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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09화 (109/200)

< 109화-군단 (9) >

109화-군단 (9)

“리암은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되도록 충돌하지 않게 다른 쪽으로 가죠.”

“다행이네요. 지휘부에 그렇게 하자고 전해 주세요.”

같은 소속으로 꾸준히 활동해 온다면 모를까, 전 세계에서 모이는 각성자들이 제대로 합을 맞춰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결국 대형 던전 공략의 주력은 현지 군대와 현지의 각성자들이 맡을 수밖에 없고, 이렇게 소집된 이들은 간단한 임무만 맡으며 개인이나 팀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마음만 먹으면 굳이 리암이랑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지연 씨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은데.”

방을 나온 나는 묘한 기분에 피식 웃었다. 고작 몇 시간 차이인데 뭔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지연은 언제나 평온함을 유지하는 편이라 도통 그 속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정작 겉으로 보이는 요소만으로 상대방의 감정이나 거짓말을 기가 막히게 읽어 내던 루시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이지연에게선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눈빛을 보고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이야. 그냥 직감일 뿐이지만.”

물론 나도 확실히 아는 건 없다. 딱히 캐 낼 필요는 없으니까 무시할 뿐이지. 곧 자정이 넘어가며 완전히 밤이 되었고, 우리가 던전 내부로 들어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일렁이는 공간의 균열을 통과하는 이 기묘한 감각,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곳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세상과 환경. 하늘은 보라색이고 땅은 거무튀튀하다. 허공에는 해괴하게 생긴 암석으로 된 섬들이 중력을 무시하고 둥둥 떠 있는 등. 루시가 있는 마계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기괴한 곳이다.

***

“크게 두 가지 길로 나누어져 적들을 공격한다고 합니다. 군대가 화력을 퍼부어 적들을 무력화 시키는 동안 각성자들은 군대를 지키며 자리에서 버티고 목표치를 달성하면 다 같이 돌진한다는 계획.”

내부에 구축한 베이스에 도착한 이후 이제는 역으로 이지연이 자기가 들은 작전 내용을 내게 말해주었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외계의 괴물 군단과 벌이는 전쟁. 덕분에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점차 데이터가 쌓여 가며 나름 상대법이나 전투법 등이 발달하는 중이다. 그 방법 중에는 현대 화기로 무장한 군대와 초인들인 각성자들이 함께 싸우며 시너지를 내기 위한 방법도 포함된다.

“듣기만 하면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작전이긴 합니다만.”

현지 군대가 여유로울수록 이론적인 난이도는 더 떨어진다. 말 그대로 포탄과 미사일을 미친 듯이 퍼부어서 최대한 타격을 입히고 잿더미로 만든 이후 점령하면 된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 줄 리는 없으니 막상 작전이 시작되면 놈들의 대응에 따라 또다시 움직임을 바꿔야 할 것이다. 데이터가 쌓였다고는 하지만, 역시 아직 부족하다.

“오랜만이군. 한국의 이지연.”

“어, 어째서······.”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아니, 마주친 것도 아니다. 먼저 들어가서 답사중이라던 그가 소식을 듣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 직접 우리를 찾아온 게 분명하니까.

“함께 싸울 사람을 보러 오는 게 이상한가? 그것도 당신 같은 유명인이라면.”

선글라스 너머로 눈일 빛낸 리암은 당황한 그녀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함께 싸운다고요? 당신은 그날도 남들을 무시하고 앞만 보고 달렸죠. 사람들이 죽든 말든 그저 적을 죽이기 위해서.”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야. 당신이 그 커다란 방패를 들고 사람들을 지킨다면 나는 검을 들고 적을 죽이는 게 일이니.”

평소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는 그녀가 언짢음과 거부감을 명백히 표현했지만 그는 불쾌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으며 넘겨 버렸다. 자존심 강한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 신기한 경우였다.

“사람이 좀 변한 거 같기도 하고요.”

처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오진혁이 흥미를 가질 정도였다.

“저희는 속한 조도 다릅니다. 이렇게 잡담을 나눌 시간은 없어 보이는군요.”

“매정하군. 나는 한국이랑도 인연이 있는데.”

“당신이?”

“지금 한국에 분명 그 괴물이 있으니까. 최근에 큰 부상을 입었던 각성자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지?”

그런데 그 순간,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코드 x.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몇몇 이들은 독특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로 추정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나는 그놈을 반드시 잡고 싶거든. 잡아서 으깨고 베어 죽여 버려야해.”

뜬금없이 내 이야기를 꺼낸 리암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진득한 분노와 살의, 이지연은 물론 옷으로 위장해 내 몸에 붙어있는 나노·오메가도 움찔할 정도였다.

“······지금 이 행위, 위협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이지연도 더 이상 참지 않고 화를 드러내었다. 안 그래도 굳어 있던 얼굴이 더 굳을 정도로.

“난 이곳저곳 헤집고 다니는 괴물을 욕했을 뿐이야. 어쩌면 이곳에도 나타날지 몰라서. 그런데 왜 당신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장난은 집어치우세요.”

“놈은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었지. 그 목적도 정체도 모르고 아직 정보도 적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어. 바로 당신. 유일한 접점은 바로 당신이야.”

리암은 그녀의 위협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선글라스 너머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나는 유일한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아.”

“웃기지도 않는······.”

“이제 여기까지 하시죠. 시간도 없습니다.”

결국 내가 금방이라도 싸움이 붙을 것 같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지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끼어든 내 눈이 리암과 마주쳤다.

“넌······.”

“앤더슨 씨 논리대로면 그 자리에 있던 건 저도, 여기 있는 오진혁 군도 마찬가지니 모두가 가능성이죠. 엿들은 바로는 근거가 상당히 빈약하니 오늘은 그만 가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사실 나서기 싫었다. 이지연을 내세우는 이유는 그녀가 나대신 이목을 끌며 탱킹하기를 원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만약 이번에 마주친다면 죽여 버리겠······ 아니, 반드시 이곳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 와중에 루시는 화를 내며 리암을 처단하겠다고 분노했다.

***

“어디 갔다 오십니까?”

“확인하고,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출동 준비를 마친 부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 온 리암은 멍한 얼굴로 차량에 올라탔다.

“확인이라니요?”

“당신은 알 것 없어. 샘.”

그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정보국의 요원을 흘끔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샘이라는 애칭으로 활동하는, 얼마 전부터 그의 전담으로 붙은 젊은 여성 요원이었다.

“한국의 각성자인 이지연과 인연이 있었습니까?”

“이런 미친. 비밀이란 게 없나, 나는?”

어딘가로 통신하던 그녀가 전말을 알고 리암에게 대놓고 질문하자 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그냥 본 것뿐이야. 친해지면 좋았을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더군.”

사실 그가 이지연에게 다가간 건 자신이 쫓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지연은 애초에 성향부터가 리암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아쉽군. 사냥감으로 정한 건가 싶었는데.]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가 피식거리며 그를 비웃었다.

남들이 있을 때는 대꾸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어야 하는 처지를 알고 있는 그의 성좌는 틈만 나면 이렇게 그를 긁어 댔다.

“일이나 하지. 괴물놈들 몇 마리 찢어 죽여 버리면 답답한 것도 좀 풀릴 테니.”

“안 그대로 지금 출발합니다.”

목소리를 무시한 리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들이 먼저 출격하고, 그 뒤로 지상군도 일제히 적들이 있는 던전 중심부로 출동했다.

“어차피 폭탄을 퍼부을 거면 그냥 핵폭탄으로 싹 쓸어버리면 안 되나?”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괴물들이 가진 법칙을 무시하는 기이한 힘을 볼 때, 핵폭탄을 대응 불가능한 비처럼 퍼붓는 게 아닌 이상 일반적인 포탄을 지속적으로 쏟는 게 낫습니다.”

딱히 긴장 같은 건 하지 않은 리암은 샘과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대규모의 기갑병력이 위치에 도달하고 이제 막 자리를 잡으려는 때.

“노, 놈들이 먼저 움직입니다!”

던전을 지키던 적들도 가만히 앉아서 포탄을 맞아 주지는 않았다.

“다들 자리 잡으십시오. 아군이 포격할 수 있게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허, 많기도 하군.”

단숨에 급박해진 분위기 속에서, 차량에서 내린 리암은 정찰기가 제공하는 영상들을 보고 혀를 찼다.

하늘과 지상을 가득 채우며 달려오는 괴물들의 행진이 정확히 이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행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말 그대로 군단이네요.”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누군가가 한 마디 툭 던진 말이 그들의 머리에 선명히 박혔다. 하지만 리암의 눈에 가장 띄는 것은 다양한 괴물들이 뒤섞인 저 거대한 무리를 이끌며 허공을 날아오는 하나의 개체.

마치 검처럼 생긴 무기를 들고 있는 그것을 본 리암은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상대할 적이 나타났다.

***

“······저거 조금 걱정되는데.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데이터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예측해 보면, 그렇게 압도적으로 밀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넌 묘하게 여유롭네.”

서로를 제거하려는 두 군세가 부딪히려 할 때.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모습을 감추고 은밀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존재가 있었다.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적들이 은거지를 떠나 몰려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빈집에 들어가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이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침략종들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서서히 단계를 밟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제약이 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루시는 침략종들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이 힘을 숨기고 있음을 확신했다. 지금의 자신이 참고할 만한 전술과 병종들을 부리는 수준의 군단이 굳이 비효율적인 병종들을 양산하여 무식한 전투를 벌일 이유가 없으니까.

“제약이라.”

그는 루시의 추측을 듣고 침음했다.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보편적인 상식으로 각성자들의 상태창과 게이트, 던전은 대립하는 요소들이다.

상태창은 사람들에게 싸울 힘을 준다. 반면 게이트와 던전은 괴물들을 뱉어 내며 세상을 위협한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게이트와 던전이 오히려 저 괴물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내리지 않게 막아주는 억제기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르겠다. 일단, 사람들을 믿고 할 일부터 하자.”

슬며시 땅에 착륙한 그의 눈앞에 침략종들이 지키고 있던 요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요새 주변을 뒤덮고 있는 검은 생물체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평범한 동물과는 조금 달라보였다.

“전송해.”

[주변에 적 반응.]

그는 그것을 루시에게 전달하려 다가갔다. 하지만 모든 적들이 요새를 버리고 뛰쳐나간 것은 아니었다.

[지구인들이 상급종이라 부르는 신종 중 하나, 맨티스입니다]

양 팔의 갈고리 발을 들어 올리며 붉은 안광을 빛내는 암갈색 갑주를 두른 괴물과, 가슴팍에서 큼직한 외눈을 끔벅이는, 검은 가죽으로 전신을 두른 괴물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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