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군단 (16) >
116화-군단 (16)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변하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허억, 헉······.”
[조, 조금만 더 힘내, 나안!]
늦은 밤의 대로. 그곳을 혼자 달리는 사람이 있었다. 찬란한 금발을 흩날리며, 터질 듯한 폐로 숨을 헐떡이며 빠른 속도로 달리는 그녀는, 엘프 나안.
지금 그녀는 일족의 명운을 위해 뛰는 중이다. 갑옷까지 다 벗어 던지고 검 하나만 찬 채 쉬지 않고 이틀 내내 달렸다.
제아무리 엘프라도, 제아무리 마력을 수련한 기사라도 이제는 한계였다.
‘내가, 내가 멈추면 동족들이!’
그런데도 그녀는 멈추지 못했다.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어 피가 번지고 호흡 곤란으로 꺽꺽거려도 기계적으로 달렸다.
분명 그녀는 한계를 넘어섰다.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사명으로.
실제로 그녀는 고작 이틀 만에 엄청난 거리를 내달려 인간들의 영역 근처까지 다다랐다.
“흐극?”
그러나 한계점조차 멈추게 하지 못한 그런 그녀의 달리기를 멈춰 세운 것들이 나타났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화살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달리던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길 앞에 박힌 화살들에 놀라 발을 헛디뎌, 끝내 바닥에 우당탕 넘어졌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저 귀를 봐. 진짜라고?”
바닥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에게 여러 명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거친 인상의 인간 사내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넘어진 그녀의 몸을 훑었다.
“인간······들······.”
‘아니야. 이들은 인간들의 지배자가 아니야.’
만나길 바랬던 인간들이었지만, 거칠고 더러운 그들은 나안이 원하던 인간들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혼란을 틈타 도적질을 일삼는 패거리에 불과했다.
“이, 이거 놔라!”
“왜 이런 밤에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여자 엘프가 이 황무지를 달리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대박쳤군.”
그들은 저항하지 못하는 상태인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당장 그만둬!]
그녀와 계약한 바람 정령도 그녀의 마력이 전부 소진된 지금은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울부짖는 그녀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를 맡았는지, 당장 인간들의 왕을 만나야 한다고 외쳐도 그들은 낄낄거리며 그녀의 입을 막고 몸을 묶었다.
“끄아악!”
그러나 그 순간, 칭칭 묶은 그녀를 들쳐 업으려던 도적은 어둑한 밤 하늘을 가르는 뇌격창에 그대로 적중당해 비명을 지르며 절명했다.
“저놈들이다. 최근 인근에서 기승을 부리는 도적들. 쳐라!”
“이런 씹, 아악!”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기사들이 땅을 박차고 각력을 폭발시키며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나안에게 모든 신경을 쏟느라 도망칠 틈조차 놓쳐 버린 도적들은 기사들의 검에 일격에 베여 쓰러지니, 현장이 정리되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하악······.”
“저기, 괜찮습니까. 이름 모를 엘프.”
그때 한 기사가 나안의 입을 막은 재갈과 구속을 풀어 주고 손을 내밀었다.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는 그녀에게 애써 웃어 보인 젊은 기사.
“저는 도시 지드의 기사 크리스라 합니다.”
그는 도시 인근에서 작전을 수행중이던 크리스였다.
“기사, 이, 이거. 이것을 제발 너희의 왕에게 전해 다오. 대, 대수림이, 세계수가 위험······.”
눈이 흐려지던 나안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손으로 품에서 꺼낸 것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그리고 그 직후 나안은 의식을 잃었다. 정령까지 사라져 버려,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줄 이는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어쩌지, 크리스?”
“돌아가자. 당장 단장께 보고해야 할 큰 일이니까.”
“그, 이 엘프는 누가······.”
모여든 기사들은 기절한 나안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다. 후폭풍이 두려워, 아무도 엘프종 특유의 가벼운 옷차림으로 팔다리를 시원하게 내어 놓은 그녀의 몸에 차마 손대지 못했다.
“같은 여자인 제가 부축하죠.”
그때 나선 것이 맨처음 뇌전을 쏘아 적을 쓰러트린 검은 후드의 여인. 기사들은 그녀의 등장에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누님.”
“걱정 마. 그런데 그건 뭐니?”
후드 달린 망토를 벗어 나안의 몸을 감싸고, 그녀를 가볍게 업어 든 유리아가 자연스럽게 눈을 빛내며 크리스의 손에 들린 편지를 흘끔거렸다.
***
[흥미롭군요. 예상치 못한 변수지만, 통제 가능한 변수라니]
“편지에는 사악한 악적······ 즉 저희에 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습니다. 어쩌죠?”
나안을 데려온 도시 지드. 유리아는 나안이 쓰러져 있는 사이, 아직 자신의 손안에 있는 대장로의 편지를 보고 루시에게 지령을 받았다.
정작 루시는 편지보다는 자신의 감시망을 피해 대수림 밖으로 도주한 엘프가 있다는 게 제일 신기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편지를 기사단의 단장에게 전해야 해요.”
그동안 착실히 인간 마법사를 연기해 온 유리아는 이미 이곳에서 기사단과 함께할 정도로 인정받는 마법사가 되었고, 나름의 권한도 있었다.
그덕에 지금 이 편지를 중간에 받아서 몰래 열어 본 것이다.
[만약 그 편지를 숨기고 그 엘프의 입을 막는다면 이대로 대수림이 멸망해도, 대수림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세계수의 차단막 정도야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루시는 그 초월적인 연산력으로 빠르게 수많은 가설들을 세워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어떤 선택을 내려야 가장 효율적인 이득을 볼 수 있을까에 대한 시뮬레이션이었다.
[엘프들의 전멸을 숨기고 정보를 왜곡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유리해질 것입니다.]
곧 루시는 결과를 도출하고 그것을 실행했다.
정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판단이었다.
“호, 혹시 이것을 마신께서 명령한 것인지.”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하도록 짠 계획이니 상관없습니다.]
유리아는 자신의 옷, 즉 나노ㆍ오메가의 일부가 분열하여 떨어져 나와, 한 마리의 꿈틀거리는 기생충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움찔거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생충형 병사 뇌아귀ㆍ알파는 그대로 나안의 코로 들어가 그 통로를 타고 뇌까지 직행해 기어들어 갔다.
[이제 내가 불러 준 대로 편지 내용을 바꾸십시오.]
루시는 이후 편지까지 조작하라 시켰다.
옛적부터 루시의 충실한 노예였던 유리아는 그 명령대로 편지를 조작하고, 원본이 되는 편지는 그대로 태워 버렸다.
[일단 당신의 일은 이것으로 끝이지만, 계속 대기하십시오.]
루시는 나안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뇌아귀를 꿈틀거렸다. 이제 남은 건 나안을 굴복시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
“편지의 내용이 사실인가?”
“그건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엘프가 직접 가져온 서신입니다. 라온 님 사후, 그곳의 소식을 알 길이 없지 않습니까?”
문득 들려오는 말소리. 나안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낯선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허, 진짜 엘프로군.”
누군가 자신의 귀를 보며 감탄하는 소리도 들렸다.
‘모, 몸이 안 움직여!?’
그러나 그녀는 손가락은커녕 눈꺼풀조차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은 다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그것이 자신의 마력이 고갈된 틈을 타 뇌에 침투한 뇌아귀가 특정 신경을 봉인한 탓임을 그녀는 알 턱이 없었다.
‘마력도 움직이지 않아. 탈리아······!’
심지어 유리아가 몰래 그녀의 발목에 채운 얇은 봉인 사슬이 마력 순환까지 틀어막아, 정령도 부를 수 없게 된 그녀는, 말 그대로 정신만 돌아온 고깃덩이 신세였다.
“놈들이 왜 대수림을 공격했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잘 막아 냈다니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우리에게 경고해 주기 위해 이렇게 몸이 상할 정도로 뛰다니, 솔직히 조금 대단합니다.”
“정신을 차리면 극진히 모시게. 나는 이 편지를 영주님께 전달하지.”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끙끙거리던 나안은 그들이 편지의 내용을 언급하자 그걸 듣고 경악했다.
그들이 이해한 편지의 내용이, 자신이 아는 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니야. 우리는 당장 도움이 필요하다!’
아무리 외쳐도 속에서나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 실제 그녀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세계수시여, 어째서······.’
곧 그들이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절망한 그녀가 찢어지는 마음으로 흐느꼈다. 눈물 한 방울이, 감은 눈에서 주륵 흘러내릴 정도로.
[나약하고 도태한 하등한 종족.]
‘!!?’
그리고 그때, 그녀의 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엘프종이 왜 멸망한 줄 아십니까.]
“그, 그게 무슨······ 허업?!”
그녀는 갑작스레 돌아온 자신의 목소리에 자기가 놀라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입 근육은 다시 굳어버려 열리지 않았다.
“하악, 이게 대체 무슨!”
그리고 다시 입이 풀렸다. 다른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이 입과 혀만 움직이게 된 그녀는 듣도보도 못한 일에 놀람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당신의 몸은 이미 제 것입니다. 복잡한 조작은 불가능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그만. 그만!!”
곧 그녀는 마구잡이로 풀렸다 봉인되길 반복하는 자신의 몸에 기겁하여 외쳤다.
그러면서 이를 딱딱거렸다. 안 그래도 힘들었던 마음이 공포에 질린 것이다.
[당신들은 약해서 멸종합니다.]
[하등한 종족, 도태된 종족.]
[마치 자신들이 고고하고 고귀한 줄 착각하고.]
[숲에 스스로를 가두고 썩어가는 머저리들.]
[당신들은 고귀하지 않아.]
[진화를 포기한 패배자들.]
[너희는 쓰레기야. 존재 가치가 없는 쓰레기.]
루시는 신경 조작을 마구 반복하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에 공포에 질린 나안의 머릿속에 자신의 말을 말 그대로 쏟아 내었다.
공포에 질려 있던 나안에게 그 목소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강하게 두들기는 해머였고 긍지를 갈아 버리는 믹서기였다.
[긍지 높은 엘프 기사가, 고작 이 정도로 겁에 질린 겁니까?]
“아, 아아······.”
루시는 신경을 눌러 고의적으로 그녀의 방광을 자극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속절없이 쏟아 내는 것을 자신이 겁에 질려 그런 것이라 착각한 나안은, 수치심도 잊고 진심으로 겁에 질려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멸종한 엘프종의 명맥을 이어갈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마침 아담은 준비가 되어 있으니, 당신이 이브가 되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열등한 기존의 엘프종을 대신할 새로운 엘프의 시초가 되어, 이번에는 이 세상을 정복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런 나안에게 루시는 치명적인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타락이 아닙니다. 진화이고, 성장이고, 승리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만, 그 결실은 달콤하니 당신은 엘프들의 구원자이자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비효율적이긴 해도 나노ㆍ오메가를 이용해 나안의 몸을 완전히 지배하여 강제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라온에게서 가능성을 본 루시는 진심으로 나안을 자신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싶어 계속해서 이 협박과 회유를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