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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22화 (122/200)

122화 기만과 지배 (2)

[너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 결국 그 누구도 돌보지 못한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쉽게 잊히질 않아.”

아무도 없는 넓은 신축 아파트.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집은 결코 값싼 집이 아니다.

중소규모 회사에서 흔하디흔한 일개 사원으로 일하던 이지연에게는 그저 꿈에서나 그리며 살아보길 희망하던 그런 집. 하지만 막상 영웅이 되어 큰돈을 벌고 명예를 얻어도 자기 혼자 있는 집은 더 넓어진 만큼 더 쓸쓸했다.

그녀가 괜히 사람들을 구하는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니다. 사실 본인은 원래 지키지 못했으니까. 지금 그 대가를 이렇게 치르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 것이다.

“문 열어 주시죠.”

“아!”

그러던 와중에 그가 진짜로 왔다.

강제 휴가란 소리에 평소같이 수련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 허공만 보고 있던 그녀는, 와 주면 안 되냐고 넌지시 흘린 자신의 말에 진짜로 찾아온 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지, 지금 열어 줄게요.”

전화를 내려놓은 그녀는 한걸음에 달려가 1층 문을 열어 주었다. 공허하던 마음이 갑자기 꽉꽉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금방이라도 멎어 버릴 듯 느리게 뛰던 심장도 빠르게 쿵쿵거렸다.

“크흠.”

이지연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별로 어지르지도 않는 집. 손님을 맞을 수 있게 깨끗하다.

“어, 어서 와요.”

곧 직접 현관문을 열어 준 그녀는 그를 보았다. 세간에는 그저 자신의 담당 매니저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사람이.

“설마 계단으로 왔어요?”

“조금 뛰어서.”

그런데 그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분명 맨몸인데 뭔가 무거운 물건이라도 들고 온 듯이. 그러나 그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어서 들어와요.”

본인도 굉장히 긴장한 상태라 이런 사소한 일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이지연은 그를 안으로 들였다.

‘공기부터 달라졌어.’

그 순간 그녀는 알아차렸다. 굳이 신경 쓰이는 남자가 아니어도 그저 누군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 차가운 집 안 공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 사실 진짜 올 줄 몰라서.”

“어차피 저도 일 없으면 한가해서.”

“그냥 나갈까요?”

부엌으로 달려간 이지연은 서둘러 뭐라도 꺼내 담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거실에 있던 그는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것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것들은 넓은 거실 벽 한쪽을 전부 채우고 있는 사진들. 그녀 자신의 사진은 아니었다.

“불편한 이야기라면 굳이 안 묻겠습니다.”

“아니요.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숨길 일도 아니죠. 굳이 먼저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눈치를 보며 한 발 물러서니 이지연이 고개를 저었다. 벽에 가득한 사진들. 그녀가 힘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지키는 것에 집착하게 된 이유.

“할머니, 저희 부모님, 제 동생······. 제가 16살 때 모두 돌아가셨죠. 저희 집에 난 화재였는데, 저만 살아 나왔어요.”

“유감입니다.”

“제가 그때 지금 같은 힘이 있었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텐데.”

탄식한 그녀는 나름 덤덤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0여 년 전 있었던 참사, 그리고 무력했던 자신, 어른들은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데려 나온 동생마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부서짐을 느꼈다.

“처음 각성한 순간에도 그날이 떠오를 정도라, 그래서 여유가 없었나 봐요.”

“······.”

희미하게 웃으며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지연의 모습에 그는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 한 세상을 먹어치우려는 거대한 군세를 부리는 입장이었지만, 막상 그 역시 인간으로서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이런 재미없는 이야긴 그만두죠. 근데 진짜 저희 집 할 거 없는데 나갈래요?”

“편한 쪽에 맞춰 드리죠. 힘든 일 하는 건 이지연 씨인데.”

“편한 쪽에 맞춘다고요?”

애써 분위기를 바꿔 보려던 이지연이 그의 대답을 듣고 히죽 웃었다. 그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지연은 마침 재밌는 게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저희 말 놓을까요, 이제?”

과연 그가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마계 중부 전선에서, 아군의 병력들을 상대로 적들이 새로운 전술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티나게 굴지는 마. 원래 그런 건 네 선에서 해결해 왔잖아.”

이지연이 화장실을 간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의 빈자리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는 휴대폰을 웅웅거리며 울리는 루시의 목소리를 듣고 혀를 찼다.

내가 밥을 사 주겠다는 이지연과 함께 한 끼에 몇십만 원이나 하는 식사를 하러 온 순간부터, 자꾸 내 주위를 돌리려고 호들갑에 가까울 정도로 별 걸 다 보여 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건 꼭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실제로 루시가 보여 준 것 중에는 내가 봐야 할 부분도 있었으니까.

“이게 뭐지? 연합군 측에서 우리를 설득하려고 가져온 것들인가?”

[그렇습니다. 비록 그리 많지는 않지만 양분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며, 그들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들입니다.]

루시가 보여준 것은 유리아와 나안이 대로를 가로질러 대수림으로 향하는 대량의 수레와 마차들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꽤 상징적인 장면이라 생각했다. 루시의 이간계가 먹혀들어 교단과 연합이 서로를 깎아 먹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이 작업으로 루시는 굳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도 적들의 힘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게 가능해졌다.

“그러면 이렇게 아낀 양분은.”

“세계수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세상, 다크엘프들이 점령했다는 그곳을 침공하는 데 쓸 생각입니다.”

화면을 바꿔 자기 몸을 보여 주는 루시가 손을 들어 직접 세계수를 가리켰다. 이제 완전히 우리 손안에 떨어진 저 거대한 나무를 통하면, 루시는 이미 연결이 활성화된 다른 세상에 자신의 힘을 투사할 수 있다.

만약 그곳을 루시가 먹어치우는 데 성공한다면, 이 파워 게임은 그대로 끝난다. 교단도, 연합도 더 이상 루시의 체급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설마 지금 바로 가려고?”

“충분한 정찰을 먼저 시도하고 이후 그곳의 전력을 파악해 그에 맞는 효율적인 움직임을 가질 것입니다.”

루시는 무턱대고 병력을 꼬라박는 비효율적인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하던 대로, 차분히 차근차근 정보와 데이터를 수집해 충분한 함수식이 나올 수 있게 만들면 계산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선택할 수 있다.

“지금 극소규모로 연 게이트를 통해 그곳에 정찰병을 투입하겠습니다.”

루시는 준비한 정찰병들을 그곳에 침투시켰다.

작은 날벌레 혹은 날짐승의 형태를 한 그것들은 일제히 게이트로 몸을 던져 넣어, 그 내부의 세계로 퍼져 나간다.

“여긴가? 다른 세상.”

지구도, 루시가 있는 세상도 아닌 전혀 다른 제 3의 세상.

루시가 시간 제약이 있는 미완성의 차원 이동진으로 잠깐 맛만 보았던 때와는 다르다. 엄연히 이어져 있는 세상을 세계수로 틀어막은 것이기에, 루시가 투입한 마왕군은 별다른 제약 없이 그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척박한 황무지?”

나는 처음 보인 환경을 본 순간 마계 일부분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풍요로운 생명 그 자체인 대수림에 살아가던 엘프들의 고향이라더니, 어째 예상과는 좀 다른 분위기다.

“아직 생물체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멀리 가 보겠습니다.”

루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찰병들을 더 멀리, 더 넓게 흩어 보냈다.

하지만 이지연이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뭔가 보이는 게 없었다. 설마 극지에 떨어진 건가 싶을 정도였다.

“혹시 뭐 보면 알려 주고.”

나는 일단 휴대폰을 집어넣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지연은 멋쩍게 웃으며 배고프다고 징징거렸다.

[무언가 발견했습니다.]

덕분에 루시의 보고는 밥을 거의 다 먹을 때쯤 다시 받게 되었다.

배불러하는 이지연의 눈치를 보며 슬쩍 휴대폰을 본 내 눈에 보인 것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나무 하나였다.

마치 세계수 같은 거목은 거무튀튀한 줄기를 가지고 있었고, 잎은 하나도 없는 음산한 가지를 사방에 늘어놓고 있었다.

“저게 뭔지 알아?”

“엘프족의 정보에 따르면, 저 거목이 바로 다크엘프들의 세계수, 타락수입니다.”

“뭔가 느낌이, 저 나무가 이 일대의 모든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는 느낌인데.”

“그게 맞습니다. 일대의 마력의 흐름이, 모두 저 나무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같이 노니까 즐겁다며, 내일 또 보자고 말하는 이지연을 일단 집으로 올려 보내고 다시 차에 탑승한 건 늦은 밤이 되어서.

하지만 나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휴대폰을 붙들고 루시와 통신했다.

이미 꽤 넓은 면적을 탐색한 루시는 이 일대에서 생명이 존재하는 곳은 저 거대한 나무 근처 뿐이라고 말했다.

“다가가서 좀 더 자세히 볼 수는 없어?”

[불가능합니다. 저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파동을 몸집이 작은 정찰병들은 견딜 수 없습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분명 내가 듣기로는 다크엘프들도 결국은 엘프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생명체’다. 희노애락을 포함한 보편적인 감정을 다 느끼고, 먹고 자고 해야 하는 그런 생명체.

비록 엘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잔혹하고 폭력적인 종족이라 해도 루시의 마왕군처럼 오직 명령에만 따르는 이들이 아닌 이상 이렇게 음산한 분위기만 만들 리가 없는데.

[라온에게 물어보니 자신도 왜 다크엘프들이 모습을 감추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게이트 근처에 양분을 투자하여 둥지를 만들고 본격적인 탐색을 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나는 일단 집에 갈 테니까.”

루시의 계획을 들은 나는 일단 시동을 넣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주변에서 묘한 기류가 감지됩니다. 살의, 이것은 살의입니다, 창현 님.]

하지만 내가 차를 주차하고 내 방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나노·오메가를 활성화시킨 루시는 내게 뜻밖의 경고를 날렸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내 집 주변에?”

[기척이 명확히 느껴지지 않습니다. 호흡마저 조절할 수 있는 실력자이거나, 엄폐물 등에 몸을 가리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슬쩍 어둑한 길목을 흘끔거린 나는 탄식했다. 왜 사람들이 시설 좋은 좋은 동네에 살려고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대체 왜지?”

설마 나를 노린 일인가 싶었다. 남들이 보는 나는 그저 평범한 일개 신입 회사원에 불과하니까.

[제 의견이지만 여기서 몸을 피하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 역으로 적들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들의 본거지를 부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말이 맞아.”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선택지를 골랐다. 루시의 말대로 무턱대고 피하면 정체조차 모르는 적들은 언제 다시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

일단 대체 누구인지, 목적이 뭔지는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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