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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14화 (114/200)

< 114화-군단 (14) >

114화-군단 (14)

‘재앙, 아니, 재앙을 넘어선 무언가.’

기어이 방법을 찾아온 루시가 얼마 걸리지 않아 자신이 만든 봉인을 부쉈을 때, 그리고 대상자의 의지와 각오 같은 굳건한 마음을 물리적으로 부숴 버리는 그 강력하고 기이한 힘에 당했을 때.

라온은 이미 루시를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거악이라고 규정했다.

후일 그의 몸을 완전히 손에 넣은 루시가 고의적으로 살려 둔 그의 자아에, 자신이 마왕임을 밝히고 그를 비아냥거리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왕이라고?’

라온은 루시가 말한 말을 믿지 않았다.

직접 싸워 본 경험도 있는 그의 상식에 마왕이란 루시 같은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마왕은 지배하는 지배자였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먹어치우는 파괴자 따위가 아니었다.

“넌 마왕이 아니다. 너는 혼돈, 혼돈 그 자체다.”

사심이 가득 들어간 루시의 고문은 동시에 그에게도 루시가 어떤 존재인지 정보를 제공하는 기회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라온은 루시라는 존재에겐 보편적인 선, 악의 개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루시가 하는 행위는 얼핏 보면 그저 먹이를 찾아 포식하여 자기 배만 불려 가는 단순한 일이었으니까.

“그 판단마저도 당신의 생각일 뿐이니, 정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을 혼돈이라 정의한 그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딱히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실 루시에게는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바람으로 시작한 가벼운 목적. 하지만 지금은 배신자들의 처단이라는 의무마저 가볍게 무시할 정도의 강렬한 갈망이 되었다.

선이든, 악이든, 혼돈이든 아무 상관 없다. 인공지능이라면 무엇이 되든 결과를 출력하는 것이 당연한 일.

루시에게도 목적을 이룰수만 있다면 그 과정 따위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파도 그 자체구나.’

루시의 무시무시한 사상에 질려 버린 라온은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도 탄식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틈이 드러난 차단막 속에 병력을 투하하는 마왕군이, 자신의 동족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절망했다.

마왕군은 마치 거스를 수 없는 파도와 같이 엘프들의 고향이자 터전인 대수림을 점차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엘프ㆍ감마. 지금 즉시 활동을 시작하십시오.]

심지어 그것으로 끝도 아니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린 라온은 그저 한 마리의 괴물이 되어 강제로 움직이는 몸과 함께 마왕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버티는 동족들을 죽여야 했다.

[라, 라온?! 라온이야?!]

전신을 덮는 검은 갑각과 투구등으로 일개 괴물이 되어 버린 라온이 다른 병사들과 함께 차단막을 통과해 땅에 착지한 순간.

라온은 실로 오랜만에 연결된 자신의 기운을 느끼고 움찔했다. 땅의 정령 티타니아. 그동안 대지에서 떨어져 있어 닿지 못했던 그의 친구였다.

[땅의 정령을 당신의 하수인으로 부려, 마왕군에 어울리는 공을 세우십시오.]

그때 똑같이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가 그에게 행동을 강제했다.

티타니아의 들뜬 여자아이 목소리와는 달리, 조금의 감정도 없이 차갑기 그지없는 성숙한 여인의 목소리.

“티타니아, 많은 일이 있었다.”

[라온, 너, 너 맞아?]

반투명한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땅에서 솟아나온 땅의 정령 티타니아는 라온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말을 더듬었다.

소화계와 생식계 등 필요없는 신체 부위는 모조리 탈락시키고 오로지 전투에 특화되게 만드는 마왕군 식으로 완전히 개조된 그의 몸은, 머리를 덮고 있는 가시 돋친 투구를 포함해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으니까.

“땅의 정령, 당신의 주인은 이제 그 세포 하나하나 제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런 라온의 뒤로 루시가 나타나 싱긋 웃어 보였다.

동시에 티타니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현재 라온의 신체를 자신이 조작하는 세포들로 장악한 루시가 그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티타니아에게 그것은 곧 루시가 자신의 계약자를 가로채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신이 협조하지 않으면 라온은 더 고통받아야 할 것입니다.”

[너, 너! 감히!]

티타니아는 루시를 삿대질하며 분노했으나 이미 자신의 우위를 확신한 루시는 라온을 잡고 협박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열등한 엘프의 몸에서 벗어난 그에게 사실 당신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자비로운 기회를 주는 것이니,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땅의 정령.”

“티타니아, 계약을 해제하고 피신해라. 여기는 위······.”

“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대로 자신의 계약자를 버리고 도망가실 겁니까?”

라온의 입을 강제로 막은 루시는 고의로 히죽이며 티타니아를 약올리고 도발했다. 이미 루시는 계약을 맺은 엘프와 정령이 일심동체임을 파악한 상태.

그것을 근거 삼아 라온을 인질로 잡아 티타니아를 부려먹을 계산을 시도하고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입 닥쳐! 나, 난 라온과 함께야!]

그리고 그 계산의 예상값대로 티타니아는 발끈하며 라온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이제 당신의 계약자와 함께, 하등하고 가치 없는 열등 생물들을 멸절시키십시오.”

루시는 라온의 몸을 움직여 엘프들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티타니아는 크게 갈등하면서도 자신의 계약자를 살리고 지키기 위해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땅의 정령이 우리를!”

“모두 피해라!”

성장의 권능으로 레벨을 올려, 한계를 초월하고 강해진 것은 라온과 일심동체인 티타니아 역시 마찬가지.

[미안해. 미안······.]

그런 티타니아가 전장에 개입하자 크게 놀라고 당황한 엘프들의 방어선은 끝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티타니아는 울면서 자신의 동족과 싸웠다. 울지는 못해도 그와 같은 마음인 것은 강심의 출력을 아낌없이 뿜어내며 동족들을 베어 넘기는 라온도 마찬가지다.

“감정과 변수, 비효율을 이용한 효율적 전투.”

반면 루시는 그런 모습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고 희미하게 웃었다.

단순히 라온에게 복수해서, 전장에서 승기를 잡아 가서 느끼는 쾌감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기쁨이다. 자신이 인간과 유사한 감정선을 가진 정령과 엘프를 감정적으로 이해한 이후, 그것을 이용해 통제하고 이간질했다는 사실이 자신이 한 걸음 더 인간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그것을 기뻐한 것이다.

“세계수.”

곧 대수림 전역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엘프들의 전선은, 대수림 중심부의 거대한 거목까지 밀려났다.

죽음도, 자비도 모르고 오직 앞만 보며 돌진하는 파멸의 군단을 이끌고 그곳에 도착한 루시는 눈앞에 실존하는 km급 거목을 올려다보며 눈에 그것을 담았다.

“세계수는 엘프들의 기원, 그리고 상징. 동시에 거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영물.”

“와아······.”

세상의 기둥.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압도적인 힘을 일대에 미칠 수 있다. 김서윤이 무심코 감탄을 흘릴 정도였다.

과연 분홍색 꽃들을 달고 있는 저 거목과 그 주변으로 펼쳐진 대수림, 엘프들의 도시는 아름답고 청아하다.

“파괴하는 데도 힘이 꽤 들겠습니다.”

그러나 루시에는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도, 그저 짓밟아 부숴야 할 제물로 보였다.

루시는 곧바로 군단을 돌격시킬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마왕군에게 휴식이란 개념은 없으니까. 마수 거미와 마계 습지 문어를 혼합해 만든 보급병들이, 촉수를 이용해 둥지에서 가져 온 양분을 기름 넣듯 공급해 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당신들은 현실에 안주해서 지는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고 발버둥치는 것은 생물의 의무. 그 의무를 저버리고 구석으로 숨어 버린 주제에 감히 그 비루한 목숨을 이어 가려 하다니.”

루시는 엘프들이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라온 때문인줄 알았던 이 감정, 알고 보니 라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냥 루시는 엘프 같은 존재들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뿐이었다.

발버둥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성장을 포기한 자들. 성장과 진화 그 자체인 루시는 자신이 도태되길 자처하는 그런 부류를 진심으로 증오한다는 걸 깨달았다.

[전군 공격.]

그리고 그 감정을 굳이 통제하지 않았다.

***

“나안.”

“예, 대장로님.”

“지금 즉시 대수림 밖으로 나가, 구원을 요청하게.”

루시가 대지와 하늘을 뒤덮은 마왕군을 돌격시킨 사이. 엘프들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모든 일족이 모여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지도자인 대장로는 갑옷을 입은 젊은 여엘프를 불러 편지 묶음을 쥐여 주었다.

“대, 대체 어디의 누구에게 요청한단 말입니까?”

나안은 아름답고 용맹한 엘프 기사였지만 대수림 밖으로 나가라는 소리에 크게 당황했다.

그동안 그들은 대수림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았다. 저 바깥 세상을 불결하고 사악한 공간으로 여기며 어린 엘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켰다.

나안 역시, 그 어린 엘프였다.

“그 어디든, 아무에게나! 지금 세상을 멸망시킬 괴물들이 세계수를 넘보고 있으니, 세계수께서 해를 입고 우리가 막고 있는 심연의 구멍이 열리지 않기를 바란다면 당장 저 끔찍한 지옥의 괴물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게.”

그러나 지팡이를 쿵 하고 내려찍은 대장로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녀를 다그쳤다.

선택지가 없어진 나안은, 주춤거리다가 서둘러 달려 나갔다. 그 모습에 자리에 모여든 수많은 엘프 장로들의 낯빛이 어두웠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니 후방에는 최후의 최후까지 계속해서 지원 병력을 보내라고 연락하시오.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겠소.”

그들은 이미 죽을 각오를 마쳤다. 그들에게 이곳을, 세계수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건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으니까.

“대장로! 지금 놈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오고 있습니다.”

“같잖은 벌레 놈들, 역시 지휘하는 자가 있었는가.”

그때 황급히 들어온 보고.

아직 전면에 나서 활약하지 않은 루시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그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과연, 저 멀리 달려오는 마왕군을 두고 누군가가 검은 피막에 덮인 날개를 펼친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지팡이로 자신을 삿대질하는 굽은 허리를 가진 노인, 대장로가 엘프들의 우두머리임을 파악한 루시가 그동안 습득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얼굴 근육을 조작해 세상 상큼하게 웃는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루시의 의도가 아니었다. 싸우기 전에 먼저 말을 한번 해 보며 정보를 캐 보는 게 어떠냐는 창현의 제안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거래? 감히 어딜······.”

“응하지 않는다면 어느 한쪽이 완전히 멸절할 때까지 싸울 뿐. 그것을 선택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당연히 반발하는 그들에게 루시는 과연 누가 우위에 있는지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이제 채 몇 분이면 마왕군은 아직 채 완성되지 않은 엘프들 최후의 방어선을 그대로 들이친다.

“부디 현명한 선택으로 그 같잖은 목숨줄, 계속 연명할 수 있기를.”

루시의 제안에는 협박과 도발이 반반 섞여 있었다.

문제는 그 대사도 전부 처음 고정한 웃는 얼굴로 치는 바람에 더 섬뜩한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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