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군단 (11) >
111화-군단 (11)
“이 괴물놈들이······.”
[어쩌겠나. 너희의 힘이 아직 약한 것을.]
“시끄럽다!”
화를 토해낸 리암은 앞으로 내달리며, 자신을 방해하려는 적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기고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다.
아군이 밀리고 있지만 딱히 적들에 대한 화는 아니었다. 그냥 이 상황 자체에 대한 분노, 그리고 좀처럼 쉽게 적을 쓰러트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저 멍청한 여자.’
그런 그의 눈에 신종 상급종의 출현에 위기에 처한 이지연의 모습이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그녀가 성좌의 힘을 빌린, 황금의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아 낸 순간에는 그도 눈을 크게 떴지만 그럼에도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괴물! 뒤져라!”
땅을 박찬 리암이 이제 모든 힘을 다한 이지연을 마무리하려는 그 순간, 검을 휘둘러 적의 어깨에 그대로 검을 박아 넣었다. 검이 닿기 직전, 적은 붉은 에너지 방어막을 몸에 둘렀지만 그의 검은 더 강한 힘으로 그것을 부쉈다.
“큭.”
하지만 방어막에 방해를 받은 덕분에 예상과 달리 적의 몸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그의 검에도 단번에 베이지 않고, 가슴까지만 파고들었을 뿐이다.
이 신종 상급종은 팔을 들어 자신의 몸을 베어낸 리암의 몸을 붙잡았다. 동시에 쩍 갈라진 흉갑, 그 사이에서 빛나는 강렬한 에너지 핵이 이제는 리암을 향해 그 힘을 응축해 쏘아내려 했다.
‘이런 망할. 부족했다고?’
역으로 당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방금 전 그 광선포가 쏘아진다면 지금의 자신은 견딜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안 돼!”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지연이 다급히 외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세상을 침략하는 이 괴물들은 망설임 따위는 없다.
“너······.”
상급종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이내 수박 터지듯 터져 나간 것이 그때였다. 뒤에서 덮쳐들어 검은 갑각으로 된 검을 휘두른 존재는 전신을 검은 슈트 같은 가죽과 갑각으로 두르고 있는 또 다른 괴물.
붙잡은 손이 놓아지자 리암은 몇 미터 아래로 추락해 내렸지만, 함께 추락하던 상급종의 몸에 손을 뻗어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든 검은 괴물, 코드 x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사라져 버렸다.
‘역시 저놈이었다!’
바닥에 추락한 리암은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서둘러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이미 주변에는 자욱한 연기와 먼지, 비명과 고함만 가득했다.
***
[손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거야? 포기해. 그리고 어쨌든 리암이 이지연 씨를 구해 주었으니 그걸로 퉁치지 뭐.”
[방금 전송해 주신 신종의 분석도 함께 진행하겠습니다.]
리암이 비틀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순간. 이미 하늘로 올라 전장을 빠져나온 그는 다시 지상을 지켜보며 이지연과 리암이 구출되어 후방으로 이송되는 것까지 확인했다.
“이제 돌아가자. 의심받지 않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죽어가는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가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여기까지임을 확신했다.
“이 패배는 좀 쓰리네. 다들 무조건 이길 거라 생각한 것 같은데.”
게이트로 방어전을 치르는 인류가 침략종에게 선전포고하는 던전 공략전은 이번에는 패배로 끝났다. 물론 적들도 포격 등에 피해를 많이 입었겠지만, 적들은 일부 병력이 좀 상한 정도로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반면 인류는 고등급의 각성자를 포함, 소모된 자원과 희생당한 병력의 손해가 막심했다. 어지간하면 성공하던 공략전의 승률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신종들이 등장했을 때.
그는 각성자들 역시 한 단계 올라서지 않으면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직감했다.
“네 생각이 궁금해. 네 말대로 침략종들은 네가 이끄는 마왕군과 비슷한 면이 있어. 그런 이들을 우리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수집된 데이터로만 판단했을 때, 지구의 화력은 충분합니다. 지구인들이 생산하는 화기의 화력만큼은 이쪽 세상의 군대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각성자들의 힘이 부족합니다. 경험도, 출력도 모두 부족합니다]
몰려드는 군단을 저지할 화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 군단에 섞여서, 내부에 침투해 아군의 화력 전개를 방해하는 소수 정예들의 힘이 그것을 막아야 할 각성자들보다 강하다. 그것이 루시가 지적한 문제였다.
[번식 사이클을 돌려 진화를 이루며, 단기적인 학습 능력도 그리 좋지 않은 인간들에게 단숨에 엄청난 경험을 주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지.”
[이쪽 세상의 존재들이 그것을 극복한 것이 바로 레벨을 이용한 성장의 권능. 그런 것이 없다면 경험과 출력 모두 밀리는 지구의 인류는 머지않아 멸종할 것입니다.]
루시는 냉정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우리의 종말을 예고했다. 그 계산의 정확함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나는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제가 개입해야 합니다.]
“맞아. 그래서 일 처리는 잘 돼 가?”
나 역시 전과는 달리 현실이 더 암울해질수록, 점차 우리에게 남은 희망이 사라질수록 루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합니다. 만날 수 있습니다. 곧.]
과연 루시는 그걸 알까? 그 목소리는 언제나 똑같았지만, 나는 어째 우리가 이번에 패배한 것을 기뻐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
“기분이······ 좋군요.”
“네?”
“제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곳도, 저곳도.”
마왕군의 둥지 중 하나, 루시와 함께 있던 김서윤은 루시가 대뜸 입을 여니 당황했다. 루시가 자신과 이야기하는 한편 동시에 창현과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시가 웃음까지 보이니 더더욱.
“저쪽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굳이 관심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혹시 지구에 있을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하는 김서윤의 입을 손가락으로 막은 루시는 다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 모든 기쁨을 진정한 행복으로 개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제가 그곳에 갈 수 있어야 하는 법. 그것을 위해 이번에 습득한 새로운 기술은 우리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킬 것입니다.”
루시는 새로운 생물체가 대량으로 배양되고 있는 생산장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새로 공급받은 표본을 어렵지 않게 분석한 루시는 이제 그것이 가지고 있던 힘을 고스란히, 아니, 더 강화해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버, 버섯이 광합성을 한다니 믿기가 힘드네요. 심지어 그걸 우리의 적인 침략종들이 이용하고 있었다고요?”
“저는 광합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것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식물체가 가진 세포들은 직접 분석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새로운 양분 공급을 담당할 이 버섯들은 태양광을 양분으로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시는 생산장 내부의 촉수를 조작해, 높게 떠오른 마계의 태양을 향해 그 머리를 쳐든 버섯에 더 많은 양분을 투입시켜 성장을 가속시켰다.
루시에게 세포 단위로 개조되기 시작한 이 버섯들은 유전의 한계를 벗어나 기존의 크기 몇 배 이상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로 성장시켜야 투자한 값 대비 가장 효율적인 양분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며 알아내긴 해야겠지만, 만약 이것들로 점령한 땅 전부를 뒤덮을 수 있다면.”
루시에게 모든 양분이 착취당한 땅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땅이다. 그런 광활한 평야와 산 전체에 이 버섯을 심어 양분을 생산하게 할 수 있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거의 비교 불가능한 양임을 깨달은 루시는 이미 전 병력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조금의 비는 공간도 없이 활용할 수 있게.
“마계 지렁이로부터 토양의 에너지를 착취하는 법을, 화염포식자로부터 열을 착취하는 법을, 이제 빛을 착취하게 되었으니······. 정말 이 마계 전부를 덮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계의 절대 지배자 마왕.
본디 마왕은 마족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며 그들을 부리는 지배자였지만, 루시는 마족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들며 다른 의미로 진정한 마계의 지배자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
“해가 뜨면 놈들에게 발각될 수 있으니 조금 더 빨리 날 수 없소?”
“캬악! 이게 다 네놈들이 무거워서 그런 것 아니냐!”
이제 막 저 멀리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시점. 아직은 어두운 하늘 속을, 한 무리가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등에 한 명씩 누군가를 태운 채 퍼덕퍼덕 날갯짓을 하고 있는 이들은 피막에 덮인 날개 팔과 얇은 몸을 가진 마족인 가고일들. 그리고 그 가고일들 위에 올라탄 이들은 무장한 오크들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그들은 북부에서 이곳까지 내려오게 된 갈색 오크들이었다.
“놈들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오. 정찰은 필수지.”
“그러면 전선 근처만 살피면 되는 것을 왜 안쪽까지 들어가려는 것이지?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는다는 것, 이미 알고 있지 않나.”
“······혹시 모르지. 놈들은 그 능력이 대체 어디까지 닿는지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오. 우리와 싸울 때와 지금 놈들은 전혀 다른 괴물들이오.”
가고일과 이야기하던 정찰대의 리더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흑갑의 괴물들에게 방심은 극독이다.
“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 진절머리를 친 가고일이 입을 다물었고, 그렇게 계속된 활강 끝에 그들은 치열한 전장이 펼쳐진 중부 지역을 넘어 흑갑충들이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은 북부 지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저게 대체 뭐지?”
“뭐가 이렇게 잔뜩? 나무인가?!”
흑갑충들이 점령한 곳은 곧 메마른 황무지가 된다는 상식을 부수는 광경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드넓은 평지도, 좁은 협곡도, 울퉁불퉁한 산맥도 모조리 뒤덮어 자라나고 있는 검은 무언가.
그들은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완벽히 일정한 간격으로 조금의 빈틈도 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저 거대한 물결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노,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하오.”
“돌아간다! 빨리!”
그들은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저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나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잠깐, 뒤에 저건, 설마.”
하지만 온전히 도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이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한 때, 빼곡하게 자라나 있던 검은 숲에서 무언가 대규모로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설마, 저게 다.’
한눈에 다 담기도 힘든 엄청난 숫자의 비행종 군단.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거대한 군세가 그들을 향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