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군단 (17) >
117화-군단 (17)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분명 지원이 올 것이다.”
“어리석은 희망일 뿐.”
벌써 며칠이나 반복되고 있는 싸움.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쥐게 된 루시는,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엘프들을 보고 비웃었다.
사실 유일하게 탈출에 성공했던 나안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상관은 없었다. 루시는 이대로 엘프들을 무너뜨릴 것이고, 원하는 것을 얻어낼 것이니까.
“이제 결착이 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루시는 오늘을 자신이 승전을 올리는 날로 점쳤다. 엘프들의 영역 전부를 점령하는 건 물론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계속 모여드는 엘프들도 이제는 한계였다.
“저, 저, 저건 설마!”
루시는 자신이 준비한 마지막 카드를 꺼내 선보이며 동시에 그것을 전방을 향해 돌진시켰다.
대수림 일부를 점령한 직후부터 양분을 모아 만들어 낸, 미처 아일랜드·알파의 몸에는 실어오는 게 불가능했던 초거대종 베헤모스·베타.
그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대지를 진동시키기 시작한 이 거대한 돌격병이 특유의 커다란 머리와 턱을 앞세우고 엘프들의 방어선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루시는 이번 돌진으로 방어선을 완전히 와해시키고 그곳으로 아군을 투입할 생각이었다.
“으, 으아악!”
“뚫렸다!”
그리고 마침내 돌진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초거대종이 전장에 들이닥쳤을 때, 그 압도적인 위용에 한순간 자신들의 사명마저 잊어버린 엘프들은 한 번에 수십 명씩 쓸려 나가며 단번에 그 대열이 무너져 내렸다.
애초에 정신력만으로는 절대 버틸 수 없는 압도적인 질량의 차이. 마치 거대한 중장비가 잡초를 밀어 버리는 듯한 위력이다.
“엘프들은 끝났습니다.”
초거대종 위에 서서 자신의 방어막으로 초거대종을 보호하던 루시는, 피식 웃으며 뚫려 버린 상대 진영으로 난입하는 자신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일대는 아비규환 그 자체.
전장의 좌측에서는 궁니르를 든 김서윤이, 우측에서는 티타니아를 앞세운 라온이 싸우며 엘프들을 뒤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허공으로 떠오른 루시는 이제 거대한 거목을 바로 코앞에서 두게 되었다. 루시는 세계수를 향해, 자신의 무기인 결전 병기 롱기누스를 겨누었다.
세계수가 사라지면 차단막도 사라진다. 차단막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는 건 수백의 함대급 전력.
그것들마저 동원된다면 엘프종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데는 채 며칠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안 돼!!”
그런 루시를, 바람 정령의 힘으로 몸을 띄운 대장로가 직접 가로막았다.
“네년은 모른다. 세계수께서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주시고 계시는지!”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제 행동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수께서 사라지면 이 땅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다른 장로들도 사력을 다해 싸우는 사이, 대장로는 루시를 가로막고 소리쳤다. 그의 발언은 정보에 없던 사실. 잠시 라온을 흘끔거린 루시는 롱기누스를 거두고 잠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세계수가 맡은 역할은 대수림의 유지와 차단막 생성이 전부가 아니었습니까?”
“······하! 아마 대부분의 엘프들조차 그렇게만 알고 있겠지.”
순수하게 의문이 담긴 루시의 물음에 수염을 파르르 떤 대장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자신도 말하기 괴롭다는 듯이.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넘어간 일촉즉발의 상황이니, 대장로는 결국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께서 맡으신 역할은 하나 더 있다. 우, 우리 엘프들의 치부에 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세계수께서 막아 주시기에 아무 문제 없는 일이다.”
“그게 대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대로 이곳을 밀어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 세계수께서는 균열을 수호하신다. 우리 선조들이 먼 과거 이곳으로 오며 흠집을 낸 균열. 세계수께서 없어지시면 그 균열은 더욱 벌어지고 이 세상엔 곧 ‘그곳’에서 몰려오는 사악한 이들이 창궐하게 될 것이다!”
결국 대장로는 사실을 토설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균열, 그리고 그곳에서 몰려나온다는 사악한 괴물들.
어딘가 익숙함을 느낀 루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장로라는 작자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창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 것이다. 창현은 거의 동시에 그 보고를 받고 당황하여 서둘러 휴대폰을 들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다른 세상에서 몰려오는 괴물들이라고?”
[하지만 저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침략종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루시는 정보가 조금 더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도 루시가 뭐라 하기 전에 대장로는 이미 창백히 질린 얼굴로 알아서 정보를 토해 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엘프들은 모르고 일부 장로들만 아는 사실이다. 사실 먼 옛날 이곳으로 온 우리 선조들은······ 도주해 온 것이다. 고향 땅에서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세계수의 힘을 빌려 억지로 틈을 벌려 이곳에 도착했지.”
“당신들의 패배는 알 만합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당신들을 내쫓았습니까?”
“타락한 엘프, 다크 엘프들. 세계수를 노예로 삼은 놈들은 우리의 고향을 전부 점령했었지.”
대장로 본인도 그저 들었을 뿐인 정말 까마득한 이야기다. 루시나 창현은 혹시나 현재 지구를 침략 중인 침략종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러니 당장 그만둬라. 세계수께서 쓰러지시고 탐욕과 타락 그 자체인 그 괴물들이 이 세상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 이곳으로 침략을 시도할 것이니.”
“분명 흥미로운 옛이야기이긴 합니다.”
결국 종족의 치부를 드러낸 대장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세계수를 지키고 싶었다. 그것이 곧 자신들의 목숨 그 자체이기에.
루시 역시 그걸 듣고 곧바로 다시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정보가 부족하지 않아, 루시? 그 다크엘프인지 뭔지 하는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몰라. 세계수를 굳이 지금 뽑아 버리거나 파괴할 필요는 없겠어.”
“합리적인 판단이십니다.”
창현은 세계수를 지금 당장 파괴하지 않는 게 맞다고 판단했고, 루시 역시 그 의견이 합리적이라 인정했다.
아무리 감정적으로 굴어도 지금의 루시는 그 감정도 결국 합리라는 틀 안에서만 운용했으니까.
“하지만 세계수를 죽이지 않는 것이, 엘프종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과 합치하지는 않습니다.”
“네, 네년!”
그러나 루시는 결국 군단을 뒤로 물리지 않았다. 세계수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일단은 결국 세계수만 살려 두면 그만.
아직도 수십만 가까이 살아남은 엘프들을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다. 그들을 모두 죽이고 이 대수림을 장악해 양분으로 삼으면 된다.
“세계수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죽으십시오. 당신들 같은 패배자들이 아닌, 다시금 진화하길 원하는 새로운 엘프들이 세계수를 돌볼 테니까.”
루시는 다시 쌍날 검을 들어 이번에는 세계수가 아닌 대장로를 겨누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창현 역시 이번에는 루시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얌전히 다른 세상으로 가는 주문을 토설한다면 고통스럽게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닥쳐라. 입만 열면 거짓말인 그 더러운 혀를 믿겠느냐!”
“상관은 없습니다. 마왕과 싸우고 영웅의 칭호를 받은 당신네들의 동족도, 견디지 못했으니까.”
[롱기누스·출력 전개]
루시가 쏘아 낸 강력한 섬광이 대장로와 그 주변을 덮쳤다. 대장로는 온 힘을 끌어모아서 그 일격을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루시는 그 즉시 앞으로 돌진해 대장로를 향해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는 쌍날 검을 휘둘렀다.
“모두! 마지막을 위해서 싸우게!”
대장로가 미리 대기시킨 정예 엘프 기사들이 루시에게 덤벼들었다. 이게 그들의 모든 것을 건 마지막 항전.
루시를 잡아내고 반전을 꾀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몸이 베이고 절단되는 상황에서도 루시는 그저 그들을 죽이는 데 집중했을 뿐이다.
“어떻게······.”
큰 부상을 입은 대장로는 일대가 파괴되는 치열한 혈투 끝에, 팔과 목이 잘려 바닥에 쓰러진 루시의 시체를 보며 덜덜 떨었다. 분명 계획대로 적장을 끌어들여 큰 희생을 치르고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짓밟고 이곳에 온 존재는 그저 평범한 상위종인 오크·감마.
그러나 루시의 시체에서 롱기누스를 회수한 오크, 감마의 붉은 안광들을 본 대장로는 어째서인지 소름이 돋았다.
“커헉.”
[끝인 줄 알았습니까? 나는 모두이자 하나. 당신들이 세포 하나까지 소각하지 않는 이상 나는 어디서든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크·감마가 롱기누스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콱 움켜쥐니 대장로는 자신의 머리에 울리는 루시의 비웃음에 경악했다.
[이제 진득이 대화를 나눌 때입니다.]
엘프들의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세계수를 넘어, 그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마왕군을 등진 루시는 점차 공포로 물들어가는 대장로를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갔다.
***
‘아, 아아······.’
[이제 알겠습니까? 당신들은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엘프들의 방어선이 무너진 직후, 루시는 동시에 나안에게도 그 사실을 통보했다.
이미 심신 미약 상태였던 나안은 루시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믿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죄책감과 슬픔, 분노 등으로 엉망인 그녀의 마음은 이제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세계수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루시는 그때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당근을 하나 던졌다.
[아직 당신에게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이대로 미쳐서 비루하게 죽거나, 새로운 존재로 진화하여 다시금 세계수를 지키는 것.]
루시는 이제 세계수를 인질로 잡고 나안을 현혹했다. 동족을 배신하고 괴물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세계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고 계속해서 세뇌했다.
“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해지고 성장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래야만 세계수도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경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결국 나안은 굴복하고 말았다. 자신이 못나서, 이미 늦어 버린 상황에서 세계수라도 구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가 먹힌 것이다.
루시는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나안에게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다른 이들이 기존 엘프들이 몰락한 것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라온의 뒤를 이어 새로운 방랑자가 됩니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교단과 연합군 사이를 이간질하고 계속해서 싸움을 부추기십시오. 그들이 서로 경쟁하느라 힘이 빠진 사이 힘을 기른 당신은 어느 순간 그들 모두를 잡아먹고 이 세상의 진정한 승자가 될 것입니다.]
루시는 그녀의 설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몸을 통제하던 뇌아귀의 활동을 멈추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의 뇌를 파괴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 당신.”
“환영해, 엘프 님. 그분의 품에 온 것을.”
그리고 자의로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난 나안의 눈앞에 있던 사람은, 나안보다는 어두운 금발을 늘어뜨린 붉은 눈동자의 인간 여성.
쓰게 웃은 유리아는 자신의 동료를 환영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