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군단 (2) >
102화-군단 (2)
“다들 잘 보셨습니까? 언론에 공개된 건 극히 일부입니다. 적나라하게 공개하면 보나마나 여론이 박······ 아니, 불안에 떨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결국 저 괴물들과 싸워야 하는 사람이니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저놈들이 우리나라에도 나옵니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나오겠지요. 게이트가 이념, 정치, 진영, 선진국 후진국, 국경 그런 거 가립니까?”
직접 자료를 설명하던 백승철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나오냐는 다소 얼빠진 질문 이후 다시 현장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화면 속 적의 강함과, 그 강함으로 나오는 파괴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모여든 군대의 화력을 견뎌 내며 역으로 분쇄하고 그대로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키는 거대한 이동 요새. 그리고 그 이동 요새를 떨구기 위해 덤벼든 각성자들을 도륙한 초고등급의 강적.
그동안 흩어져 있던, 리암 앤더슨을 비롯한 제대로 된 전력이 덤벼들어 내쫓기 전까지 적들은 그리 길지 않은 그 시간동안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내었다.
“놈들은 최대한 피해만 주다가 그대로 도주해 버렸습니다. 마치 이번 습격이 우리를 약 올리거나 탐색하려는 목적이었다는 듯이. 막았다고는 하는데······ 글쎄, 솔직히 도주하는 걸 응징하지도 못한 걸 보면 제대로 막은 것 같지도 않죠. 만약 저 괴물들이 우리나라 서울에서도 저런다고 생각해 봅시다. 고민할 핵폭탄조차 없는 우리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탄식한 백승철은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방금 전 그 자료들을 보고 자신을 가지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밸런스 붕괴.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할 게 뻔했다. 게이트가 점차 난이도를 올려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그 선을 너무 심하게 넘었다.
“······.”
슬쩍 옆자리를 흘끔거리니 이지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불가능한 전장에도 몸을 던져 온 그녀 역시 이번에는 정말 일말의 희망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일단 다들 쉬시죠. 조만간 국회에도 가서 설명해야 하는데······ 답이 안 보이는군요.”
백승철의 의지로 대다수 직원들이 참여한 회의가 그렇게 끝났다. 그는 집단 지성이라도 빌려 볼 생각인 것 같았지만, 집단을 뛰어넘는 규격 외의 적에게는 별 소용이 없어보였다.
“넌 어떻게 생각해?”
그대로 다른 사람들과 섞여 밖으로 나온 나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켜서 루시와 연결했다. 애초에 나는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루시와 통화할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분명 아일랜드·알파를 사용한 저희의 강습 전략과 비슷합니다. 상대의 방어 능력이 부실하고 생산 기반을 무차별 테러할 수 있다면 충분히 참고할 만한 전술 같습니다.]
루시 역시 그런 내 생각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루시답게, 그저 사실만을 분석할 뿐이다.
“라온을 심문한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
“그가 다른 세상과 연결할 수 있다는 고대의 주문을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아주 먼 과거 다른 곳에서 이 땅에 왔다는 그의 동족들이 어디 있는지는 발설했습니다. 엘프들, 그들을 찾아가 정보를 물으면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게이트에서 등장한 신종 침략종들은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은 일. 나는 화제를 돌렸다. 결국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던 대로 루시를 계속 성장시키는 것뿐이니까.
“엘프들까지 공격하려고? 그럼 이미 중부지역 영주들을 공격한 시점에서 너무 부담될 텐데.”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전선을 늘릴 수 없습니다.]
루시가 화면을 바꿔 현장들을 보여 주었다. 검은 오크 왕 카임을 기습해서 공격한 이후 자동적으로 벌어진 중부 지역 영주들과 루시가 이끄는 마왕군과의 전쟁.
하지만 적들은 자신들의 전력을 인간 세상에 투사하고 있는데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전선의 최선두에서 싸우는 이들은 우리가 미처 잡지 못한 북부 지역의 난민들이 주축이었으니까.
영주 하나를 잡았다고 모든 적들이 무너지는 게임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적들은 새로운 존재를 자신들의 리더로 삼아 끈질기게 저항했다.
“역시 무작정 다 공격하면 안 되는 거였나······.”
나는 의외로 팽팽한 전선의 상황을 보고 침음했다. 편이 없는 게 역시 크다. 노예 같은 건 필요 없으니 포로도 잡지 않는 루시가, 가차 없이 양분으로 갈아 넣는 걸 아는 적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으니 쉽게 굴복시키기 어려웠다.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게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몇몇 영주들과 몰래 손을 잡는다던가 하면 이런 위기를 타파할 수 있었을 테지만.
[제 계산에 따르면 손을 잡는 것보다 차라리 전부 먹어치우고 그 양분을 이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나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변수 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루시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혐오하고 멀리했다. 그들은 이미 마왕을 배신했던 이들, 즉 루시가 그토록 혐오하는 계산의 범주를 벗어나는 변수 덩어리 그 자체다.
“그럼 방법을 제시해 봐.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알려 줘.”
[더 많은 영향력을 투사하기 위한 더 큰 규모의 군단. 그것을 위해서는 양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양분채취율은 96%에 근접하니 결과적으로 그 효율을 올릴 방법이 필요합니다.]
“효율이라고.”
루시는 더 많은 양분이 필요하다 보고했고, 그것을 위해 양분 채취 효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예를 들면 열기를 에너지로 바꾸는 생체 지열 발전소 능력을 가지고 있던 침략종, 화염포식자를 이용해 지열 발전을 양분 채취의 하나로 포함시킨 것처럼.
하지만 고민해 봐도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부분은 초월적인 연산력을 가진 루시도 어떨 수 없는 부분이니 결국 내가 뭔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줘야 한다.
“일단 나도 고민 좀 해 볼게.”
[그리고 이것들은 향후 충분한 양분이 확보되면 시도할 새로운 개량형 병사들과 새로운 시스템의 초안입니다. 특히 이 보충 무장형 시스템은 이번에 김서윤에게 강심을 제공하며 시험해본 것으로······.]
루시는 그 이후로도 보고를 쏟아 내었다. 덩치가 커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루시는 성장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그것들을 전부 맞추려면 역시 내가 더 움직여야 한다.
***
“······.”
통신 종료. 그는 이제 휴대폰을 보고 있지 않는다. 루시는 그곳에 소모되던 연산력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자신이 진화하고 성장하는 만큼, 세상 역시 변한다. 특히 루시가 신경 쓰는 세상은 하나가 아니기에 더욱 급할 수밖에 없다.
이전이라면 이렇게 급해도 금방 진정시키고 철저한 계산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하이브 마인드로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가슴 한쪽에 계속 불안함이 남아있었다.
“김서윤, 코볼트들과의 전장에서 병력의 손실이 생하고 있으니 당신이 나서 줘야겠습니다.”
“제, 제가요?”
“놈들이 주요 거점들을 마력 결계로 보호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마력을 강제로 흐트러뜨리는 당신의 그 힘으로 결계를 부수고 놈들을 죽이십시오.”
루시는 일단 김서윤을 본격적으로 써먹기 시작했다. 강심을 이용해 증폭시켜, 몇 배로 강화한 그녀의 능력을 사용해 승률이 밀리는 지역에 파견한 것이다.
“부족해. 부족합니다.”
그러나 루시는 이런 평범한 조치들로는 자신이 원하는 성과를 뽑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답답해했다.
분명 소모전을 반복하면 끝내 자신이 이길 것이다. 아무리 마족들이라 해도 마왕군만큼 전쟁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아니니까.
이대로 기다리면 그가 방법을 찾아 줄 것이라고,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길을 알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지금의 루시는 단순히 그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걸 넘어서 스스로 움직여 그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다.
[롱기누스.]
그녀는 둥지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는, 가장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남발하지 않고 있는 자신이 만든 걸작을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몸체 전체가 통짜 강심으로 된 전략 병기.
저런 무기를 자원 투자 없이 하나 새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굉장한 이득이 될 테니까.
“드, 드래곤 하트! 용의 심장! 교단도 연합군도 지금 그걸 노리고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그만······.”
그런데 때마침, 포로들을 잡아 정보를 캐기 위해 고문하던 현장에서, 단서가 될 수 있는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다시 말하십시오.]
“흐, 흐아······.”
잡혀서 고문당하고 있던 존재는 라미아라고 불리는 마족 중 하나. 하체는 뱀, 상체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마족은 날이 갈수록 발달하는 루시의 기상천외한 고문 기술에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 직전에 들은 소식이다. 남부 왕국에 보물로 내려오던 용의 심장이 공개되었고, 양측 다 그걸 노리고 있다고.”
촉수에 휘감겨 있던 그녀는 머리에 깃든 뇌아귀·알파를 통해 전해지는 루시의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이 아는 것을 되는 대로 내뱉었다.
[용의 심장에 대한 데이터를 원합니다.]
“나, 나도 정확히는······ 히이익!!! 말할게! 말한다고!”
이미 뇌아귀를 통해 뇌의 일부를 장악당한 그녀는 모든 감각이 차단당한 상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고통에 떨던 그녀는 루시가 뇌아귀를 한 차례 꿈틀거리는 것만으로 비명을 지르며 입을 열어 말을 쏟아 내었다.
“거대한 마력이 뭉쳐서 만들어진 강력한 보물. 용이 오랜 세월 쌓아 온 거대한 마력을 응축하고 있다는 것뿐이지만, 그걸 이용할 수 있다면 불가능할 건 없겠지.”
[거대한 마력이 응축된······ 강심.]
루시는 그녀의 증언을 듣고 용의 심장을 강심의 한 종류라고 판단했다. 아무리 듣고 되새겨도 그 원리와 구성이 비슷한 탓이다.
필연적으로 루시는 강심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자신의 무기를 떠올리고, 그것에 흥미를 가졌다.
“사, 살려 주는 거야?”
“그게 전부라면 당신은 처분입니다.”
“안, 안 돼! 안······.”
정보만 빼먹은 루시는 더 이상 들을 게 없다고 판단해진 그녀를 산채로 소화액에 집어 던졌다. 이미 루시의 모든 신경은 오랜 세월 만에 세상에 등장했다는 용의 심장으로 옮겨간 지 오래였다.
[그러니 유리아, 당신이 정보를 더 모아 와야 합니다.]
“마왕님, 설마 그곳에 개입하실 생각이신······.!”
[모든 판단은 계산을 실행할 수 있는 데이터가 수집되면 그 이후 내립니다.]
루시는 인간 세상에 있는 유리아를 이용하려 했다. 당연히 유리아는 또다시 전장에 개입하겠다는 루시의 말에 기겁했지만, 루시는 사실 유리아에게 하는 말과 달리 이미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수집하는 데이터들은 결과에 끼워 맞추기 위한 것일 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루시는 병력을 보낼 것이라고 이미 구상을 끝냈다.
[현재 소모전만 반목하고 있는 중부 지역 공략전의 균형을 부술 수 있을 작은 무게추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 염원을 위한 것이니 실행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끝내 루시의 각오를 확인한 유리아는 결국 거부할 수 없이 그 임무를 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