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군단 (5) >
105화-군단 (5)
이미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드러내는 것과 최대한 감추고 혼란을 주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그 차이가 유의미하다는 결론을 낸 루시는 가차 없이 입막음을 시도했다.
“소, 소문으로 들었다. 검은 갑충들!”
루시가 휘두른 롱기누스를 중첩된 방어막을 불러 가까스로 막아 낸 로베르 후작의 몸은 물론 목소리도 미친 듯이 떨렸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한계였으니까.
“악신을 섬기는 교단이 부리는 괴물들이 아니었단 말인가······!”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당신들 모두, 아니,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이 제 적입니다.”
루시는 후작의 창백히 질린 얼굴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저 얼굴과, 이 분위기가 어째서인지 좋았다. 자신이 만든 혼돈 그 자체.
저것들이 바로 증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이 이루고 만들어 온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
“당신은 이렇게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당신의 동족들은 이렇게 계속 싸우게 될 것입니다.”
루시는 당황한 후작의 얼굴 너머, 자신의 계획이 잘 맞아 들어간 현장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서로 싸우던 교단과 연합군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마왕군에게 일제히 도륙당하는 중이었다.
피아 구분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그들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이어 가는 마왕군과 달리 아직도 자기들끼리 칼을 맞대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허비한 당신들은 우리를 막지 못할 겁니다. 그때가, 그 순간이 오면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이 가진 생산력을 다 합쳐 봤자 우리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루시는 이미 하나의 목표로 향하는 수많은 가설을 세워 둔 상태다. 중앙 통제 시스템인 자신 그 자체인 마왕군이, 충분히 발달한 시스템과 양분을 바탕으로 웅크렸던 몸을 완벽하게 피는 순간이 바로 그 목표였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루시는 복잡한 가정과 계산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가능한 만큼 병력을 생산해 닥치는 대로 공격하면 되니까.
지금 이 순간마저 그저 생산과 전쟁만 반복해도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그때를 위한 밑거름이다.
“대, 대체 너 같은 괴물이 용의 심장을 가져가서 어쩔 셈이냐. 감히 해석이나 할 수 있겠느냐!”
“아는 것 하나 없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소리입니다. 비루한 자기 몸 하나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는 티끌만 한 자아와 연산력을 가진 이 하찮은 미물.”
이미 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린 용의 심장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후작의 모습을 비웃은 루시는 손에 쥔 롱기누스를 다시 한 번 들어올렸다.
“이제 그만 죽으십시오.”
[롱기누스·출력 전개·참격]
루시는 빛을 뿜어내는 쌍날 검을 들어 그대로 내리쳤다. 마법도, 심법도 필요 없다. 순수한 마력 그 자체가 가진 파괴력이 가감 없이 그대로 뿜어진다.
‘말도 안 돼.’
그것을 본 로베르 후작은 경악했다. 마법사이면서 용의 심장을 탐내던 존재이기에 모를 수가 없다. 루시가 든 쌍날 검이 용의 심장과 마찬가지로, 마법 같은 가공 없이 순수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병기임을 알아 본 것이다.
“탐욕은 자격을 갖춘 자에게만 허락된 것이라 배웠습니다.”
그러나 후작은 그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방어막은 물론 그 뒤 일대까지 싹 날려 버린 일격에 산채로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전군 퇴각.]
루시는 그 이후 함께 온 하위 프로그램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이런 고기동 작전을 위해 데려온 병력들은 모두 비행이 가능하게 개조된 병력들.
마왕군은 그 즉시 병력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몸을 빼 일제히 도주했지만 이제 이 극도의 혼란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최우선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대기합니다.”
루시는 허공에서 대기하던 아일랜드·알파에 무사히 상륙했다. 그러나 밑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지켜보던 루시는 그 즉시 마계로 돌아가지 않고 대기했다.
아직 모든 병력이 도착한 게 아니었으니까.
***
“어서!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우리 임무는 이것을 반드시 본국으로 보내는 것이야!”
수천의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어둑한 평원.
이곳을 두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방독면을 집어 던진 그들은 사력을 다해 달렸다. 죽어 가는 동료들을 외면하고, 죽일 수 있는 적을 무시하고.
‘분명히 담겼다. 검은 갑충 집단, 흑철충!’
선두에 있던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품에 숨긴 수정구를 꾹 움켜쥐었다. 말단 성기사들인 그들은 따로 받은 임무가 하나 있었다.
바로 혹시 모를 변수가 작전 중 나타나면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그것을 기록해 오는 것. 배터리도 필요 없이 360도 방향의 모든 영상과 음성을 담을 수 있는 이 물건에는 방금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여신께서 그 끔찍한 괴물들을 가만 둘리 없다.’
그 파괴력과 잔혹함을 보고 공포심을 느꼈기에 그들은 이것을 반드시 본부에 전달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자, 잠깐! 기다리게, 렉스!”
그러나 그들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열심히 달리고 있는 자신들의 위로 달빛을 가리는 몇몇 형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그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 본 그들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들었다.
강심으로 강화한 날개를 파닥이는 그것들은 다른 마왕군과 비교해 비교적 얇고 가냘픈 다리와 몸을 가졌지만 그 몸 전체는 단단해 보이는 검은 갑옷으로 두르고 있다.
거기에 얼굴까지 뒤덮은 투구 속에서 빛나는 안광들. 이 하피 타입 마왕군들은 이미 휘영청 밝은 달빛을 등진 채 그들을 하늘에서 포위했다.
“렉스, 자네만이라도 탈출하게.”
“······알겠네.”
품 안의 수정구를 움켜쥔 그는 시간을 끌어 볼 테니 도망치라는 동료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숭고한 희생, 그리고 그 피의 값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계획대로 생포할 것.]
병사들의 눈을 통해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루시는 미리 계획한 대로 그들을 생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명령을 수신한 현장 지휘 개체인 하피·델타는 손에 든 무언가를 그들을 향해 겨누도록 지시했다.
개조를 거친 그들은 하피를 베이스로 함에도 날개 팔 이외에 인간과 같은 손을 쓸 수 있는 팔을 한 쌍 가지고 있었고, 그 손에 길고 가느다란 무언가를 들었다. 창은 아니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이 괴물 놈들아. 신께서 나를 지켜 주실 것이다. 내려와 덤벼라!”
성기사들은 그것을 보고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물론 진짜 목적은 싸우다가 눈치를 봐서 포위를 뚫고 도주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목숨을 바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커헉······.”
그러나 그들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하피 타입들은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다. 손에 들고 겨눈 것을 작동시키자, 체내의 강심과 연동된 마력이 집속하여 작은 광선의 형태로 뿜어졌다.
광선들은 일격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그들의 팔다리를 절단해 버렸다.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그들은 왜 자신들이 검 한 번 휘둘러 보기도 전에 쓰러졌는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과한 것 같지만, 상관없을 듯합니다.]
루시는 하피 타입들이 사지가 잘려 나가 무력화된 채 비명만 지르는 그들을 회수해 오는 걸 보며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루시가 내린 명령은 분명 생포, 그 디테일은 자율적인 판단에 맡겼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루시 본인은 근접 전투를 통해 제압하고 생포할 줄 알았지만 자율적 판단이 가능해진 하위 프로그램, 미셔너리였던 하피·델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쏴 버린 것이다.
***
“어쨌든 잘 끝난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통제가 불가능하다던가.”
“그런 것도 아닙니다.”
루시가 스스로를 복제해서 만든 하위 프로그램, 그들 중 일부는 과거의 루시처럼 자아를 개화하고 스스로를 개량하고 성장해 간다. 그 수준은 루시에 비해 턱없이 느리고 미미하지만 그래도 성장은 성장.
특히 그들 중 1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은 그래도 꽤 성장을 마친 상태다.
“그들이 가진 유연함이 전장에선 필수적이기에 이제 와서 절대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장점만 있을 수는 없지. 네가 원하는 유연함은 필연적으로 어긋남도 동반해.”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루시라는, 가장 강력하고 많이 성장한 프로그램을 알고 있으니까.
“신무기를 노출한 건 좀 그렇지 않나?”
“생포한 둘이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중부 전선에 투입하기 전에 확인은 해봐야 했기에.”
내 관심이 더 가는 것은 사실 따로 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실사용에 들어가 훌륭한 성과를 올린 루시의 신무기.
새로운 타입의 병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병기. 루시는 병사들에게 들려 줄 무기를 새로 만들었다.
“추가 무장 프로젝트는 성공적입니다. 교체할 수 있는 무장을 활용해 연산력과 병력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포격만을 위해 합성 생물을 만드는 것보다는 효율적이겠지.”
목적은 당연히 효율성 증대였다. 모티브가 된 것은 저쪽 세상에 흘러든 총과 대포 등의 화기. 루시는 처음 이 아이디어를 접한 순간부터 나를 통해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어 배웠고 노획한 실물까지 확인해 가며 자신만의 무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광선포를 든 병사들은 마법을 쓰느라 굳이 연산력을 소모하지 않고 고화력의 공격을 퍼붓는 게 가능해졌으며, 여차하면 무기를 버리고 근접전을 벌일 수도 있으니 굳이 병사를 따로 생산할 필요가 없었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시스템과 새롭게 획득한 유물로 균형 상태인 전장을 깨부수겠습니다.”
“나도 날짜가 잡혔어. 또 출국해야 해. 뭐, 이번에는 바다 건너 바로 옆 나라지만.”
루시는 아무리 큰 성과를 얻어도, 아무리 큰 손해를 봐도 언제나 최선의 수를 찾아내어 멈추지 않고 달린다. 그것과 맞춰야 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다국적 각성자 연합군이 현지의 군대와 함께 던전에 진입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살짝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리암 앤더슨. 그 사람을 또 보게 될 거 같아. 거슬릴 게 뻔해. 활동에 제약이 생길 수도 있어.”
이번 던전 공략에 참전하는 이들 중 리암도 있었다. 그와의 악연도 악연이지만 어쨌든 그는 미 정부와 긴밀한 사이일게 뻔하다.
지금 저쪽 세상에서 교단과 협력하는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고 있는 나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쪽 세상에서야 그들은 나의, 루시의 적이지만 이곳에서는 함께 이계의 괴물에 대적하는 같은 팀이었으니까.
“여차하면 그를 이곳으로 보내 버리셔도 됩니다. 그리 강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되도록 그럴 일 없게 만들고 싶어. 그는 이 세상에 진짜 중요한 전력이거든.”
루시는 그를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달랐다. 그냥 엮이지만 않으면 그걸로 족했다. 물론, 이 문제는 내게만 달린 문제가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