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군단 (8) >
108화-군단 (8)
루시가 선보인 새로운 병기, 궁니르와 각성자인 김서윤의 조합으로 또다시 대전쟁의 주역이었던 마계 영주 하나가 죽었다.
자기들은 무너진 북부 연합과 다르다고 안심하고 있던 다른 영주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언제나처럼 루시는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력을 보여 주니까.
이제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한 균형을 부술 확정타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확정타를 위해 출국하는 중이고.
“너 그거 보는 거 걸리면 혼날 텐데.”
“그래서 몰래 보는 거죠. 역시 방송국 화장이랑 카메라가 좋긴 좋아요.”
늘 그렇듯 옆자리에 앉은 오진혁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편하게 기대어 영상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이제 보니 이 녀석도 보통 녀석은 아니다. 그 일을 겪고도 따라가겠다며 매달리는 것도 그렇고.
“솔직히 잘 나왔잖아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이지. 보면 가만 안 둔다고 틈만 나면 말하는 걸 보면.”
나는 그가 슬쩍 보여 주는 휴대폰 화면을 보고 피식 웃었다. 공중파 프로그램에 나오고 있는 건 인터뷰를 진행한 이지연이다.
며칠 전 방송국에 가서 찍은 것, 오진혁이 괜히 언급한 게 아닐 정도로 치장에 힘을 세게 준 그녀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 외모에 더해 손에 꼽는 강함, 영웅다운 마음가짐 등등. 그녀가 방송 출연이나 언론 노출을 상당히 부끄러워 한다는 점만 빼면 정말 광고도 계속 찍을 스타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요즘 인기가 더 좋아졌어요. 누나뿐만이 아니라 각성자들 전부······ 전반적으로. 저도 팔로워 수 5배로 늘었는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생각해 봐.”
각성자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 루시의 존재를 알고 있던 나조차도 기절할 뻔했다. 당연히 사건 사고도 문제도 많았으며 한때는 게이트보다 각성자들이 더 문제라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빠르게 적응했다.
명백히 그 위험 수위를 올려 가는 게이트와 던전,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막아 자신들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함을 이제 완전히 깨달은 것이다.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심리 속에서조차 각성자들이 돌연변이나 골칫덩이가 아닌 영웅으로 올라섰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만큼 책임도 올라가지. 네가 말했듯,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각오는 했어요. 너무 걱정 마시죠? 형도 제가 지켜 줄 수 있으니까.”
“말만이라도 고맙네. 하지만 네가 날 지켜야 하는 상황이면 이미 큰일이야.”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가 나를 지키는 것보다 내가 그를 지키는 게 더 빠를 것 같지만 이렇게 오해 받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여기는 꽤 익숙하네요. 몇 번이나 여행을 왔던 곳이라 그런지.”
“저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여행이라면 좋았겠지만.”
비행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바로 옆 나라,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묘한 익숙함까지 느꼈을 정도다. 여행 경험이 있는 이지연도 오진혁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다시 여행 올 수 있도록 이번 일이 잘 처리되어야죠.”
하지만 오늘 우리는 여유롭게 여행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일본 관동 지방에 나타난 중대형 던전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를 포함, 다국적으로 구성된 각성자들이 계속해서 입국하고 있었다.
우리는 튀는 걸 정말 싫어하는 이지연 덕에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민항기를 타고 왔지만 전용기 혹은 국가에서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온 이들도 많다.
“저 사람들, 아무래도 이지연 씨를 알아보는 모양인데요?”
“예······?”
당연히 이곳에는 기자들도 바글바글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일반인들과 섞여 있는 우리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다. 이지연이 무슨 유명 연예인마냥 선글라스와 마스크까지 썼는데도 걸린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그냥 무시할까요?”
“그러고 싶지만 말 한마디 안 하는 건 좀 그러니까······ 인사만 할게요.”
이지연은 싫은 티를 냈지만 성격답게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이제 그런 일을 처리하는 건 내가 할 일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옆에 딱 붙어서 그녀가 가진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기 위해 위장하듯 취업한 것이었지만 적성과 별개로 나도 이 일에 상당히 익숙해졌다.
“현지 기자들이시죠? 짧은 인사라면 모를까 정식으로 시간을 가지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마스크를 낀 덕에, 지금 내가 하는 말과 실제 그들에게 들리는 말은 전혀 다르지만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한국말을 하면 루시가 그것을 실시간으로 번역해 대신 말한다.
“이, 일본말을 상당히 잘하시는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이제 사람들 대하는 것도 능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사회 경험도 별로 없던 무뚝뚝한 대학생일적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이지연 씨가 컨디션이 별로라 하시면 혹시 남자 친구 분에게 질문해도 됩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은 그런 내 자부심을 한 번에 박살내는 일격이었다.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감히 건방지고 망측한 오해를 하는 그에게 욕설을 전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내가 말문이 막히자 루시가 제멋대로 답하려 할 정도였다.
“오해······ 오해입니다.”
결국 나는 해명을 해야만 했다. 덕분에 이지연이나 오진혁이 귀찮은 일을 덜었다면 다행인 것이지만, 대체 왜 그들이 내게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계속 진땀을 흘려야 했다.
***
“제가 말했잖아요. 다들 오해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 우리 주변 사람이라면 말이야. 하지만 저 사람들은 외국의 기자들이라고.”
“이제 형도 꽤 유명한데, 말 안했나요?”
오진혁은 녹초가 되어 공항을 빠져나온 나를 보고 약올리듯 웃더니, 내가 진절머리를 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명해? 내가 왜? 넌 연예인들 매니저가 유명한 거 봤어? 방송 나가는 사람들 말고.”
“각성자 전담 담당자는 평범한 로드매니저가 아니잖아요.”
내가 헛웃음을 흘리니 그가 오히려 한심하다는 의미가 가득 담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쯤 되니 진짜로 내가 모르는 것 같아 몸이 움찔했다.
생각해보니 요즘 일 아니면 저쪽 세상에서 활동하는 루시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정작 다른 것들에는 굉장히 소홀했었으니까.
억지로 했던 SNS 같은 건 때려친 지 오래다. 학생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던 인터넷 커뮤니티 등도 안 들어간 지 상당히 오래되었다.
“통제 구역에 각성자들 따라다니면서 위험도 다 겪고, 전문 자격 시험까지 만들어진다고 하고.”
“유명한 거랑은 별로 상관없는 것 같은데.”
“뭐, 형이 점점 유명해지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오진혁은 내게 인터넷 게시물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게시물이 올라온 게시판 이름이 낯익었다. 이지연 갤러리. 말 그대로 사람들이 각성자 이지연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모여든 인터넷 커뮤니티다. 생각해 보니 아무리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다지만 왜 이런 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심지어 그 게시판 지분 상당수에 나도 포함되었다.
“제가 덕질도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원래 사람들 구설수에 오르내리면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다 만들어지거든요. 형이 누나 뒷모습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는 사진 한 장만으로 별 소리 다 나와요.”
“아직 민증도 안 나온 애가 세상이치는 통달했네. 그리고 역시 사람들이 아직 살 만한가 보다. 이렇게 열심히들 헛소리 지어내는 거 보면.”
굳이 무슨 글들이 적혀 있는지는 보지 않았다. 열이 받든 부끄러워지든 둘 중 하나일게 뻔하니까.
“헤프닝일 뿐이야. 너도 내일 있을 작전에 신경 써.”
“하지만 사소한 거 같아도 이런 거 잘 관리 해 줘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야. 무엇이 더 중요한지 생각해.”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오진혁의 말대로 완전히 무시할 순 없을 게 뻔하다. 다만 지금은 더 중요한 곳에 신경을 쏟아야 할 때다.
“다들 경험이 적어. 상상으로 하던 외계의 침략이 실제로 시작된 셈이니까. 그래서 다들 익숙한 방식으로 생각하려고 하지. 그런데 그러면 안 돼. 생존 경쟁에서 한 번 밀리면 그걸로 끝이야.”
종교를 믿는 일부 사람들은 지금 이 일련의 상황들이 신이 부여한 시련이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지금 이 상황이 누군가가 즐기는 게임과 같다고 했다. 딱히 가능성이 낮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만약 그 가설들이 사실이라면 결국 이 모든 것은 설계를 바탕으로 목적을 가지고 짜여진 일종의 프로그램이라는 것.
그러나 도움 없이 방치되는 이상 시련과 게임은 그저 그 안에 속한 우리에겐 재앙일 뿐이다. 루시가 성공해 낸 진화와 신병기들에 안일하게 대응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마계 영주들이, 지금 우리와 다를 게 뭐지?
***
“창현 씨는?”
“형은 다른 회사 사람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온데요.”
그날 저녁. 호텔방에 있던 이지연에게 오진혁이 홀로 찾아왔다.
명상을 하던 중이라 눈을 감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는 오진혁이 들어와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데릭 크레이브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저, 전 정말로 괜찮아요.”
“그러면 다행이야. 다만 방금 한 말은, 내게 한 말이기도 해.”
묘한 그녀의 분위기에 쭈뼛거리던 오진혁이 움찔했지만 이지연은 태연했다.
“데릭 크레이브에게 배신당했을 때. 그가 네 목에 무기를 겨누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건 분노가 아니라 절망이었어. 내가, 결국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이지연은 굳이 오진혁에게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함께 싸울 동료였으니까. 나이 따위 전장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자신을 동료로 대해 주는 그녀에게 오히려 고마워했다.
“이번엔 그런 상황 만들지 않을게요.”
그렇기에 눈치를 보며 최대한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날은 그 이상한 괴물 덕에 살았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 그 괴물, 안 잡혔죠.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고.”
“나는 그 괴물을 나쁘게 보지 않아.”
“그, 그렇죠. 어쨌든 우리를 구해 줬으니까. 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저희가 입을 다물어서.”
“그것이 안타깝지만 나는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 줄 거라 생각해.”
이미 그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지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믿음은 굳건했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목숨은 물론 다른 이들의 목숨까지 구해 주던 모습을 보며 키워 온 신뢰였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더 만들고 싶지 않아. 그 괴물은 우리의 수호신이 아니야. 분명 자신만의 일이 있으니까. 때문에 더 강한 힘······ 그게 필요해.”
이지연이 슬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순간 그 검은 눈동자에, 황금빛 빛이 일렁거렸다.
[굳건한 믿음과 의지, 그것이 네 힘이 될 것이다.]
그녀의 뇌리에 남들은 들을 수 없는 그녀만의 별이 해 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