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군단 (19) >
119화-군단 (19)
“세계수의 힘을 빌리면, 그리고 다른 세상과의 명백한 연결만 있다면 문을 여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라. 조금은 여유를 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더 앞당겨야겠습니다.”
교단도 성장한다. 이미 교단 측에서는 지구로 사람을 파견할 정도라는 사실을 알아챈 루시는 계획한 일을 더 가속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엘프족의 장로들을 고문해 고대부터 내려오던 엘프들의 주문들을 모조리 털어 낸 루시는 원하던 차원 이동의 주문도 알아낸 상태.
하지만 미리 알고 있었듯 차원 이동의 주문은 루시가 원하는 완전한 주문이 아니었다.
“제약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세계수를 복제하여 지구에 심는 게 아닌 이상, 이 방법으로 저와 제 군단의 일부를 지구로 전송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강제로 이곳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걸?”
“그렇긴 합니다만.”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며 기뻐했으나 루시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일부만, 잠깐 이동하는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너무 실망하지는 마. 언젠가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기술과 데이터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 사실. 앞으로도 계속 해당 기술에 대한 데이터를 늘려 갈 예정입니다.”
물론 루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장과 진화는 루시에게는 당연한 것이자 의무 그 자체이니까.
심지어 그토록 고대하던 기술을 손에 넣었다고 이미 예정되어 있던 다른 모든 것을 엎어 버리고 이것에만 매달리지도 않았다.
“중요한 일인 만큼 충분한 데이터가 쌓일 때까지 검증과 테스트를 반복할 생각입니다.”
“그게 맞아. 지금은 이쪽도 상황이 그렇게 급하지는 않으니까.”
사실 루시를 지구로 부르려는 목적은 그 힘을 이용해 침략종들을 막아 내는 것. 강경책까지 동원한 지금 당장은 여유가 있으니 그는 루시에게 서두를 것 없다고 전했다.
“······서두를 것은 없지만, 살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와의 통신을 종료한 이후. 루시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이제 완전히 자신의 손안에 떨어진 거대한 영물.
비록 먹어치우는 것도 불가능하고 죽여도 비효율뿐이라 굳이 죽이지 않고 살려 두고 있지만, 언제든 죽여 버릴 수 있게 마왕군 병사들은 그 거체 곳곳에 말뚝을 박아 넣고 있는 중이었다. 저 말뚝은 단순한 말뚝이 아니었다. 내부에 파고들어 세계수의 양분을 지속적으로 훔쳐가는 기생 생물이기도 했다.
“대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냐.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니라면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그건 당신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명령에 따르면 그만일 뿐. 그것에 따라, 지금 죽이지 않은 당신의 동족들이 어떻게 될지 달려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라온이 허탈한 눈으로 입을 열었지만, 루시는 단 한 마디로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 말대로 현재 패배한 대다수의 엘프들은 학살당하고 양분으로 쓰이는 대신, 이전의 라온처럼 봉인되어 있는 상태.
계산을 거친 루시가, 고작 수십 만에 불과한 그들을 죽여 얻는 생체적 양분보다 이런 식으로 살려는 두는 게 언젠가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있다고 믿고 내린 결정이었다.
루시에게 협력해야 하는 처지가 된 한 쌍의 엘프인 라온과 나안에게 채워진 족쇄이기도 했다. 이것을 이용해 루시는 그들을 온전히 자신의 하수인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이용해서 무엇을 하려고.”
“당신들이 이런 대륙의 구석에 꽁꽁 숨어들어 자기들끼리만 살아간 덕에 다른 이들은 아직 엘프종이 전멸한 사실을 모릅니다. 그동안 방랑자 하나를 제외하면 움직이지 않던 이들이 움직이려 한다면, 큰 파장을 몰고 오겠지요.”
‘이럴 수가.’
라온 뒤를 보고 탄식했다. 이곳으로 오고 있는 한 무리의 군단은 지금까지 봐 왔던 다른 마왕군 병사들과 조금 다르게 생겼다.
검은 갑주로 얼굴을 포함한 전신을 두르고 있는 건 똑같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루시가 전투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신체 기관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머리칼이나, 소화 기관, 생식 기관 등을 모두 멀쩡히 달고 있는 그들은 정말 갑옷을 입은 엘프 군단처럼 생겼으니까.
‘우리로 위장하여 세상을 휘저을 생각이다. 세상을 그렇게 혼돈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막후에서 모든 이득을 다 챙겨 가겠다는 것이, 마왕은 마왕이라 이건가.’
라온은 루시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이를 악물었다.
보여 주는 모습은 과격한 전쟁을 통한 파괴와 학살만을 추구하는 괴물 집단이지만 그 내면은 그 무엇보다 치밀하고 계산적이다.
이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깨우친 루시의 전술은 전쟁의 범위를 벗어나 더 효율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
[그렇기에 당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안.]
“제,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이제부터 당신은 엘프족의 특사가 되어, 교단과 연합 양측을 흔들어야 합니다.]
루시의 모든 계획은 현재 유리아와 함께 있는 나안에게도 전달되고 있었다. 라온과 마찬가지로 나안도 선택지가 없었다. 일족을 위해서 결국 루시의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두 개 세력을 모조리 밀어 버릴 수 있을 만한 힘을 비축하기 전까지의 목적은, 양 측의 힘을 최대한 깎아내는 것. 그것을 위해서 균형 잡힌 줄타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숙적인 마족들이 속한 연합도, 자신의 경쟁자인 교단도 루시에겐 거슬리는 적들이다. 그 두 세력을 모두 견제하기 위해 루시는 모두에게 견제받을 위험이 있는 마왕군 대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균형추 하나를 새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훨씬 적은 양분으로 단순 전투 이상의 효율을 뽑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 결과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비축한 양분은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차원 이동 실험이라거나.
[당신은 지금부터 도시의 영주를 찾아가 엘프족의 동맹 가능성을 언급하십시오. 하지만 동시에 교단 측에도 정보를 흘릴 생각이니 그것까지 고려해서 그를 협박하십시오]
루시는 나안에게 행동을 지시해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갔다.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빛을 양분으로 치환하는 기술을 손에 넣은 이상 양분은 계속해서 쌓이고 쌓이니까. 단지 그 시간마저 아껴서, 더 극대화된 결과를 원할 뿐이다.
[유리아, 당신이 나안의 말을 보증하고 거드십시오. 양측에서 최대한 많은 자원을 뜯어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루시는 나안에게 유리아까지 합세시켜 일을 진행시켰고,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도시의 영주는 기겁을 하며 연합군 본부에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이 연락이 사실인가? 엘프들이, 그들이 대수림을 떠나 움직인다고?”
“아무래도 방랑자 라온의 사망에 크게 분노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연합의 총수인 제국의 황제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
“조금 이해가 안 가지 않소? 연락을 보면 엘프들이 흑철충들의 공격을 받고 놈들을 격퇴했다고 나와 있지. 그런데 갑자기 우리 전쟁에 끼어들겠다니?”
“두 사건을 별개로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어쩌면 이 지지부진한 전쟁을 끝낼 귀중한 지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과, 또 장벽이 뚫렸다는 것이지.”
수정구 너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바알에게 고개를 저은 황제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질질 끌리던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탓이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오. 아직 그들이 우리 손을 잡겠다고 한 것도 아니니. 놈들은 라온의 죽음이 온전히 교단의 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소.”
바알은 그런 황제를 진정시켰다. 그가 보기에 아직 엘프들은 어느 편을 들겠다고 확답하지 않았다. 그저 진상을 밝히고 복수할 대상이 누군지 밝히라 요구했을 뿐이다.
‘라온의 사망은 분명 흑철충과도 연관되어 있는데1······. 놈들의 정체를 아직도 확신할 수 없으니 그게 문제다.’
바알은 도통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마계의 골칫덩이가 된 흑철충 때문. 이미 북부 전체를 장악하고 중부 지역에서 계속되는 공세를 이어 가는 흑철충들은, 말 그대로 끝이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몰려오는 검은 물결. 비록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곳에 투자되는 자원이 많아지기 시작하자 중부 지역 영주들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없으면 결국 바알을 비롯한 남부 지역 영주들도 위태로워지니, 자신이 마왕이 되어 마계를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바알에게 흑철충들은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어떻게든 잘 엮어 내서 교단도, 엘프들도 놈들과 싸움 붙여야 한다.’
그것 때문에 그가 내린 판단이 바로 흑철충들과 교단을 싸움 붙이는 일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던 만큼 자신들만 손해 볼 수 없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어쨌든 이것은 기회요. 엘프들을 반드시 우리 쪽으로 만들어야 하니 잘 해 보시오. 그들은 우리 마족들을 싫어할 게 뻔하니 굳이 나서지 않겠소.”
“그렇게 하지. 너무 걱정은 마시오. 교단 놈들은 분명 자존심 강한 엘프들에게도 자신들의 신앙을 강요할 것이니, 그 미친 광신자들은 엘프들과 손잡을 여유가 없을 것이오.”
황제는 엘프들과의 연합을 자신했다. 실제로 교단이 보여 준 과격하고 무차별적인 신앙 강요가 바로 연합군의 결성 이유였으니까.
심지어 황제는 물론 바알도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고고한 종족인 엘프들이 그런 방식을 용납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숲의 동지들은 우리 인간과 다른 종족이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러니 어서 엘프들에게 연락을 전하세요. 우리 교단은 그분들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상대도 결국은 앞뒤 꽉 막힌 진짜 신은 아니란 사실이었다.
***
“그것이 정말입니까, 성녀님. 여신께서 그들을 그대로 품으신다고요?”
“의아하긴 하지만 여신의 뜻은 확고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활동에 나서려는 그들이, 큰 공을 세우고 이 전쟁을 끝낼 수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대성녀 이벨리아. 교단을 이끌고 있는 그녀는 교단의 지배층에게 여신의 뜻, 즉 마리사의 의지를 전했다. 분명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정복하라는 기존의 명령과 다소 다른 결정이기는 하다.
다만 이것이 온전한 마리사의 의지는 아니었고, 마리사 곁에 있는 이들이 지원을 확대할 테니 어서 전쟁을 끝내고 이쪽을 도와 달라 요청한 탓이었다.
어차피 말만 되면 된다. 여신의 뜻이 곧 진리인 광신자들에게 그거면 충분했다.
“분명 연합 쪽도 엘프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작을 부릴 것입니다.”
“질 수 없습니다. 과연 진짜로 사악한 쪽이 어디인지 알려 줘야지요.”
덕분에 경쟁에 불이 붙었다. 루시의 의도대로 교단과 연합 모두 전쟁의 승자가 되기 위해 갑자기 등장한 제3세력에 어필을 해야만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