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군단 (13) >
113화-군단 (13)
“이, 이럴 수는······.”
맹렬하게 퍼붓던 공격이 어느새 사그라졌다. 자신들의 공격이 초거대 생물체가 가진 방어막을 뚫어 낼 수 없음에, 압도되고 절망한 것이다.
“당신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그게 궁금한 겁니까?”
“하, 그래.”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루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라온을 돌아보았다. 가까스로 목소리의 자유가 허락된 라온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숨길 수도 없으니 루시의 비웃음을 결국 긍정해야 했다.
솔직히, 루시에게 붙잡힌 이후로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루시가 이끄는 마왕군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체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성장했는지 등등. 루시와 마왕군은 정말로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존재들이었으니까.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많은 마나를 쌓아도 결국 육체 면적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고작 2m도 안 되는 몸보다는 이렇게 수백m 단위의 거체가 품을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어차피 라온의 모든 것은 지금 자신의 손 안에 있으니 루시는 딱히 숨기지 않고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루시가 승리를 장담한 가장 큰 이유는 체급의 차이. 양분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여 투자하고 절제할 수 있는 루시는 전장에 투입할 에너지양도 본인이 조절할 수 있었다.
초거대 생물체가 견딜 수 있는 특대형의 강심은 엄청난 출력을 뿜어내었고 이 출력에 대항할 기술이, 엘프들에게는 없었다.
“마족들은 나름의 집단 전술을 고안하고 실행해서 아군의 공중 포격에 상당한 대항 능력을 갖추었을 거라 예상되지만, 엘프들은 아닙니다. 고이고 썩어 가면 진화는 멈추고 퇴보할 뿐. 그렇다면 도태하고 멸망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입니다.”
엘프들을 비웃은 루시는 돌진한 호위체들에게 전방위적인 포격을 명령했다.
작다지만 수십 미터 길이에 수천 톤의 무게를 가진 호위체들 역시 품에 크고 강한 강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들은 루시가 총기를 본따서 만든 광선포를 체내에 장착해 집속한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었다.
“그게 대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 생물인가. 그저 전쟁만을 위해 만들어 병기거늘.”
“맞습니다. 모든 개체는 그저 효율적인 전투를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탄생하고 존재하니 모든 것은 단 하나, 그분을 위해.”
라온은 마왕군의 포격에 발에 짓밟히는 개미처럼 떨어져 나가는 동족들의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루시는 오히려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손으로 하늘을 가리킬 뿐. 이 모든 것이 오직 단 하나의 존재만을 위한 것이라는 루시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라온의 눈이 흔들렸다.
“대체 그분이 누구냐. 끔찍한 심연의 마왕, 네가 섬기는 자는······ 설마.”
“제 주인일 뿐이지만 현지인들은 다늘 그분을 마신이라 불렀습니다.”
루시는 라온에게 창현의 존재까지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그 이유도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놀라고 절망하는 표정과 감정이 너무나 중독적이었기 때문이다.
***
“안 돼! 놈들이 우리의······.”
일격에 초토화된 대수림. 불타는 나무와 식물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뒤집어진 땅에는 동물들은 물론 엘프들의 시신이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포격은 신입 전사도 일족의 장로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와중, 하반신이 완전히 사라진 한 엘프 전사가 부들거리는 팔을 허우적거렸다.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포격 한 번으로 끝나 버린 전쟁이라는 게 큰 충격이었다.
“차단막을 해제합니다. 김서윤, 나서십시오.”
하지만 루시가 이끄는 마왕군은 그딴 건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예나 지금이나 목적은 오직 엘프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그곳을 점령하고 그들을 짓밟는 것.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호위체 하나의 위에 올라탄 김서윤이, 가면을 쓴 채 손에는 궁니르를 들고 반투명한 차단막 앞에 섰다.
엘프들은 이 차단막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지만 루시는 이미 그걸 뚫어 버릴 계산도 다 해 두고 왔다.
[궁니르ㆍ최대 출력 전개]
전체를 용의 심장을 압착하고 깎아 만든 궁니르를, 일종의 보조 동력 장치로 사용한 김서윤은 그 출력을 온전히 자신의 이능에 담았다.
상대의 마력 흐름을 강제로 조작하는 능력. 그것이 차단막을 덮치니, 침략자들에게서 내부를 보호하는 유일한 장벽인 차단막 전체가 요동쳤다.
“이것만은 안 돼!”
“차단막이 흔들린다!”
모여든 엘프들은 하늘에서 온 침략자들에게 흔들리는 차단막을 보며 경악했다.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오는 고대의 주문을 굳게 믿었지만, 이미 저 바깥세상에선 그들은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이 터진 상태였다.
“차단막이 붕괴하면 초토화될 때까지 포격을 연사.”
그 모습을 본 루시가 자신의 병력들을 준비시켰다.
차단막이 걷힌 이후 포격으로 완전히 짓누를 생각이었다. 대규모 병력을 실어 오긴 했지만 비효율적으로 굳이 그들과 근접전을 해 줄 필요 없으니까.
“이건.”
그러나 차단막이 완전히 흔들려 붕괴하려 할 때.
엘프들 쪽에서 변수가 하나 생겼다. 루시가 굉장히 싫어하는, 자신의 계산을 방해하는 변수였다.
“세계수께서!”
“이건 기적이오!”
반면 엘프들은 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튀어나온 변수를 기적이라 부르며 환호하고 기뻐했다.
흔들거리는 가지와 함께, 그들의 터전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로부터 거대한 에너지가 흘러 차단막을 강화했다. 그 뿌리의 끝이 곧 차단막과 연결되어 있는 세계수의 의지는, 무너 져가던 장벽을 다시 세우고 보수해 나갔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며 심은 묘목이지. 그러나 지난 세월, 세계수께선 단 한 번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셨는데.”
라온 역시 그 광경을 보며 놀랍다는 듯 탄식했다. 덕분에 루시의 얼굴만 구겨진 건 덤이다.
자신의 계산이 틀어지고 목적이 방해 받는다. 루시가 싫어하는 것들만 벌어지는 상황이니까.
“어, 어쩌죠?! 더 이상 열 수 없어요!”
“상관없습니다. 포격이 불가능하다고 싸울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세계수, 내부에서 그 거대한 나무를 불태우고 베어 버리면 그만이겠습니다.”
김서윤의 다급한 목소리에 루시는 계획을 수정하여, 포격을 준비하던 호위체들을 뒤로 물리고 수송체인 아일랜드ㆍ알파들을 전면에 배치시켰다.
아직 차단막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그 틈에 실어 온 지상군을 쏟아부어 내부에서 싸우겠다는 의지였다.
“감히 우리의 길을, 그분의 뜻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아일랜드ㆍ알파의 입이 쩍 벌어지고 루시의 눈앞에 차단막에 난 축구장 크기만 한 구멍들이 보였다.
그 안에 모여서 항전을 준비하는 엘프들 역시. 루시는 그들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똑같군, 너도. 그 여자와.”
“헛소리는 그만.”
“네년이 여신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이벨리아와 다를 게 뭐지?”
강습 직전 루시는 자신을 향해 일갈하는 라온의 입을 막아 버렸다.
누구와 비슷하다? 루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신이 아니니까. 애초에 루시에게 선악의 개념 따위는 희박하다. 그저 이득이 되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지, 누가 나쁘고 착하고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빠도 살려둘 수 있고, 착해도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다.
[강습 실행.]
곧 틈새를 통해 엘프들의 저항을 뚫고 수많은 마왕군이 내부로 몰려들었다. 루시 역시 그들 중 하나였고, 차단막 안에서는 곧 엘프들과 마왕군의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부 사살.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땅에 착지해 눈을 번득인 루시의 곁으로 수많은 마왕군이 뛰쳐나가며 저항하는 엘프들과 충돌했다.
그러자 엘프들이 부리는 정령들의 힘으로 대지가 뒤틀리고 나무가 꿈틀거리며 대기가 진동한다.
“이곳은 우리의 땅이다. 그 누구도 이곳에서 우리를 꺾을 수 없다!”
오랜 시간 이곳에서 살아온 엘프들은 정령들과 교감하며 이 대수림 전체를 자신들과 하나로 만들었다.
즉 이곳에서 엘프들과 싸운다는 건 이 드넓은 면적을 가진 대수림 전체와 싸운다는 뜻. 당연히 일반적인 상대라면 이 대자연과 싸워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못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부수고 먹어치우는 존재였다.
[아, 아아악!!]
“무슨 일이냐! 땅의 정령들이!”
이 대수림의 땅에 근본을 두고 있는 땅의 정령들 열심히 대지를 조작해 마왕군을 공격하던 그들은 일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아파! 독, 독이야!]
“독이라고?!”
당황한 엘프들이 기겁하여 허둥거렸다.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마왕군에게 점령당한 곳에서, 무언가를 땅에 뱉어 내고 있는 거대한 마수 개미들.
그 마수 개미들의 배는 엄청나게 부풀어 있었고, 그 뱃속에 든 끈적한 점액들을 대수림의 땅에 마구잡이로 뱉어 내는 중이었다.
“한 점에서 시작해, 곧 이곳 전부를 뒤덮을 수 있도록.”
대수림을 점령하기 위해 루시가 끌고 온 저 개미들은 둥지를 건설하는 건설병이다. 그들이 뱃속에 담긴 점액은, 루시가 세포 단위 마족인 나노를 한차례 개량한 병사들로, 통제 따위는 받지 않으며 오직 포식과 증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세포형 생물체들.
그것들이 대지에 파고들어 마구잡이로 포식하고 증식하니, 땅의 정령들이 비명을 질러 대는 것이다.
“이, 이런 사악한!”
루시의 의도를 그때서야 이해한 엘프들은 경악했다. 이 자연이 그 무엇보다 강하다고 여기는 그들의 상식으로는 그 자연마저 짓밟고 모든 것을 황폐화시킨다는 루시의 방식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이건 성전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건!”
당연히 그들은 분노하여 더 악착같이 싸웠다. 그들 역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기에, 마왕군과 마찬가지로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던졌다.
“······.”
루시는 자신의 행동으로 오히려 각성해 덤벼드는 엘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다 효율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그들이 공포와 망설임에 물들어 그대로 와해되고 침몰하길 바랬지만,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내 생각에, 그들이 널 두려워하게 만들려면 뭔가 다른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이.”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그는 루시에게 마왕군에도 변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루시의 모든 계획은 성공적으로 들어맞았다. 일단 상대가 루시를 상대로 상성이 좋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루시의 약점은 정보다. 루시는 상대에 대한 정보가 많고 자세할수록 더 강해지지만, 상대가 역으로 루시의 정보를 알고 대응했을 때는 순간적인 판단이 느려진다.
그런 상태에서 틀어박혀 살아가던 엘프들은 애초에 루시를 이기는 게 힘든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일대를 지배하던 존재들. 그들에게도 자신들을 하나로 묶을 강렬한 희망은 존재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저항했다.
“그러니 그 희망을 부숴.”
“엘프들의 세계수, 그 거목을 부순다면 아군은 유리함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수 주변에 둘러쳐진 강력한 결계는 여유롭게 작업하지 않으면 뚫을 수 없습니다.”
“네가 살려 둔 라온, 그를 써.”
나는 확률의 희박함을 언급하는 루시에게 라온을 써서 세계수를 무너뜨리라 지시했다. 대체 루시가 왜 굳이 지금까지 그를 살려 두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 루시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하는 상태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화면 속, 급박한 전장에 있는 루시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