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15화 (115/200)

< 115화-군단 (15) >

115화-군단 (15)

“루시, 네 평소 얼굴은 너무 차가워서 웃으라 한 것뿐인데.”

[시정하겠습니다.]

“아니야, 다시 얼굴을 구기지는 마.”

피식 웃은 나는 화면을 보며 루시를 말렸다. 이미 늦었으니 수습한다고 헛발질할 수는 없지.

“대체 원하는 게 뭐냐, 이 괴물.”

다행히 루시의 섬뜩한 협박이 통했는지, 엘프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노인은 이를 갈며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이 대화, 사실 별 의미 없다.

대화하고 협상해서 그들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낸다는 건 이제 불가능하니까. 루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서도 지금까지 소모한 양분을 위해 그들을 공격하여 쓸어버릴 것이다.

“엘프들의 기원에 대해 들었습니다. 바로 당신들이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여는 방법, 그것이 필요합니다.”

루시는 그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밝혔다. 그러자 그들이 술렁거린다. 놀라는 걸 보니 모르는 건 아닌가?

“대체 너희 같은 괴물들이 그 힘을 손에 넣어 무엇을 하려 하지?”

“좀 구슬려 볼 필요가 있어 보이니 이렇게 말해, 루시. 당신들처럼 다른 세상으로 떠나 그곳에 정착하려 한다고.”

곧 상대의 말을 들은 나는 직접 루시를 코칭했다. 실제로 내 말을 들은 루시는 그대로 전했고, 엘프들 사이에 술렁임은 더욱 퍼져 갔다.

“그렇다면 대체 왜 우리를 공격한 것이냐.”

“이러면 우리의 힘을 보여 주지 않는 이상 꽉 막힌 당신들이 대화를 받아 줄 리가 없었다고 하는 게 좋겠네.”

“큭······.”

내 말을 그대로 전한 루시의 말에 상대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틀린 말은 아니니 할 말 없을 것이다.

“분명 선조들이 남긴 고대의 주문에 세상의 틈을 열어젖히는 주문이 있다. 하지만! 그 주문은 반쪽짜리에 불과해. 자신의 근본을 이 세상에 두고 있다면 설령 문을 열어 다른 곳으로 가도, 머지않아 강제로 이곳에 돌아오게 될 것이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문을 열어 루시 네가 지구로 와도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 진다는 건가? 시간제한이 있다고?”

상대는 단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법엔 제약이 있었다.

“그럼 당신들은 대체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습니까?”

루시는 그들에게 방법을 물었다. 갈등하는 것 같은 노인은, 뒤에서 몰려오는 마왕군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지자 결국 입을 다시 열었다.

“세계수. 세계수의 권능이다. 이 땅을, 우리의 근본과 완전히 동일하게 탈바꿈시키는.”

그러나 그 대답, 그리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세계수······.”

루시의 표정이 무너지며 눈이 커졌다.

루시에게 세계수는 그저 큰 나무에 불과하다. 내부에 품고 있는 강렬한 에너지는 그저 에너지일 뿐.

아무리 특별한 나무라지만 결국 식물체다. 루시가 분석하고 복제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다.

“어쩔 수 없어, 루시. 다른 방법을 찾자.”

나는 루시에게 여기까지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도 반쪽이라도 건진 건 큰 수확이었다.

“정말 그 주문을 넘겨 주면 떠날 것인가?”

그때 상대가 마음을 정했는지 협상 의지를 내비쳤다.

“그렇다고 해.”

당연히 루시에게 거짓말을 지시했다. 사실 나는 이쯤에서 정말 물러나도 상관 없었지만 루시는 아예 뿌리까지 뽑아 버릴 작정이었다.

“물론입니다.”

루시는 곧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시도했다.

안심시키고 그들이 방심하는 사이 그대로 공격해 쓸어버리겠다는 전략.

“이건.”

그런데 그 순간 변수가 생겼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거대한 나무의 꽃잎들이 일제히 져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루시도 저게 왜 저러는지 몰랐다.

“세계수께서 경고하신다.”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설마.”

“네년, 거짓을 말하는구나. 사악한 벌레야!”

동시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크게 놀란 엘프들은 다시 우리를 적대하며 이를 드러내었다. 세계수의 개입. 차단막에 이어 이번에도 세계수가 우리를 방해한 것이다.

“공격해라!”

곧 엘프들의 공격이 루시에게 쏟아졌다. 롱기누스로 강화한 루시의 출력이 순식간에 깎여 나갈 정도로 파괴적이고 강한 한점공격.

“죄송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결국 루시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 마왕군을 멈추지 않고 계속 돌격시켰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승리하여,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전열을 정비한 루시는 눈을 번득이며 이번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마왕군과 함께 결사 항전을 외치는 엘프들에게 덤벼들었다.

[롱기누스ㆍ최대 출력 전개]

루시는 그 틈에서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적들과 싸웠다. 모두 바친다. 그 단어가 내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

“······.”

휴대폰을 든 나는 계속해서 전쟁 장면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자그마한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고 이제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지금 내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다름아닌 직전에, 라온을 인질로 잡은 루시가 땅의 정령 티타니아를 말로 농락해 배신을 유도하는 것을.

그 광경을 본 나는 상당히 놀랐다. 루시가 보여 준 표정과 말투는 내가 보던 것과 상당히 달랐으니까.

내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를 가졌지만, 언제나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무미건조한 부분이 남아있어 마치 안드로이드 같았던 지금까지의 루시.

그러나 그때의 루시는 마치 사람 같았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분노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상대의 감정과 마음을 읽어 내고 그것을 이용해 먹는 모습은 결코 학습한 감정 표현 법으로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루시가 인공지능에서 벗어난다?’

내 머리에 한 가지 사실이 스쳤다. 이미 평범한 인공지능의 범주를 넘어선 루시가 이대로 계속해서 성장한다면 어떤 존재가 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존재는 과연 지금처럼 효율과 합리를 추구할지, 아니면 인간처럼 본능과 본성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재가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둘 다 위험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루시가 나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버리는 순간 그 행보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효율을 위해 루시가 지구를 점령하려 할 수도 있다. 혹은 감정에 매몰되어 미쳐 날뛸 수도 있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될 미래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승률은 여전히 89%입니다.]

그때 루시의 보고가 들려왔다. 나는 착잡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루시는 오직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그 이유가 나라는 것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혹시 몸에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심박과 호흡이 정상치를 벗어났습니다.]

“아니, 그냥 긴장해서 그래.”

루시는 지금 내 옷으로 위장한 나노ㆍ오메가를 통해 즉시 내 상태를 알아차리고 물어 왔다.

지금까지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한 루시의 선물이자 보호.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루시가 내게 걸어 둔 완전한 구속이다.

과연 지금의 루시는 그걸 자각이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신경 꺼. 지금 나는 행복해. 네 덕이야, 루시. 너는 내 행복을 위해 일하는 나만의 인공지능. 그렇지?”

[행복······.]

방법이 필요하다. 루시를 보다 확실하게 길들이고 통제할 방법이.

그리고 그 대전제는 루시가 아직 ‘나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일단 병력을 물리겠습니다. 이곳에 펼친 둥지에서 병사들의 양분을 보충하고 다시 공격할 것입니다. 아군은 적들에 비해 회복 속도가 빠르니 적들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 다시 공격하겠습니다.”

“저항이 거세겠지.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첫 충돌 이후 루시는 엘프들의 방어선에서 한나절을 싸웠지만, 그들을 뚫지 못했다. 물론 시간문제일 뿐이다.

오직 전투만을 위해 루시가 탄생시킨 신ㆍ마왕군은 양분만 보충하면 곧바로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설령 그 몸이 부서지더라도.

“이제 일을 나가야 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언제까지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루시를 지켜볼 수 없었다. 루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이쪽 세상에서 시작한 활동들.

이지연의 매니저 일이나 코드 x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괴물로 활동하는 것 모두 점점 더 그 스케일이 커지고 있었으니까.

“상급종으로 분류한 신종들의 등장 이후 고등급 던전의 공략 실패율이 급격히 떨어졌지. 던전 공략 실패는 곧 상대에게 턴이 넘어갔다는 것이고, 게이트는 그만큼 늘어나고 침략종들은 더 많이 몰려와 사람들을 해친다.”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티던 세상도 더 이상은 못 버틴다. 우리가 누리던 모든 것을 지키면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니까.

약한 나라들은 결국 멸망하고 수많은 희생자와 난민들이 발생한다.

그렇게 이 땅에 풀려나기 시작한 괴물들은 세계 경제에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주고, 잘 막아내던 나라들 역시 여유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세상이, 정확히는 이 문명이 망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그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미루어지고 폐기되었던 것들이 대거 부활했다.

인권, 도덕, 올바름이란 이름으로 그동안 고개를 들이밀었던 것들은······ ‘생존’이라는 태산 앞에 그대로 짓눌려 사라졌다.

“역시, 루시 네 힘이 필요하긴 해. 거꾸로 돌아가려는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 당연합니다.]

외출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낸 나는 여권을 챙겼다. 또 출국이다. 문제는 이게 내가 원하지 않던 강제라는 점.

거부권은 없었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려는 이상, ‘법’을 어기지 않으려는 이상 해야만 했다.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피식 웃은 내 말에, 귀에 꽃은 이어폰에서 당연하다는 루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재 양측 모두 휴식 중이나 엘프들은 아직 절반도 회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반면 아군은 양분 공급률 60%를 넘었습니다]

“알겠어.”

루시의 보고를 지속적으로 받으며, 이번에 새로 산 차를 끌고 도착한 곳은 이지연의 집이다. 그녀 역시 준비를 마치고 깊은 한숨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그리 기분이 좋지 않네요. 저는 당연히 싸우겠지만, 그걸 강제적으로 한다는 것이.”

“그만큼 이제 이 세상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겠죠.”

팔짱을 낀 그녀의 탄식에 나도 동조했다.

이제 이지연 같은 고위 각성자도 강제로 동원되어 싸워야 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몇 개국이 연합해서 만든 국제 각성자 연합 산하의 새로운 팀.

각국의 뛰어난 이들을 한 팀으로 만들어 던전 공략에 강제로 투입한다는 것이 그 목표였다.

그들의 임무는 당연히 상급종을 상대하는 것.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긴 하다.

“하지만 싫다는 소리도 못하죠. 결국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일이니까. 그리고 저희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이내 씁쓸하게 웃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만 싸우는 게 아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라, 아니, 세상 전체가 전시에 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출신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군인들을 징집하고 총을 들려 게이트 방어전에 투입한다.

모든 각성자들은 더 이상 싸움을 피한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특별 부대에 입대해 복무 기간 동안 싸우든지 후방으로 빠져 다른 노역을 해야 했다.

고등학생, 즉 미성년자인 오진혁이 실전을 뛸 수 있게 해야 한다 만다로 논쟁하던 것이 고작 몇 주 전이지만, 이제는 그보다 어린 미성년자 각성자들도 한데 모아 강제로 훈련시키고 필요하면 실전에도 투입한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하고, 설령 반대해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실에 찍어 눌렸다.

“적응하고, 변해야 살아남으니까.”

루시의 말이 틀리지 않다. 경쟁에서 도태하지 않으려면 언제든 변할 수 있어야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