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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20화 (120/200)

< 120화-군단 (20) >

120화-군단 (20)

“살아 나온 게 기적이군. 다들 고생했소.”

“우리 힘만으로 살아남은 건 아니지.”

전투가 끝났다. 참전했던 각성자들은 물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원해서 새로운 상급종에게 덤벼들었던 이들도 가벼운 부상만 달고 목숨을 건져 복귀했다.

다만 그들 중 몇몇의 표정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으면서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지원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을 뻔 했으니까요.”

얼굴도 대충 닦고 수건을 대충 둘러 엉망이 된 얼굴과 옷을 가린 이지연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나마 적절한 지원이 있어서 이 정도이지, 없었다면 전멸했을 거라고. 그렇게 너무나 가볍게 말했다.

만약 성기사들이 지원을 가지 않았다면 최선두에 남았던 본인은 죽었을 텐데도. 그런 점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몰라요. 저희랑 말을 거의 섞으려 하지 않고 적들과 싸우기만 했어요. 하지만 느낀 점은 뭔가 평범한 각성자는 아닌 것 같다는 것.”

이지연은 교단의 성기사들을 꽤 정확히 판단했다. 하긴 신성력을 이용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싸우는 그들은 상태창의 권능에 의존하는 일반적인 각성자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뭔가 익숙한 점도 있었어요.”

“익숙하다? 그럴 리가.”

“진짜에요. 제 성좌가 가진 힘과 비슷한 그런······ 느낌.”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내게도 살짝 충격이었다.

단숨에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뭔가 연관이 잘 안 되는 그런 발언이었다.

“그들이 가진 힘이 왜 이지연 씨의 성좌와 비슷하죠?”

“와, 완전히 같은 게 아니라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내 표정이 너무 굳었는지 움찔한 그녀가 눈치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서둘러 표정을 푼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게이트니 던전이니 하는 곳에서 괴물들까지 기어 나오는 지금 시대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 데이터에 신성력은 마력과 신앙이 결합한 형태의 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성력이 꼭 한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니니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다고 판단됩니다.]

“그렇겠지?”

그렇게 이지연이 치료와 수습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루시는 의외로 별 문제 아닐 수 있다는 태도로 내게 사실을 짚어 주었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누군가의 게임 속 인물들에 불과한 성기사들의 힘이 이지연에게 힘을 주고 있는 성좌와 같을 리는 없으니까.

“어쨌든 성기사들에 대한 여론이 나쁘지 않아. 그들이 없었으면 승리도, 생존도 없었을 테니 당연하지. 바꿔 말하면, 앞으로 이런 일이 늘어나면 그들의 입지가 이 지구에서 늘어난다는 거야.”

[그렇게 두고 볼 수 없으니, 저도 실험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어디까지 진행되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즈음 되자, 루시가 내게 첫 번째 실험이라며 결과물을 들고 왔다. 깊은 잠에 빠진 이지연을 흘끔거린 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루시가 준비한 것을 확인했다.

바닥에 그려진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법진. 루시를 비롯한 일부 마왕군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종의 이동 주문은 연결점이 있는 세상 간의 틈을 억지로 넓혀 그곳으로 이동하는 것. 지구와 이곳의 연결점은 확실히 있지만 그 크기가 굉장히 작고 불균형해 지금까지 온전히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해당 실험은, 그 수준으로 작은 틈을 가진 연결을 과연 어디까지 벌릴 수 있느냐. 그것을 위한 실험입니다.”

입을 연 루시가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지구로 곧바로 오는 건 아니다. 루시는 저 마법진이, 극히 미세한 틈으로 연결된 또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틈이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그곳으로 아군 정찰병을 보내 보겠습니다.”

루시는 그곳으로 아주 작은, 벌레만 한 크기의 정찰병을 날려 보냈다. 일단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연결은 성공적입니다. 물론 다른 세상인 지구에서도 저와 연결된 나노·오메가가 멀쩡히 작동했으니 예측 가능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내 화면이 전환되었다. 루시의 목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어둠 속에 던져진 정찰병은 이내 어둠을 뚫고 빛으로 향해 자신이 떨어졌던 어둑한 동굴을 벗어나 단번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자세한 분석을 해 봐야겠지만, 환경은······ 이곳은 물론 지구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원래 그런 세상만 연결되어 있는 건가?”

메마른 대지나 가스로 가득 찬 대기 등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을 떠올린 내 생각과는 달리, 그곳은 완전히 평범한 세상이었다.

울창한 수림을 갖춘, 여차하면 지구의 정글이나 루시가 점령한 대수림이라 해도 믿을 만한 익숙한 녹색들.

[한계 시간은 2시간 04분 12초.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지켜보던 새로운 세상 탐방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끝나 버렸다.

일전에 말한 대로 일정 시간이 지나자 정찰병의 몸이 강제로 복귀한 것이다.

저 부작용을 없애려면 세계수가 반대쪽 세상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세계수를 만들거나 구할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네.”

“현재 그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다크엘프들입니다. 엘프들의 고향을 점령한 타락한 엘프들. 그들이 가진 흑마술이 엘프들의 것을 변형시키고 뒤튼 것이니, 어쩌면 그들이 더 개량된 형태의 차원 이동 마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찰병을 회수한 루시의 눈이 번득였다. 이미 다음 플랜까지 전부 짜 놓은 모습에 탄식이 나왔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루시는 멈추지 않는다. 조금도 쉬는 법이 없다.

애초에 루시에게는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실험을 진행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전쟁과 생산과 채집을 모두 진행하고 있으니까.

“다음 실험은 한 번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보낼 수 있는지, 혹은 이 마법진 자체를 변형시켜도 그 힘을 유지할지를 시험하겠습니다.”

나는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루시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전이었다면 발전하고 진화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하고 대견했겠지만, 지금은 살짝 달랐다.

***

“다, 다크엘프들이 어떤 이들이냐니. 설마 네놈!”

“말하기 싫다면 나안에게 묻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내가 답하겠다.”

루시는 말 그대로 쉬지 않는다. 쉴 필요도 없다. 애초에 휴식이란 개념도 인공지능에겐 해당되지 않는 개념에 불과하니까.

라온은 다크엘프들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 루시의 말에 기겁했지만, 나안에게 물으면 그만이란 말에 결국 억지로 입을 열었다.

“놈들도 한 때는 우리의 동족이었다. 먼 옛날에는 거인족에 대항해서 함께 싸우기도 했지. 하지만 그들은 더 강한 힘을 원한다면서 타락했다. 사악한 흑마술, 생체 실험, 약탈 등등.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당신들과 비슷한 수준이란 소리입니까?”

“설마 그들을 공격하려고?”

라온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루시를 바라보았다.

지금 루시의 상태를 아니까. 지금 루시는 교단, 연합 2개 세력과 동시에 경쟁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 힘을 하나로 집중하지 않고 또 쪼개겠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유가 넘치는군?”

“더 효율적인 방법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아직 제대로 모르겠지만, 때로는 구도를 비트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역으로 라온을 비웃었다.

자신의 행동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확신이 있는 탓이다.

“우리는 오래, 많이 싸울수록 강해집니다. 전장에 널브러진 시체와 피는 양분이고, 새롭고 강한 적의 힘은 먹어치울 먹이입니다. 정확도 40% 미만이긴 하지만, 제 계산식에 의하면 지금 이 상태로 교단과 연합을 상대해 승리하려면 약 1억 개체 이상의 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변수 없이 정해진 계산식대로 수많은 군세를 소모하여 승리할 필요 없이, 새로운 변수를 찾아내고 그것을 먹어치워 활용한다면 필요한 양분과 병력을 줄여 효율을 챙길 수 있습니다.”

“내가 잊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미친 괴물인지.”

라온은 루시의 대답을 듣고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잊고 있었지만 루시는 그의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 결국 그는 루시가 원하는 정보를 알려 주며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당신과 나안은 어쩌면 엘프로서,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을 영광을 누리게 될지 모르니까.”

이후 루시는 희미하게 웃으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또 다시 벌일 새로운 전쟁을 위한 계획이었다.

“숲의 친구들이여. 여신께서는 언제든지 여러분과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소!”

그리고 동시에 벌어지는 루시의 또 다른 계획은 이 계획을 실행하는데 큰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말은 제가 할 테니 라온, 당신은 뒤에서 응대만 해주십시오.”

“······알았다.”

루시는 엘프들의 데이터를 그대로 복제해 만든 엘프형 병사에 라온을 이용해 자신이 흘린 정보를 듣고 서둘러 대수림으로 달려 온 그들을 맞이했다.

***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수림이.”

“여유 넘치나 보군. 풍경 구경할 여유도 있고.”

자신들의 등장을 알린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대기하며 엘프들의 응답을 기다렸다. 사제 중 하나가 뭔가 이질감을 감지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른 일행들은 자신들이 맡은 임무가 너무 막중하여 긴장한 탓에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했다.

‘진짜다. 대수림이 마치 얼어 버린 것 같아.’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거 이 근처에 한 번 온 적 있던 그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어딘가 음산한 숲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다!”

그때, 그들이 기다리던 이들이 나타났다. 대수림의 주인이자 신비의 종족. 2인조로 나타난 그들은 엘프종 특유의 차림새를 한 은발의 여성과, 검은 갑옷으로 전신을 가린 듬직한 전사 하나였다.

‘엘프들이 저런 갑옷을 입었던가!?’

금속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엘프들의 습성을 알고 있던 그는 전신 갑옷을 두르고 투구까지 써서 얼굴을 가린 엘프 전사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동료들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말하라.”

은발의 여엘프가 입을 열었다. 일말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그 눈 역시, 어딘가 공허하고 텅 비어 있었지만 그들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성국에서 파견된 이들입니다. 최근 대수림이 겪은 일을 전해 듣고 크게 놀라신 성녀님께서, 저희를 보내 대화하라 명하셨습니다.”

“대화?”

“그렇습니다. 감히 대수림을 넘보려던 그 괴물들, 그 괴물들은 마계에서 온 괴물들입니다.”

그들은 눈치를 봐 가며 자신들의 용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괴물들의 정체를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그 사악한 벌레 집단은 마계 영주들이 키우는 병기의 일종으로······.”

‘웃기는군.’

루시가 조종하는 엘프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선동을 시도했다. 그 모든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는 라온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게 일종의 쇼로 보일 뿐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교단의 특사들은 어떻게든 마왕군을 연합군이 보낸 마계의 하수인으로 깎아내리며 엘프들을 자신들 쪽으로 포섭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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