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기만과 지배 (4)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것이 제 결정입니다.”
“무엇을요? 호, 혹시 지구로 가는…….”
“아니. 지금은 완전히 다크엘프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라비즈다, 그곳을 점령합니다.”
언제나 효율적인 움직임을 중시하지만 때로는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 무엇을 얼마나 감수할지다.
루시는 균형을 부술 수 있는 양분을 끌어오기 위해 점령하기로 결정한,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공격 계획을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혹시 드디어 지구로 가나 싶어 기대했던 김서윤은 풀이 죽었지만, 엘프 출신인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흥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 수밖에. 그동안 전승으로나 듣던 곳이다. 기어코 적들에게 넘어간 그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엘프라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라온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쪽 세상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면 직접 선발대를 이끌고 가 보시죠. 가서 당신의 동족들을 상대로 경쟁에서 승리한 승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십시오.”
루시는 그런 라온에게 선발대를 맡겼다. 어쨌든 한때 엘프였으니 어쩌면 예상치 못한 효율 혹은 변수를 만들어 주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었다.
“이렇게 막 자원을 쓸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군. 정말로 연합과 교단 사이의 줄타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장담컨대 제가 가진 데이터는 당신의 수천 배에 달합니다. 제 계산식은 틀리지 않습니다.”
라온은 루시가 이번 일에 투입하는 자원량이 나라 하나를 일격에 증발시킬 수 있을 정도란 사실을 깨닫고 탄식했지만, 어차피 루시는 모든 행동을 변수들을 조합해 만든 계산식 내에서 결정한다.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니 망설임이 있을 리가 없다. 결국 라온은 세계수 너머의 세상, 라비즈다에 둥지를 만들 선발대와 함께 그곳으로 넘어갔다.
“김서윤, 지구에 가고 싶습니까? 가서 당신의 가족을 보고 싶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 루시는 대뜸 김서윤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 *
“이곳이 전승에 나오는 우리의 고향. 타락한 엘프들이 더럽힌, 신성한 곳.”
[대부분의 면적이 그 어떤 생명도 느껴지지 않는 죽음의 땅입니다.]
세계수가 봉인하던 차원문을 넘은 라온은 도착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침음했다.
대전쟁을 치르며 말 그대로 대륙 대부분을 돌아다니고 거친 마계 땅도 가본 라온이지만, 이곳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 황무지라도 그곳에 적응한 괴물이라도 바글거리는 마계와 달리 이곳은 정말로 죽은 땅이었다.
[정말이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정령의 기운마저.]
“이런 곳에 둥지를 틀 수 있다고?”
그의 정령인 티타니아 역시 이곳에 따라와 불쾌함을 호소했다. 마왕군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라온조차 이런 곳에서 둥지를 만든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처음에 소모되는 투자 값은 이미 예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에게 불가능은 없다며 기어이 방법을 찾아내었다. 대기 전체를 뒤덮은 가시질 않는 짙은 먹구름에 태양 빛조차 없는 극한의 환경이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열은 있는 법.
루시는 첫 터전을 용암이 펄펄 끓어 흐르는 화산 지대에 잡았다.
“허.”
라온은, 끝도 없이 몰려오는 건설병들이 자신의 배에 가득 채워 온 점액 형태의 나노들을 지면에 토해 내는 모습을 보고 작게 감탄했다.
점액 속, 그 무수한 세포들이 루시의 명령을 받아 짜인 코드대로 새로운 모습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증식한다.
그 형태는 열기를 양분으로 바꿀 수 있는 거대한 생체 기관. 곧 완성된 이 열 발전 기관들은 자체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며 일대를 뒤덮는 작업에 가속을 붙였다.
[늘어나고 있어. 아무것도 없던 이 땅에, 생명이 늘어 가.]
땅의 정령 티타니아는 지면을 뒤덮고 파고드는 마왕군의 생체 조직에 경악했다. 나노들도 결국 생명은 생명.
티타니아의 입장에서는 마왕군은 이 끔찍한 지옥을 단숨에 테라포밍시키는 생명의 수호자였다.
‘이것이 적응이고, 이것이 진화인가. 이것이 생존을 위한 마왕의 힘인가!’
라온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에게 루시는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세상을 위협하는 사악한 악적. 그러나 루시가 주장하고 증명하는 성장과 진화라는 가치에는 슬슬 눈을 뜨고 있었다.
결국 자신과 동족은 루시의 그런 힘에 패배하여 도태한 것이다. 자신들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진화하려 노력했다면 승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기어코 뿌리를 내린 루시의 힘을 보면 그럼에도 힘들었겠지만, 그는 지금 진심으로 과거를 후회했다.
[그 후회, 이번에는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고 쓸모와 효율을 증명한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겠습니다.]
“나는 반드시 이룬다.”
그런 라온의 마음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는 루시는 그에게 속삭임을 전했다.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을.
그것은 그를 각성시키고,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으니.
[능력을 증명해 보십시오, 과거의 영웅. 당신에게 주어진 것은 그 둥지에서 생산되는 양분과 병력이 전부이니,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제게 입증해 보이십시오.]
그가 가진 전술 지휘 및 전투력을 높게 평가한 루시는 자신이 철저히 떨어트리고 망가뜨린 엘프 영웅을, 그 마음마저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로 만들어 현장 지휘관으로 써먹었다.
‘기만하는 사악한 악마 그 자체지만, 그 탈은 때로는 기적으로 유혹하는 천사의 모습도 갖는구나.’
자신의 신세를 통감한 라온은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루시의 의도대로 움직이며 마왕군 일부를 통솔하게 되었다.
최우선적인 목적은 둥지의 크기를 불리며 정찰병들이 정찰하지 못했던 곳을 정찰하는 것.
우선적으로 정찰병들을 생산한 그는, 마력 파동에 견딜 수 있는 중대형의 정찰병들로 목적지는 물론 주변의 다른 곳들도 탐색하게 만들었다.
혹시 다른 화산 지대를 발견하면 그곳에도 둥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 * *
[전과 같이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루시는 라온이 보낸 정찰병들을 통해 자신이 지난번에는 탐사하지 못했던, 짙고 음울한 기운의 중심부를 볼 수 있었다.
요동치는 마력은 사실이지만, 덩치가 커진 정찰병들은 그 정도로는 타격을 받지 않는다.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나?"
[안개 역시 그대로이니, 내부로 진입해야 합니다.]
그곳을 가리고 있는 짙은 안개도 그대로였다. 루시는 굳이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정찰병들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어차피 소모품으로 쓸 각오도 했으니까.
[안개 내부 진입.]
루시는 이내 그 안개 내부로 돌입했다. 내부 역시 뿌연 안개로 뭔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직 가운데서 느껴지는 마력의 흔적만으로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피격당했습니다.]
그 순간 정찰병들이 공격당한 게 그때였다. 날짐승을 베이스로 개조된 마왕군의 정찰병들은 강하지만, 상대가 더 강하고 많았다.
“키, 크이익!”
“캬아악!”
다만 상대들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생김새는 토착 비행 생물 같은 괴물들이, 눈을 까뒤집고 무작정 몰려든 것이다.
[……아군의 세포가 빠른 속도로 감염되기 시작.]
그러나 단순한 포악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적들의 공격에 일부가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통해 침투한 무언가가 마왕군 병사들의 세포 단위로 공격해 명령 체계에 장애를 발생시켰다.
[감염에 대응 불가능. 세포 사멸 및 변이, 아군 세포 공격.]
루시는 상대의 힘에 순간 사고가 느려졌다. 세포를 파괴하고 감염시켜 그 세포를 아군으로 만들어 버리는 상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병사들의 제어권마저 빼앗겼다.
다른 건 몰라도 제어권을 뺏겼다는 소리가 굉장한 충격이었다.
[타락 세계수.]
결국 마지막 남은 정찰병과의 연락도 끊기기 전.
루시는 가까스로 안개를 뚫고 그 내부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마치 태풍의 눈같이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그곳에서, 하늘에 우뚝 서 오른 것은 자신이 이전에 관측했던 거대한 나무.
일대의 양분을,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황무지가 될 때까지 빨아먹은 저 거대한 거목의 진정한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연결 완전 종료.]
그게 마지막이었다. 루시는 완전히 변이를 일으킨 정찰병의 몸에서 강제로 튕겨 나왔다.
* * *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감염과 변이라니?”
[그것이 타락 세계수의 힘입니다.]
“그럴 리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대응 방법이 필요합니다.]
루시의 이야기를 들은 라온은 크게 당황했다. 그에게는 감염이나 변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너조차 모르는 것을 내가 어쩌란 말이지?”
[맞는 말입니다. 방법을 찾아서, 그때 다시 지시하겠습니다.]
황당하다는 그의 반응에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분명 라온의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가 할 일은 루시가 제공하는 데이터로 변수와 새로운 계산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김창현 님.”
루시는 다른 공간에 있는 자신의 육체를 움직여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대체 그걸 왜, 이 상태에서 묻는 거지?”
정작 창현은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단독 행동을 저지른 루시를 바라보았다.
* * *
“불완전한 차원 이동 주문이 지구에도 정상 작동하는지 시험해야 했습니다.”
“하, 하필 지금?”
나는, 어제 좀 안 좋은 일을 겪고 뜬눈으로 밤을 새다 겨우 잠든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솔직히 꿈을 꾸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무게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 찰랑거리는 짙은 흑발도 진실이었다.
“루시.”
“제가 왔습니다. 정말로…….”
내 위에 올라탄 루시는, 나를 내려다보며 딱딱하고 거친 갑각에 쌓인 손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얼굴을 만졌다.
“김창현 님 주변에서 발생하는 위협을 차단해야 할 필요를 느껴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큰일이긴 했지만 별문제 없이 해결했잖아. 정말 그 이유가 전부야?”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자신도 손을 뻗어 루시의 몸을 만졌다. 딱딱하기 짝이 없는 갑각과, 부드럽고 따뜻한 얼굴까지.
“내가 지연이를 불러서 그렇겠지. 그렇지?”
“제가, 그 인간 암컷보다 더 뛰어납니다!”
“나도 알아.”
루시의 마음은 나도 안다. 과연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달래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러는 데 실패했다.
“아직…… 아직입니다. 제가 반드시 더 완벽하고 지속적인 방법을 찾아오겠습니다.”
루시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내 몸을 붙잡았지만 이미 그 몸은 뒤틀리고 있었다.
시간이 전부 닳아 버린 것이다. 아마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느라 안 그래도 짧은 시간을 허비한 모양이다.
“……좀 놀랐다.”
루시는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윙 하고 울리는 휴대폰.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루시를 보고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