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군단 (6) >
106화-군단 (6)
“저, 저는 못 간다고요?”
“그래.”
이지연이 요청한 파견이 승인되고 다시 한 번 출국을 준비할 때. 오진혁은 이번에는 나와 이지연 단 둘만 간다는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는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어째서요? 저도 팀원인데!”
“일단 너나 이지연 씨는 소속된 팀이 원래 없는 거고, 이번에는 화력 지원이 필요하지 않고, 지난 번 사건 때문에 미성년자들의 활동에 제약이 커졌으니까.”
나는 어이없다는 반응인 그에게 제대로 된 규정을 알려 주었다. 사실 그동안 오진혁이 우리를 따라 위험한 곳을 돌아다닌 게 파격적인 것일 뿐이다. 분명 그가 가진 힘은 뛰어났고, 앞으로도 그 힘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나 지금은 아니었다.
“제, 제가 지난번에 아무것도 못하고 인질로 잡혀 버려서 그러는 거죠?”
“나는 몰라. 그러니 일단은 그냥 수련에 힘써. 네 힘은 지금이 아니라 언젠가 중요하게 쓰일지도 모르니까.”
이내 축 늘어진 오진혁이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그를 데려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지연이 강하게 주장하면 혹시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녀가 굳이 필요 없는 일을 해 가며 그를 위험한 곳에 데려갈 리가 없다.
“아무리 수련해도 실전 경험만큼은 못 돼요. 직접 겪어 봐서, 실전이 얼마나 효과 있는지 아는데.”
“네겐 시간이 많아. 너무 급하게 할 필요는 없어.”
“며칠 전까지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이라는 말은 아마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신종이 나타나서, 김서윤이 속했던 팀을 몰살시키고 또 다른 곳에서는 도시 하나를 반파시켜 버린.
“저보다 괴물들이 더 빠르게 강해지는 것 같아서 도저히 안심할 수 없어요. 그런 괴물이 어느 날 갑자기 제 앞에, 제가 지켜야 할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저는······ 못 이길 것 같아요.”
얼굴을 찡그린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일부 털어놓았다. 아직 미숙하지만 겪을 일은 다 겪은 사람의 마음이다.
나는 오진혁이 처음 각성했다는 순간을 떠올렸다. 분명 친구들을 공격하는 괴물들을 지키기 위해 나서면서 힘이 발현되었다던가.
“네 말이 틀리지 않아. 좋아, 내가 한 번 물어볼게.”
“저, 정말요?”
“물론 이지연 씨 선택에 달린 것이지만.”
잠시 고민한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이곳에서의 나는 그저 일개 담당자일 뿐이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내 말 한마디에 벌어지는 전쟁과 처절한 발버둥 끝에 경쟁에서 밀려 사라지는 이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루시와 맞서다 패배하여 잡아먹힌 적들. 그들 역시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진심을 다해 싸웠다. 다만 발버둥치고 필사의 마음을 먹는다고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발버둥이라도 쳐 보는 것과 무력하게 쓰러지는 것이 다르기에, 나는 오진혁이 기회를 잡기를 원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진혁이는 아직 어리지만.”
그리고 이런 내 말을 들은 이지연은 묘한 표정으로 잠시 고뇌에 빠졌다.
“그러면 진혁이도 데려갈까요?”
“시간이 없다는 건 사실이죠.”
이지연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게이트가 어떤 괴물들을 어떻게 뱉어 낼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한 번 바꾸고 고치기도 어렵고 복잡한 기존의 규정과 관습에 집착했다가 어떤 피해를 볼지 모르니까.
“진혁이 일은 다른 분들께는 제가 말해 볼게요. 그보다 이번에 괜찮겠죠? 그 사람도 오잖아요.”
그녀는 주제를 넘겼다. 넘겨진 주제는 다름 아닌 이번에 우리와 함께 싸우게 될 사람. 동시에 이지연도 나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난번처럼 서로 크게 마주칠 일 없길 바라는 수밖에요.”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외국으로 나오지 않는 리암이 왜 하필 이번에 나왔는지 그 이유도 모르니까.
나야 리암과 직접 충돌까지 벌이고 그가 나를 신경 쓰는 덕에 여전히 국내에 감시망이 깔려 있어 거슬리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이지연 역시 대의와 정의보다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며 힘을 쓰는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죠. 지금 시대에 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런 그녀도 리암이 중요한 존재인 건 부정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에 구설수도 많지만 어쨌든 그가 가진 힘은 진짜이고, 위기 상황에서는 쏠쏠하게 잘 쓰이는 힘이니까. 태도는 별로여도 결과는 확실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지연에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고 물어봐 주십시오. 제가 정말로······.]
“이따 다시 보죠. 오늘도 저희 일은 대기하는 것뿐이니까 편히 쉬고 있어요.”
지잉 하고 울리는 알림과 함께 루시가 보낸 메시지가 휴대폰에 떠오른 게 그때였다. 아무래도 아직 이지연을 포기하지 않은 모양, 피식 웃은 나는 잠시 자리를 벗어났다.
[이지연도 싸우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지금은 분명 계속, 끝없이 싸울 수 있는 이곳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어, 아니야.”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통화할 수 있는 외진 곳으로 향했다.
분명 이지연이 강해지고 중요해질수록 그녀에게 할당되는 일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그녀같이 강한 각성자는 굳이 약한 일들에는 투입하지 않고 비상시를 위해 계속 대기만 시키는 것이 당연하긴 하다.
분명 남들은 일도 잘 안 하고 돈은 돈대로 받는다고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지연의 성격과 거물이 된 그녀는 한 번 임무에 투입되면 말 그대로 진짜배기 위험 상황에만 투입된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편하고 좋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 진짜 하려던 말이 뭐야?”
“실은, 이번에 획득한 용의 심장을 가공해 새로운 병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탁 트인 옥상으로 올라온 나는 저 멀리 흡연구역에서 다닥다닥 붙어 흡연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통화를 시작했다. 화면 속에 보이는 루시는 이지연 이야기는 슬쩍 치우고, 대신 다른 것을 보여 주었다.
“출력의 총량은 롱기누스와 동일합니다. 고작 지름 1m 짜리 광석이 담은 힘이, 드넓은 면적의 땅에서 뽑아낸 에너지 총량과 비슷한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지금 던전 코어를 베이스로 한 아군의 강심보다 더 효율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걸 분석하고 알아내면 아군은 용의 심장을 양산할 수 있게 되는 건가? 더 작고, 더 강한 심장을?”
“안타깝게도 그건 아닙니다.”
용의 심장이 가진 가능성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 하지만 루시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획득한 용의 심장을 쪼개 가며 그것에 담긴 내용을 분석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버렸다는 게 그 이유였다.
“실제 살아 있는 용이 자신의 심장을 어떻게 가동시키는지 분석하지 않는 이상 오래되어 굳어 버린 유물을 가지고 그 비밀을 알아내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그건 우리가 원하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우리가 계획한 내용에 용의 심장을 통한 강심 개량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루시는 계획대로 용의 심장을 이용한 새로운 병기를 완성시켰다.
“순수한 마력을 증폭하여 발산하는 두 번째 마력 증폭 발산 병기 궁니르.”
루시가 마치 푸른 빙하나 크리스탈을 깎아 만든 것 같은, 거대한 랜스의 형태를 하고 있는 무기를 들어 올렸다. 기존의 롱기누스와 같이 가공을 거치지 않은 순수하고 거대한 마력을 폭사하여, 상대의 마력에 대해 강한 우위를 잡는 전략 병기.
지금까지 저 무기로 균형을 무너뜨려 승리를 가져오고 패배를 모면한 전장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덩치가 작아질수록 출력이 부족하다는 아군의 약점을 보완하며 적들은 치를 떨고 아군에게는 승리를 가져다 주는 죽음의 무기다.
“기존에 있던 롱기누스와 이번에 만든 궁니르, 두 개 다 네가 쓰려고?”
“그렇게 사용하면 효율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거대한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어 사용자는 단순히 기동력과 연산력만 제공하면 그만이라는 것이 발산 병기의 가장 큰 장점. 저는 이것을 김서윤에게 빌려주어 적진을 함락시키라 명령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원리를 모르는, 심지어 루시마저 분석이 불가능한 각성자의 힘은 강심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강심은 그저 상대방에게 마력을 제공하는 일종의 외장배터리였으니까.
그러니 분명 발산 병기가 가지고 있는 막대한 힘도 각성자의 힘에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루시는 그것을 노리고 테스트를 겸해 김서윤에게 궁니르를 쥐여 주었다.
“이, 이건...”
[이제 마력에 무지하던 당신도 그것이 담고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입니다.]
화면 속, 비행종들이 운반해 온 궁니르를 받아 든 김서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갑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것에 담긴 막대한 힘을 곧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코볼트 부족연합이 연합장 오세를 중심으로 단단히 저항하고 있어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그것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들고 그들의 방어막을 뚫어, 힘을 증명하십시오.]
루시는 별다른 지원 없이 김서윤에게 버티고 있는 적들을 뚫어 내라 명령했다. 이미 가능하다는 계산 결과를 도출했기에 이러는 것이지만, 루시는 김서윤에게는 굳이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저것이 루시 나름대로 자신 이상일수도 있는 완숙한 자아를 가진 김서윤을 조련하는 방법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할게요. 제가 해야지만······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입술을 깨문 그녀는 루시의 의도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는 김서윤에게 마왕군에 헌신하고 봉사하면 언젠가 지구로 돌려보내 가족들과 만나게 해 주겠다고 회유한 상태.
그것을 위해 그녀는 무엇이든 불사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녀에겐 자신의 목숨 이상으로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루시는 그것을,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고 철저한 거래의 소재로 써먹는 것뿐이었다.
[신경 반응과 호르몬을 통해 분석한 김서윤의 심리 상태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합니다. 그렇다면 변수 없이 계산 결과대로 임무를 완벽히 완수할 수 있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질 거라고 걱정은 안 해.”
날개를 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김서윤의 모습을 보여주는 루시의 호언장담에 쓰게 웃었다. 감정이란 것도 결국 호르몬 같은 신체 반응에 의한 것이라던가, 전신을 세포 단위로 주무를 수 있는 루시의 손에 떨어지면 자신의 감정조차 숨기지 못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 상태에서 인간의 감정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는 루시는 어쩌면 그 감정마저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시 이지연을 루시에게 넘기는 일은 있어선 안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