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난입 (10) >
100화-난입 (10)
“큭······. 이건······.”
“특별히 당신은 정보를 얻은 이후에도 양분으로 삼지 않겠습니다. 살려 두는 데 들어가는 자원이 아깝기는 하지만, 분명 어딘가 써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봉인이 풀리자마자 루시에게 살해당한 라온은 사실 죽지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를 악물었다.
“이런 짓으로 나를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흔든다? 아니, 나는 당신을 꺾어 버릴 겁니다.”
루시는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현재 라온은 머리와 상반신 일부만이 남아 둥둥 떠 있는 상태. 목에 연결된 촉수들만이 마치 거미줄처럼 퍼져서 조각난 그의 몸에 양분을 공급해 주는 중이었다.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동료들과 동족을 배신하지 않아.”
“그건 이제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모든 권리를 전부 빼앗을 것이니 이제 당신은 숨 쉬는 것도, 혈액을 순환시키는 것도, 감정을 조절하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것도 모두······ 당신의 세포들을 장악한 내 손에 의해 결정될 겁니다. 당신이 당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루시는 이를 악문 라온을 향해 조금 더 다가왔다.
“모든 세포를 하나하나 내 것으로 대체하고 당신의 존재를 지워 나갈 거야. 내가 손대지 못하고, 덕분에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건 그 알량한 영혼 따위가 전부지. 어디 한 번 버텨 봐. 버텨서 증명해.”
“이게 근본도 정체도 모를 네 본성이구나.”
얼굴을 들이민 루시가 조용히 속삭이니 라온은 그 눈을 통해, 루시의 본심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평소 아무런 감정도 본심도 드러내지 않고 감춰 두던 눈에서 드러난 광기와 집착을.
“본래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이 부러워하며 갖지 못하는 것을 더욱더 깔보고 무시한다. 사람이 되다만 괴물, 결국 넌 그렇게 깔보면서도 혼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냐.”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지금까지 뇌세포까지 조작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실험해 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생각하는 것도 자신의 뜻대로 쉽게 할 수 없을 테니까.”
그의 말에 코웃음을 친 루시는 몸을 돌렸다. 고문하고 괴롭히는 데 굳이 옆에 육신을 붙여 둘 필요는 없으니까.
그동안 자신이 학습한 결과를 토대로 결과를 도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설계한, 자신이 준비한 이 특별한 고문에 라온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
“라온의 심문은 잘 풀리고 있습니다. 예상 시간 3일하고도 12시간. 그 안에 대답을 들어 내겠습니다.”
“결국 우리의 결단이 잘 들어맞은 건가.”
불과 하루 전 있었던 사고에 침울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슬쩍 빠져나온 나는 루시와 통화할 수 있게 옥상으로 나왔다. 미세먼지가 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답답하지는 않다.
“김서윤 씨를 보여 줘.”
루시는 라온을 심문하고 있다고 했지만 보나 마나 효율적 타령을 하면서 고문하고 있을 게 뻔하니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대신 임무를 마치고 멍하니 앉아있는 김서윤을 살폈다.
마왕군의 일부가 되어 목숨을 건지고 새로운 몸을 얻게 되었지만 역시 현대 지구에서 살던 그녀는 유리아와는 달리 적응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네 생각은 어때. 김서윤 씨를 어떻게 써먹을 생각이지? 일단 원래 목적은 달성했는데.”
“본래의 능력은 딱히 유의미할 것 같지 않았지만, 강심을 달아 출력을 보충하니 고대부터 내려오던 엘프족의 비기를 단번에 녹여 버릴 만큼 상당히 강력한 권능이 되었습니다. 각성자에게 강심을 부착한 것은 처음, 훌륭한 소체이기에 더 많은 실험으로 데이터를 얻고 싶습니다.”
“······김서윤 씨에게는 하지마.”
루시는 지금까지 활용하지 못했던 각성자라는 소체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라, 순간 이지연같이 강한 사람에게 강심과 마왕군식 육체를 이식하면 어떻게 될까 싶은 생각을 해 버릴 정도.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으며 루시를 말렸다.
이건 내 마지막 양심이고 도리였다. 다른 건 몰라도, 김서윤에게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었다. 데릭 크레이브처럼 차라리 우릴 공격한 적이라면 모를까.
“그 문제는 잠시 접어 두고, 이쪽 상황 이야기부터 해 줄까 하는데.”
“지난번에 언급하셨던 신종 침략종에 대한 것입니까?”
“그래, 그놈과 비슷한 놈들이 다른 나라에도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야.”
화제를 돌렸다. 내용은 김서윤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원흉인 신종 침략종. 지금까지 신종 괴물들이 나타난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렇게 이슈가 된 건 이유가 있다.
놈들의 강함과 습성이 지금까지 나타난 괴물들과 비교를 불허하기 때문이다.
“그놈들에 대한 자료를 안 쓰는 휴대폰에 넣어서 보내 줄 테니 네가 확인해 봐. 그리고 그 휴대폰에, 김서윤 씨에게 영상 하나 찍으라고 시킨 후 다시 보내.”
루시에게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내 휴대폰 문자나 통화, 날씨같이 시시콜콜한 것들은 볼 수 있으면서 파일이나 인터넷 같은 건 못 보는 게 좀 이상하긴 하다. 물론 지금은 딱히 상관이 없다. 휘말려 버린 안타까운 한 사람에게 첫 임무를 잘 끝낸 것을 기념해 위로를 하고 싶었으니까.
“정확히 받았습니다. 현재 내용 확인 중입니다.”
루시는 내가 미리 준비한 휴대폰을 무사히 자기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살피기 시작했다. 애초에 자료 양이 그리 많지 않으니 루시는 얼마 걸리지 않아 내가 보낸 모든 것을 보고 확인했다.
“확실히 기존의 침략종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상대해 본 사람들이 하나 같이 이런 소리를 했지. 미쳐 날뛰는 야수가 아니라 지성체와 싸우는 것 같다고.”
“짧은 영상이지만 분명 일정한 동작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 같습니다.”
루시가 판단하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모양이다.
내가 굳이 이 정보를 루시에게 알려 준 이유는 우리의 계획대로라면 언젠가 루시가 이놈들과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 물론 아직은 루시가 더 강해 보이기는 하는데 적들 역시 계속해서 더 강한 괴물들을 게이트 밖으로 뱉어 내는 중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가? 지금까지 침략종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저 갈고리 발들을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니 꼭 아군 병사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흥미롭습니다. 현재 제가 생산하고 있는 마족형 병사들과 분명 그 특징이 일치해 보입니다. 전신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에 최적화된 갑주와 비효율적인 신체 기관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전투만을 위해 개조된 신체 등. 만류귀종이라 하니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진화의 끝은 결국 비슷비슷한 것 같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고등한 진화를 이룬 것인지 표본을 꼭 얻고 싶을 정도입니다.”
“네 말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침략종들이 너와 비슷한 어떤 존재로 인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란 뜻이잖아.”
루시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지만 나는 작게 탄식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는, 침략종들이 정말 누군가가 창조한 생물 병기라는 가설이 다른 세상에서 수많은 군세를 만들고 운용하는 거대한 하이브 마인드의 인증 딱지가 붙은 셈이니까.
“어쨌든 알겠어. 일은 그대로 진행해. 나도 시간이 다 되어서.”
딱히 하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계속 자리를 비울 순 없으니 루시와의 통화는 거기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한 내게 이지연이 다가온 게 그때였다.
“치료가 끝났군요.”
“네, 보시다시피.”
그녀는 이제 붕대를 다 풀었다. 현대 의학을 뛰어넘는 기적인 치유계 각성자들의 힘을 빌린 것이다. 비록 같은 각성자에 한해서라는 제약이 달려있긴 하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하고 부상에서 벗어나는 데 그들의 힘이 컸다.
“창수 아저씨가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탈진할 정도로 힘을 써 봤는데, 김서윤 씨의 부상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지연의 표정이 어둡다. 그녀는 지금 김서윤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그녀뿐만이 아니다. 김서윤이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두가 혼돈에 빠져있다.
아무리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미친 세상이라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서 김서윤에게 영상 편지를 찍게 만들었다. 자신이 무사히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부모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데릭 크레이브 사건은 결과적으로 무사히 끝났고, 어쨌든 사람과의 트러블이었죠. 덕분에 요즘 좀 잊고 있었는데 다시 마음이 안 좋네요. 우리가 예상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게이트라는 재앙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어서.”
“분명 더 강해지고 많아지겠죠.”
“저도 처음과 비교하면 꽤 많이 강해지고 있지만, 역시 부족해요.”
그녀가 애써 웃었다. 그녀도 분명 데릭처럼 힘을 추구하는 사람, 다만 그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원한다.
그런 이지연은 어디까지 감내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성격상 자신을 희생해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분명 그렇게 하지 않을까.
언젠가, 정말 언젠가 루시가 이 땅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지연을 포섭할 가능성은 분명······.
“나갈까요? 할 일도 없는데 답답해서.”
그때 이지연이 땡땡이를 제안했다. 부상을 회복하긴 했지만 그녀의 일정은 비어 있는 상황,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
“내일은 일정 있죠?”
“오후에 열릴 예정인 게이트가 하나 있군요. 저 밑에 지방에.”
그날 저녁 헤어질 시간. 이지연은 내일 일정을 듣고는 오늘 일찍 자야겠다며 자기 차를 타고 떠나갔다.
[김서윤이 영상을 다 찍었습니다. 너무 울어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제가 눈물샘을 잠가서 해결했습니다.]
“······되도록이면 몸에 손대지는 마.”
빠릿빠릿한 유리아와는 다른 건지 루시는 김서윤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라 되도록 자제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충분히 할 일을 다 해 준 김서윤을 이곳으로 복귀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일단 계속 그곳에 남아야 한다. 그리고 루시의 성격상 밥, 아니 양분만 축내는 존재를 두고 볼 리 없으니 결국 그녀는 우리와 함께 일해야 한다.
“오늘 밤 나와 직접 대화할 수 있게 전해 줘. 마음을 정리하고 함께 싸울 수 있도록 내가 잘 설득해 볼 테니까.”
나는 내 손에 나타난 휴대폰을 쥐고 인적 없는 곳에서 은신했다.
목적지는 김서윤의 부모가 있는 곳. 그녀의 부모에게 그녀가 찍은 영상을 전달할 예정이다.
“······?”
[다수의 기척 확인. 감각 기관 극대화.]
그러나 잘 움직이던 내 몸이 목적지 근처에서 급정지했다. 무언가를 감지한 루시가 감각기관을 강화하여, 그 원인을 자세히 찾아내었다.
“탐지기에 반응 확인. 각성자인가?”
“아니, 카메라에 아무것도 안 보여. 설마 김서윤의 실종이 정말로 그놈과 연관된 건가.”
강화한 청력에 어딘가에 숨어서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심지어 한국어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