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기만과 지배 (1) >
121화-기만과 지배 (1)
흑철충이라 불리는 괴물들은 마계 영주들이 부리는 괴물들이다. 실제로 교단과의 싸움에 나타나 훼방을 놓고 이쪽을 공격했다. 그러니 마계 영주들과 연합한 연합군은 곧 엘프들을 공격한 적이다.
이것이 교단이 내세우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일부인 파르헨 영주가 말하길, 그 괴물들은 자신들도 공격했다고 하던데.”
“기만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마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면 마족 놈들이 아직까지도 이곳에 붙어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놈들은 결국 자기 주인인 마왕도 배신한, 믿을 수 없는 놈들입니다.”
루시가 모르는 척, 자기는 고민된다는 척 말 끝을 흐리자 교단의 특사들은 필사적으로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렇게 여지를 계속 남겨야 그들이 더 집착할 것이라 짐작한 루시는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빛의 교단에 대한 악소문도 들었다. 오직 빛의 여신 하나만이 이 세상의 유일신이며, 모든 이들은 너희들의 방식으로 여신을 섬겨야만 한다고.”
“물론 그렇습니다만, 여신께서 직접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이종족에겐 이종족만의 방식이 있으니 인간의 방식을 강요 말라시는.”
“여신이 직접, 말했다라.”
대성녀 이벨리아라면 모를까 여신은 결국 이름 모를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루시는 피식 웃었다.
여신, 정확히는 여신이라 불리는 그 인간 주변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 정부는 교단이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겠지. 그곳의 자원을 끌어 써서 지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긴 해. 어쨌든 지구에선 나도 그들과 같은 편이니까. 하지만 루시 너는 아니겠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현은 쓰게 웃었다.
교단도, 루시도 결국 목적은 이 세상을 정복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두 집단이 평화롭게 반을 갈라먹고 하하호호 잘 지낸다는 선택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여신의 뜻이라는 진심을 확인했으니 저울질을 계속하겠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자원을 번다면, 아군은 더 이상 그들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더한 교단의 간절함을 간파한 루시는 계획을 밀고나갔다. 어디에 붙을지 간만 끝까지 보면서 양쪽 모두를 경쟁시키는 게 그 목적이었다.
“일단 장로님들께 너희의 진심을 전하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를 믿을지, 아니면 연합을 믿을지 나도 모른다.”
“부, 부디 잘 전해 주십시오. 이것은 약소하지만 저희의 진심을 담은 선물입니다.”
루시의 말에 희망을 느낀 건지 불안을 느낀 건지 모를 만큼 눈이 흔들린 교단의 특사는 품에서 잘 포장된 무언가를 꺼내 루시에게 엘프로 위장한 루시에게 건넸다.
그것은 지구의 기술이 듬뿍 들어간 화려한 장신구였다. 심지어 진짜 보석들도 아니고 전부 큐빅으로 만들어진 기계와 공장의 힘 그 자체.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내었다.
“어리석은. 엘프종은 보석으로 사치하지 않는다.”
“그, 그건 그렇지만 그것은 특별히······.”
지켜보던 라온이 투구 속에서 혀를 차자 당황한 그들이 움찔거렸다. 엘프종의 특성은 알고 있지만, 그걸 뛰어넘을 화려함이라면 먹힐 줄 알았던 탓이다.
“일단 전달은 하겠다. 그런데 내가 장로님들의 말을 엿듣기로는 이런 것보다는 최근 당신들이 즐겨 쓰는 신무기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던데.”
반면 루시는 그것을 받아 챙기고 슬쩍 다른 이야기도 흘렸다. 루시가 교단이 지원 받고 있는 화기와 총기에 대해서 언급하자 교단 사람들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
“보니까 그들도 무한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랬으면 이미 완전히 화기로 무장하고, 전차나 헬기 같은 것들도 넘겼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그 귀중한 물건을 빼낼 수 있다면 그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연합군 측에는 뭘 요구하려고?”
“식량이면 명분도 효과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능력을 장착한 루시는 그것을 극한으로 활용했다. 창현의 질문에 답한 루시는 이미 세 치 혀로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두 집단을 휘청거리게 만들 계획을 전부 세워 두었다.
“아예 양측 다 뒤통수 때리고 독자적인 제 3 세력으로 발전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특히 연합 쪽에 지금 상황에 불만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던데.”
그 역시 이 일에 흥미를 느끼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때 루시를 대신해서 이런 판단을 하던 만큼, 전쟁을 벌이며 무식한 물량전과 소모전을 벌이는 때보다는 자신이 관여할 일이 많았으니까.
“계획대로 일이 수월히 풀린다면 다크엘프들에게 온전히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루시의 근본인 전쟁과 포식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멈춘다면 그것은 곧 또 다른 전쟁을 벌이기 위한 잠깐의 휴식일 뿐. 금방 힘을 비축한 루시는 다시금 전쟁을 준비했다.
“세계수를 통해 연결된 그들의 세계는 시간 제한 없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그곳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든다면 이 세상이 가진 에너지 균형을 박살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루시에게 침탈과 착취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한 세상의 에너지 총량은 정해져 있다. 단지 그것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달린 것뿐이며, 결국 드넓은 면적과 많은 에너지 비율을 차지하는 기존의 기득권을 보다 효율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좁은 땅과 에너지로 아등바등 거리는 것보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 쓰는 게 당연히 더 편했다.
“참 당연하면서도 위험한 생각인걸.”
식민지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던 과거의 제국들을 떠올린 그가 그런 루시의 생각을 알고 피식 웃었다.
물론 루시는 근본적으로 그들과 다르지만 결국 경쟁의 승리를 위해 전쟁과 약탈을 서슴지 않는 모습이 극은 결국 통한다는 말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다크엘프들은 따지고 보면 교단과 연합군보다 더 대단하다고. 지금 네가 있는 곳에서 벌어진 경쟁에서 승리해 한 세상을 온전히 점령한 이들이니까. 이길 수 있어? 까딱하면 역으로 당해.”
“저는 그들을 실제로 보지 못해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오히려 좋습니다.”
그는 자신 있냐고 물었지만 루시는 아직 데이터가 부족해 제대로 된 계산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전과는 달리,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사고가 정지하거나 아예 회피해 버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쌓인 경험으로, 데이터가 없는 미지의 순간을 추론하고 예상하는 게 가능해진 덕분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다크엘프들과의 전쟁을 원하는 루시를 막지 않았다.
‘차라리 더, 더 많이 성장해. 미숙하고 비틀리지 않고 나와 온전히 대화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시 선택을 내린 것이다. 루시를 두려워하고 억제하려 할 바에는 차라리 루시를 더욱 더 성장시켜 자신과 대등한 대화, 혹은 그 이상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
“휴가요?”
“협회장님이 휴가 안 쓰면 가만 안 둔다 하셔서요. 중간 중간 쉬는 날이 많아서 괜찮은데.”
“아니요. 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 방에 박혀 루시와의 통신 중에 이지연의 연락이 왔다. 앞으로 일주일은 출근하지 말라는 통보였다.
협회장이자 사장 백승철이, 게이트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뛰어 온 이지연에게 강제적인 휴식을 명령한 탓이다.
그녀가 지난 날 얼마나 많이 다치고 버겁게 싸워 왔는지 생각하면 사실 당연한 조치였다.
“무슨 일 생기면 어쩌죠? 사람들이 죽으면요.”
“몸과 마음을 챙겨야 더 많이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게 전화한 이지연의 목소리에 불안함이 가득하다. 그동안 그녀가 사람들을 지키는 것에 보여준 과한 집착과 워커 홀릭스러운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정신과 상담이 필요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각성자 상당수가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며 은퇴하거나 치료를 받는 상황이다. 아무리 강철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녀의 정신은 결국 나보다 겨우 2살 많은 26살의 여자일 뿐.
“와 줘요. 정신과 상담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제가요?”
“어차피 할 거 없지 않아요?”
그녀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요즘 너무 바빠서 취미고 인맥이고 다 내친지 오래라, 분명 휴일에도 할 일이라곤 누워서 루시를 지켜보는 것뿐이니까.
“요즘 저희 사이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늘었는데.”
“이제 알 바냐고 생각해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거절할 수도 없으니,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필요한 노동입니다.]
“그녀가 있어야 내가 편해져.”
[꼭두각시를 하나 더 구하면 됩니다. 뇌아귀를 이용해 지배하고 세뇌하면 가능합니다.]
“내 마음과도 관련된 일이야.”
[하지만.]
“그녀를 네 경쟁자로 여기지 마 루시. 넌 그녀와 달라.”
그러나 내가 나가려는 순간, 루시는 휴대폰을 웅웅거리며 나를 붙잡았다.
루시가 이지연을 질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그 질투가, 그저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의 투정으로만 알고 있었다.
[번식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든 완벽한 인체와 유전자를 사용한다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루시는 이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아무 생각 없으니까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니까 오해하지 마.”
혀를 찬 나는 그대로 집 밖으로 나섰다. 루시는 그 이후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 번 신경이 쓰여 버린 나는 자꾸 휴대폰을 흘끔거렸다.
“일부다처제? 왜 그런 걸 검색하는 거지? 그만두고 돌아와. 남들이 보면 큰일 나.”
물론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별짓 다하고 있다.
신호에 걸린 사이. 나는 내 옷 소매에서 굼실거리는 촉수를 뻗어 내 휴대폰을 조작하는 루시를 보고 얼척이 없어 탄식했다.
[거부감이 없으시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아직 할 일 많거든? 연산력을 그런 데 낭비해도 돼?”
결국 루시를 어르고 달래느라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한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곳은 매일 같이 찾아 온 이지연의 아파트 앞. 평소라면 여기서 기다리며 그녀를 태워 가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발걸음이 무거우신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돌아가시죠.]
“이, 이거 놔, 옷을 무겁게 만들어도 소용없어. 두고 가기 전에 이제 그만해.”
모래 주머니 찬 것보다 무거운 것 같은 몸을 끌고 아파트의 엘리베이터까지 타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쯤 되니 루시도 포기하고 다시 얌전해졌고, 나는 이지연의 집 문 앞에 서게 되었다.
< 121화-기만과 지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