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군단 (12) >
112화-군단 (12)
[중부 전선은 적당히 압박만 주어 움츠러들게 만들며, 지금처럼 소모전을 이어 나가 적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집중하고 본대는 다른 곳으로 돌리겠습니다.]
“엘프들의 세상, 그곳으로 가려고?”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 대규모의 비행종들이 적들의 정찰병으로 보이는 이들을 휩쓸어 버리는 모습과 함께 루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건네준 새로운 표본. 루시가 태양버섯이라 이름 붙인 그 생물체는 우리의 바람대로 루시의 새로운 양분 보급 체계가 되었다. 그것도 태양광이라는 마르지 않는 자원줄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꽤 사기적인.
태양 빛을 받지 못하면 쓸모없이 양분만 소모한다는, 현대 태양광 발전과 비슷한 단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루시는 그딴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마어마한 면적 전체를 전부 버섯의 숲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비효율적인 면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를 베타 버전 이상으로 개조하여 양분을 생산할 수 없을 때는 극단적으로 휴면시켜 양분 소모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빛을 효율적으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우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럴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더 자유로워지겠지만 지금은 힘들겠지.”
[우주······.]
피식 웃은 내가 무심코 흘린 말 한마디에 루시가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아직 루시는 자기 주변도 다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필요에 의해 다른 곳에 또다시 손을 돌리려 하니까.
“지금은 당장의 일에만 집중하자고. 엘프들을 공격할 계획, 그걸 조금 자세히 듣고 싶은데.”
루시가 배신자인 마족들과 싸우는 것은 일종의 숙명이자, 터전을 두고 벌이는 일종의 생존경쟁. 그렇기에 나 자신도 아무 생각 없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처럼 다른 곳을 침공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과거라면 조금 꺼려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이득을 위해 남을 침략하여 잡아먹는다는 것이니까.
“한번 시작한 이상 끝을 보자.”
[그렇습니다. 투자한 양분이 너무 큽니다. 설령 차원 이동의 술식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세상을 점령하고 소모된 양분을 보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우리에게도 여유가 없다. 지난번 루시에게 태양버섯을 전해 주기 위해 던전 공략에 참여했을 때. 나는 우리가 처참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다.
이지연은 물론 리암조차 죽을 뻔했다. 내가 보기엔 모든 생물체의 유전 정보를 자유롭게 다루는, 완전 생물에 근접해 보이며 루시가 자신보다도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진정한 괴물들.
그들을 막아야 한다. 막지 못하면 나는 물론 내 주변 모두가 죽는다. 그리고 그걸 위해 루시가 다른 이들을 침공해야 한다면, 나는 결국 우리의 목숨과 그들의 목숨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사냥하는 수밖에.
[엘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관여하지 않는 북쪽 대수림. 그곳에 특별한 주술로 공간을 단절시켰다고 라온이 진술했습니다.]
“공간의 단절?”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마치 던전과 비슷합니다.]
루시는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엘프들을 공격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던전이라는 말. 그 말에 놀란 내 눈이 살짝 커졌다.
[엘프들은 오래전 인간계와 연결을 끊고 그곳에서만 살아갑니다. 라온 같은 방랑자가 굉장히 특이한 경우로, 그들은 인간들에게도 마계에도 관심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던전······이라는 말은 좀 흥미롭네. 혹시 병력의 숫자라던가 이런 건?”
라온이 루시와 싸우는 모습을 봤다. 만약 루시가 라온을 그의 정령과 분리시키지 않았다면 쉽게 제압하기 힘들었을 정도의 강자.
그런 이들이 수두룩하다면 전쟁이 불가능할 것 같은데.
[라온은 엘프종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증언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힘은 성녀 이벨리아가 부여한 성장의 권능으로 증폭된 힘, 대부분의 엘프들은 자신보다 현저히 약하며 기껏해야 인간들 수준일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뭐, 그러면 어렵지 않겠네.”
[해당 증언을 바탕으로 이번 작전에 투입할 아군의 병력들입니다. 단기 접전으로 완전히 저항을 무너뜨리고 완전히 굴복시킬 생각입니다.]
루시는 화면을 전환하여 현재 출격 준비 중인 군단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런 모습을 보면 루시도 침략종에 밀리지 않는다.
“많, 많긴 하네?”
화면 처음부터 저 끝의 하늘에까지 무수히 떠 있는 초거대 비행종 아일랜드·알파. 몸길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저것들은, 내부에 대량의 병력을 수송하는 수송체.
그리고 그 아일랜드·알파를 호위하는 빼곡하게 많은 비행체는 아일랜드·베타. 루시가 수송체를 호위하기 위해 설계해서 만든 소형의 호위병들이다. 하지만 소형이라 해도 몸길이 수십 미터. 거기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비행종들이 그 곁을 함께 날고 있었다.
[엘프족의 추정 개체 수는 90만 남짓, 이번에 아군이 동원하는 총병력의 수가 100만.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를 것입니다.]
루시는 칼을 갈았다. 어찌 보면 지금 마족들과 싸우고 있는 곳보다 더 신경을 쏟은 것이다.
[병력을 출진시키겠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 그들의 영역에 도달하면, 다른 이들이 눈치챌 틈도 없이 그들의 차단막을 해제하고 공습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내가 결국 최종 승인을 해 주고 말았다. 일제히 고도를 올리기 시작하는 거대한 생물들이 구름보다 높이 날아, 이제 대륙 반대편에 있는 땅을 공격한다.
엄청나게 죽어 나가겠지. 하지만 마왕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세포 하나라도 살아있다면 죽은 게 아니니까. 하지만 우리의 적들은 다르다.
아무리 처절하게 싸워도, 저항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
역시나 이번에도 나는 루시에게 공격당하는 이들을 지구에 있는 우리와 겹쳐 보았다. 밀려오는 괴물들과의 사투. 어찌어찌 버틸 수 있다는 덧없는 희망.
결국 남는 것은 잔혹한 학살과 잿더미뿐이라면, 나는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게 생물의 본능이니까.
“하지만 김창현 님, 저희의 이상을 위해 또 다른 결단도 필요합니다. 현재 미 정부와 협력하고 있으며, 미국인 중 하나를 여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교단 세력과의 충돌은 가능성 높은 사실. 만약 양립이 불가능하다면 그들도 공격해야 합니다.”
“그, 그건 일단 조금 지켜보자.”
게다가 아직 남은 문제도 있었다. 지난번 루시가 사로잡은 두 성기사를 심문해 알아낸 사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교단 측과 지구 쪽의 연대가 강해진다는 것.
지구의 상황이 안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도 이쪽 세상과 손잡는 데 진심이었다. 이미 마왕군에 대해 아는 그들이 훗날 우리를 적대한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우리가 더 빠르면 돼.”
결국 같은 적을 두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우리의 적이다. 충돌할 가능성은 높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과의 전면적인 전쟁은 피하고 싶었다.
***
“비행 과정 아무 이상 없음, 속도 정상, 고도 정상, 이대로라면 약 3일 22시간 11분 후 대수림 상공에 도달합니다.”
“······.”
“기대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당신의 동족들이.”
대량의 병력을 휴면 상태로 탑승시킨 초거대 수송체 아일랜드·알파. 그곳 중 하나에 자신의 육체를 탑승시킨 루시는 비행 상황을 살피며 뒤를 흘끔거렸다.
대답이 없는 그곳에는 조금 특별한 개체 하나가, 굳은 석상처럼 서 있을 뿐이다.
“그곳에 가서,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동족들을 전부 죽이는 것. 그것이 내 보복.”
히죽 웃은 루시는 손을 튕겨 그 특별한 개체의 얼굴을 덮고 있던 투구를 벗겼다. 그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얼마 전, 루시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라온.
그러나 이제 그는 루시를 보고도 화를 내거나 욕을 할 수 없다. 이미 그의 몸 전체가 루시의 손아귀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루시는 굳이 비효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괴롭히려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엘프·감마.”
그의 몸을 틀어쥐고 있으면서 그가 느끼는 감정은 전부 알아챌 수 있는 루시는 더더욱 입꼬리를 비틀며 이내 다시 그의 투구를 올려 버렸다.
이제 정말로 머지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한발 다가간 것 같았으니까.
“나름 빠르게 알아차린 것 같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난 것이 약 사흘. 사흘을 높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온 루시는 이끌고 온 군단의 고도를 낮추게 만들었다.
아직 목적지까지 거리가 조금 남았지만, 엘프들은 마왕군이 대수림에 진입한 순간부터 이변을 눈치챘다.
“하늘이다! 하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루시의 예상대로 미리 이변을 알아챈 엘프들은 이례적으로 차단막 밖으로 몰려나와 대응 체계를 갖추었다.
하지만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그 누구도 지금 저 먼 하늘에서 몰려오는 괴수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지 못했다. 대전쟁 이전부터 다른 세상과는 연락 자체를 끊은 데다 유일하게 소식을 전해주던 라온까지 없어지니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던 탓이다.
“적······입니까?”
“나도 모른다. 하지만 감히 우리의 허가 없이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이 적! 지금까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었느니라.”
상대적으로 젊은 엘프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줄 어른들에게 의지했지만, 그들 역시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것이 사실.
결국 그들은 별다른 대책 없이 일단 하던 대로 방어 준비를 끝마쳤다.
“마족들 중 하늘을 나는 놈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런 놈들이 아닐지.”
“대전쟁은 끝나고 인간 놈들끼리 치고받기 시작했다고 들은 것뿐인데······. 마족들이 여기까지 넘본단 말인가?”
그저 추측만 하던 그들은 하늘만 주시했다. 사실 아는 것도 하늘을 통해 다수의 무언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보인다!”
“잠깐, 저건 설마······.”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이 바람 정령을 통해 통보한 경고와 위협을 모조리 씹어 삼킨 침략자들이 자욱한 구름을 뚫고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저게 대체 뭐······.”
그 누구도 그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광경.
구름을 부수듯 뚫고 태양 빛과 함께 들어오는 검은 갑주의 초거대 생물체들이 일제히 대수림을 향해 진격해 왔다.
“자, 장로님!”
“뭘 멍하니들 서 있나! 저것들은 지옥의 괴물들이야! 공격해!”
기겁한 장로가 공격 명령을 내렸고 곧 무수히 많은 공격이 하늘을 역행하며 몰려드는 마왕군에게 뿜어졌다.
그러나 루시는 그것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대한 강심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아일랜드·알파의 방어막을 작동시켰다.
“이제 마족들도 이렇게 무식하게는 싸우지 않는 것을.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 그 자체입니다.”
한 점에 집중되지 못하는 그 힘을 루시가 비웃음과 동시에, 알파를 호위하던 아일랜드·베타들이 비행종들과 함께 일제히 지상을 덮쳐 포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