이 온전히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에게 투자할 시간은 많지 않으니까.”
루시는 그녀에게 기본적인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디이고 자신은 누구이며 왜 그녀가 이곳에 왔는지.
어차피 이제 김서윤은 세포 하나하나 루시의 손안에 있는 셈이다. 배신의 가능성은 0에 수렴하니 거칠 것도 없다.
“그, 그럴 리가······.”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녀에게 달렸다. 모든 일의 전말을 알게 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얼굴로 몸을 축 늘어뜨렸다.
멀쩡한 몸과 함께 목숨을 건진 것은 분명히 기적. 이렇게 되살아나고 멀쩡해진 자신의 몸이 증거 그 자체이니 그 기적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기적은 공짜가 아니니, 그만한 대가를 바쳐야 했다.
“이미 말했듯 시간이 없습니다. 상태창을 체크해 새로운 육신으로 태어난 지금의 당신이 여전히 각성자로서의 힘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김서윤은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루시는 그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녀를 들고 있던 촉수를 움직여 바닥에 툭 던지듯 내려놓은 루시는, 아직 가시지 않은 극심한 이질감에 덕에 다리를 후들거리는 그녀에게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사, 상태창은 다를 것 없이 그대로예요.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한 번 써 보십시오.”
“제 능력을 쓰려면 대상이 필요한데······.”
“제게 쓰십시오.”
루시는 자신에게 능력을 쓸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흠칫했지만, 아직 공포에 질려 있던 상태로는 차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봉인·행동]
곧 입술을 깨문 김서윤이 루시를 향해 자신의 힘을 발현했다. 상대방의 행동을 봉인하는 힘. 루시는 자신의 몸을 덮쳐드는 마력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이것을 푸는 것도 가능합니까.”
“네.”
“그렇다면 풀어 보십시오.”
전신의 마력이 고정된 것을 느낀 루시가 이번에는 이 봉인을 풀어 보라 말했다. 김서윤은 곧장 자신의 힘을 풀었고, 루시는 고정된 마력이 다시 흐르는 것을 느끼며 몸을 움직였다.
“마력을 강제로 조작하고 강제로 풀어내는 힘. 이걸 강화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복잡한 식을 풀어낼 필요 없이, 강제로 판을 엎을 수 있겠습니다.”
루시는 이것을 통해 가능성을 느꼈다. 라온의 봉인식을 뚫고, 그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따라오십시오.”
“저기! 혹시 옷은 없나요!?”
가능성이 확인되었으니 일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김서윤을 데리고 곧장 라온에게 향하려던 루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을 부르는 김서윤을 돌아보았다.
“당신도 유리아와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하긴, 인간에게 옷이란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단이니 곧 생존본능과 직결된 물건. 옷이라 할 수 있는 걸 드리겠습니다.”
루시는 그녀에게 옷을 주었다. 물론 그것을 본 김서윤은 숨을 들이켜며 주춤거렸지만.
“이, 이게 옷이라고요?”
“나노·오메가를 응용한 일종의 전투복. 계속 뇌를 갈아 끼우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입니다.”
바닥을 스물스물 기어 온 검은 덩어리. 마치 젤리 같은 그것은 마물 중 하나인 슬라임을 응용한 루시의 새로운 병사로, 전신에 비활성 나노들을 듬뿍 함유하고 있다.
“으으읏.”
그 슬라임이 당황한 김서윤의 다리를 타고 올라 전신을 덮기 시작했다. 동시에 몸서리치는 그녀의 피부 및 신경 등과 일체화하며 하나의 형태를 잡아 가기 시작하니, 곧 김서윤은 지금의 루시처럼 거칠고 단단한 갑각을 두른 마왕군의 병사가 되었다.
“내, 내 몸이 괴물의 몸으로······.”
“이제 충분할 테니 따라오십시오.”
김서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지만, 루시는 다시 몸을 돌렸다. 새로운 몸에 어색해하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열심히 그 뒤를 따를 뿐이다.
“분명 제게 봉인을 풀라고 하셨죠. 하지만 제 능력은 제가 건 것만 풀 수 있어요.”
“그렇겠지만 방금 직접 분석해 본 당신의 힘은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닙니다. 의심하지 말고 그냥 하십시오.”
루시가 손댈 수 없는 라온을 가둬 둔 곳은 버려진 미궁의 최하층. 불안한 얼굴로 뒤따라간 김서윤은 저 멀리 보이는 빛나는 크리스탈 기둥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기둥 안에 누군가가 들어 있었던 탓이다.
“바로 저자가 엘프 영웅 라온, 감히 스스로를 봉인하여 도망친 겁쟁이에 패배자. 저것을 풀기 위해 당신에게 그 몸과 생명을 준 것이니 의무를 다하십시오.”
루시는 손으로 기둥을, 라온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직 김서윤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으니 그녀는 제대로 된 행동을 머뭇거렸다.
“가족을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까?”
루시는 그것을 보고 그동안 학습한 인간에 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그녀에게 있어 가장 약점일 것 같은 곳을 건드렸다. 지구에 남겨두고 온 가족, 확실히 그 말은 효과가 있어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루시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이군. 오늘도 헛수고를 하러 오셨나.”
“바로 실행하십시오. 이자의 말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루시는 어김없이 자신을 도발하는 라온을 보자마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유독 라온만 만나면 감정이 격해지는 루시는 이제 진심으로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
“귀, 귀가 갑자기 안 들려요!”
[당신을 현혹하려는 말을 차단하기 위해 당신의 청각 신경을 일시적으로 닫은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할 일을 하십시오.]
김서윤의 몸을 마음대로 조작해서 라온의 말을 듣지 못하게 청각을 차단할 정도였다. 그녀는 루시의 의도대로 자신의 몸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기겁하고 공포에 질렸지만, 말 그대로 세포 하나하나 루시의 것이 된 그녀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하, 하겠습니다. 그러니 더 하진 말아주세요.”
결국 김서윤은 당황스러움을 딛고 억지로 다시 한 번 자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사악한 벌레 년. 고작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네 부하의 귀를 망가뜨리다니.”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습니다. 당신 같은 열등 생물체와 다르게.”
“열등? 적어도 근본조차 없는 네년보다는······.”
[봉인·해제]
“!!!”
평소처럼 루시와 신경전을 벌이던 라온의 입이 순간 다물어졌다.
‘내, 내 힘이······!’
“이게 대체 무슨!”
라온은 물론 직접 힘을 사용한 김서윤도 이 순간 크게 당황했다. 몸에 장착된 강심의 출력이 더해진 그녀의 힘은 기존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 상태로 전방을 향해 폭사.
라온이 몸에 두르고 있던 봉인의 수정이 그 강제력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풀리며 점차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사태를 파악하고 경악한 라온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상식을 부수는 일이었으니까.
고대부터 이어져 온 엘프족의 정수가 모여 만들어진 술법이 사용자 스스로도 원리를 모르는 힘에 의해 파훼된 것이다.
“근본이 없다? 진정한 근본은 오직 살아남은 자들만이 논할 수 있는 법. 엘프족은 이제 멸망하게 될 것이니, 감히 근본 따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당황한 사이 오직 루시만이 히죽 웃었다. 짜증나던 상대를 당황시키고 짓밟는다는 것이, 이다지도 즐겁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커헉!”
“기대하십시오. 당신이 순순히 입을 열 리가 없으니 앞으로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당신과 비슷한 마계 영주를 포함, 지금까지 저와 함께하며 끝까지 버틴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루시는 라온의 봉인이 전부 풀리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짓밟은 루시의 눈에 광기가 번득였다. 그동안 약 올렸던 것, 모조리 돌려주겠다는 의지가 매우 확고하게 드러난 것이다.
“대체······ 정체가 뭐냐. 그 집착과 광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이쯤 되니 진심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루시는, 입꼬리를 비틀며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날카로운 손톱을 이용해 그의 배를 꿰뚫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