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기만과 지배 (7)
“그 정도라고? 상대의 힘이?”
[최대한 다양한 경우에서 약점을 찾기 위해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상대가 가진 능력 전부를 파훼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렵지 않게 상대를 생포해서 분석을 진행한 루시는 답지 않게 조금 힘들 것이라는 보고를 보내 왔다. 정말 모든 수를 다 써 봤는데, 결론적으로는 상대가 가진 감염력과 복제력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놈들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더 투자하거나 전혀 다른 방법으로 상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복제, 적응, 변이 능력에 비해 감염력은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하다고 했던가?”
루시가 다양한 강점을 가지듯, 한 세상을 점령한 듯한 저들도 다양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 강점들 중 하나가 다른 세포를 잡아먹고 자신들의 일원으로 만드는 감염력인데, 루시는 그것을 억제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
[아군 병사의 숨이 붙어 있는 이상 감염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양분 소모율에서 손해를 보지만, 이 방법을 쓰면 적들과 대등한 조건에서 전면 전쟁을 벌일 수 있습니다.]
“변종 좀비 떼와 물량전.”
탄식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과연 이길 수 있을까? 루시 역시 대규모 군세를 움직이는 데 자신이 있었지만 루시는 지금 이곳에 모든 여력을 쏟을 처지가 못 된다.
[규모에 자신 있다는 적들의 오만함을 깨부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끄는 게 더 손해라면 차라리 싸우는 게 맞겠지.”
그러나 루시는 전쟁을 치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완전히 숨을 끊어 놓는다면 그 질긴 좀비 놈들도 결국 일개 유기물 덩어리일 뿐이니까.
적들만 우리를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도 적들을 먹어치울 수 있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들의 힘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아군의 세포전 능력도 급상승할 것입니다.]
이미 루시는 특유의 탐욕을 발동한 이후다.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강한 적과 새로운 힘.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루시의 행동을 가로막을 순 없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쪽에서도 파장이 큰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이건 일종의 혁명이니까.”
다만 루시는 자신도 바쁜 와중에 내 상황도 살폈다.
쓰게 웃은 나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지금 내 주변은 시끌시끌한 상태다.
* * *
“마법 코드는 혁명입니다. 지금껏 그 적수가 없었던 우리 인류가 최악의 대적자들에게 승리할 단서가 될 수 있는 혁명!”
협회장 백승철은 대통령을 비롯한 중요한 인물들 앞에서도 마법 코드의 위력과 필요성을 설파했다.
루시에게는 별건 아닌 마법 코드 몇 줄이 이곳에서는 진짜배기 기적이 되었으니까. 특히 전쟁으로 너무 큰 국익을 포기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 되었다.
비록 몇몇 인물들은 그 대단한 기술을 독점하여 더 큰 이득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점차 강한 각성자와 국가 간의 갑을 위치가 뒤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아무 의미 없는 욕망이었다.
[고작 그까짓 것으로 들썩이는 것으로 그곳의 사정이 얼마나 불균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제가 넘어가야 합니다.]
“맞아. 다만 지금은 힘든 게 사실이잖아.”
제아무리 루시라도 지금 당장 여기까지 힘을 뻗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은 예상하지 못했던, 좀비들이 점령한 세상 라비즈다를 먼저 점령하는 것이 우선.
실제로 루시는 이미 1차적인 전쟁을 벌일 준비를 마쳤다.
[대수림을 공격했던 병력의 일부를 그대로 투입하고 전 병력에 감염을 억제하는 새로운 면역 체계를 이식했습니다.]
“솔직히 화력으로 퍼부으면 이길 것 같긴 한데.”
루시는 전투용으로 생산한 함선형 비행종까지 동원했다. 수송용인 아일랜드ㆍ알파보다는 작지만, 고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몸체에서 화력을 뿜어내는 거대한 생명체.
거기다 지상을 가로지르는 병력도 이미 만 단위를 넘어섰다. 숫자도 숫자지만 화력에서 상대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이 세상 전체에 퍼져 있는 적들의 숫자는 예상 불가능하지만, 현재 파악된 거점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 적의 숫자는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약 20만 정도. 아군은 3만이니 충분한 비율이라 계산됩니다.]
루시는 평소대로 계산식에 맞게 행동하고 그 결과에 확신을 가졌다. 협회가 주요 인물들에게 마법 코드를 시연하며 그 위력을 증명하는 자리에서도 슬쩍 뒤로 빠져서 휴대폰만 보고 있는 나는, 루시의 마왕군이 안개를 뚫고 튀어나오는 저 거대한 군세와 충돌하는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좀 놀랐으려나? 미쳐 날뛰는 좀비들이야 그렇다 쳐도, 저 좀비들을 통솔하는 존재는 이성이 있어 보이는데.”
마왕군과 좀비 떼의 첫 충돌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마왕군 함선형 비행종의 강력한 에너지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동안 압도적인 숫자와 그 파괴력으로 이 땅의 지배종이었던 다크엘프들을 패배시킨 게 분명한 저 좀비들은, 그 포격 한 번에 수많은 병력을 잃어 가면서도 우직하게 마왕군을 향해 돌진했다.
보통이라면 그 징그러운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
하지만 루시의 마왕군은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해 온 이들과 다를 것이다.
감염이 어쩌라고, 대수냐는 식으로 무시하고 몸을 앞으로 들이밀며 싸우는 마왕군은 좀비들이 가진 포악함과 흉악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까.
[계산대로, 좀비들을 통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타락 세계수는 자세한 전술을 펼치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마치 로봇 군단과 좀비 군단이 싸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감염에 대해서도 내성이 생긴 마왕군은 좀비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살육과 학살을 이어 갔고, 좀비들은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숫자로 몰아붙였다.
‘이대로 이기나?’
새로운 세상에서 그곳의 지배자와 벌인 첫 번째 전쟁. 나는 어쩌면 루시가 생각 이상으로 쉽게 저 끔찍한 괴물들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이놈들, 살짝 무식하다고 느껴질 정도로군.”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계속해서 이겨 온 게 티가 납니다. 물론 그 이전에 대다수의 생물들이 이들의 감염력을 이기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싸움을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전면에 나서 싸우는 라온 역시 무턱대고 덤비는 좀비들의 전술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아예 예상 승률을 90% 이상으로 올려 잡을 정도였다.
좀비들이 가진 힘은 분명 마왕군의 천적이 될 수 있었지만, 마왕군이 비효율을 감수하고 힘으로 찍어 누르기 시작하자 그 힘은 빛이 바랬다.
오히려 두려움도 망설임도 모르는 차가운 살육의 군단인 마왕군이 좀비들의 약점을 후벼 팠다.
감염에 대한 공포심과 변수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던 이 세상 주민들과는 다른, 압도적인 기세로 정면을 들이받으니 밀려 버린 것이다.
‘이러면 굳이 과하게 투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라온은 이 정도면 굳이 루시가 자원을 대량으로 투자할 필요 없이 이곳에 만든 자체적인 둥지만으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그러나 상대 역시 이대로 밀리지는 않았다.
잠시 마음을 놓았던 라온은, 자신을 향해 푸른 불꽃이 휘감긴 날카로운 갈고리 발을 휘두른 적을 보고 경악했다.
“이, 이놈들 마력을 쓸 줄 아나? 아니, 그보다 이건!”
[특유의 학습 능력이, 아무래도 개체 하나하나는 물론 집단 전체에도 동시에 적용되는 모양입니다.]
일방적인 결과로 진행되던 전장의 균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게 그때였다. 지금까지는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덤벼들고, 강심에서 뿜어져 나온 출력을 앞세운 상위종들을 중심으로 한 마왕군이 적들을 학살했다.
이때만 해도 루시는 이성도 지성도 없는 적들에게 마력이란 힘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힘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한때는 강인하고 총명했을 다크엘프들 역시 지금은 그저 괴성을 지르며 변이된 몸을 마구 뒤틀고 다니는 괴물일 뿐이었으니까.
오직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점령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잊힌 잠재력을 되살린 것이, 바로 감염에 저항하고 전투에서 압도적인 마왕군과의 싸움이었다.
그들은 일격에 여럿을 쏴 죽이고 베어 죽이는 마왕군 상위종들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여 자신들의 내면에 봉인된 마력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이래서는 놈들이 너무 많다. 균형이 붕괴한다.”
이제는 마력이 타오르는 변이된 갈고리 발을 휘두르며 덤벼드는 적들을 베어 넘긴 라온이 전장을 둘러보며 이미 분위기가 넘어갔음을 확신했다.
[데이터 부족으로 인한 치명적 오류 발생. 함수식 폐기. 전 병력 회군.]
강력한 에너지 포격을 사방에 뿌리던 함선형 거대 비행종마저 다수의 날짐승들이 덤벼들고 그들 중 일부가 자신의 마력포를 흉내 내어 공격을 시도하자, 루시는 결국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강한 힘으로 찍어 눌러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적이라니.”
예상치 못한 패배. 그것도 루시 본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힘인 성장과 진화라는 점에서 완벽히 상대에 밀려 버린 패배였다.
[…….]
겉으로는 승리와 패배를 가리지 않고 그 결과를 이용한 효율적인 후처리만을 생각하던 루시는 생각 이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처럼 변화무쌍하게 성장하는 적들에게, 마치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해 온 마계 영주들 같이 밀려 버렸다는 점이 제일 타격이었다.
[적들은 아군과의 전투로 잠들어 있던 마력 사용법을 일깨우고 아군의 전술과 작전을 그대로 모방합니다. 더 이상의 전략 노출 없이 상대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게 가능한가? 마왕군 역시 그 숫자에 강점이 있지만 지금은 일개 원정군 수준이다. 반면 적들은 이 세상 전체를 점령해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지. 우월한 기술과 전술 없이 힘 싸움으로 이기는 게 가능하다고?”
[불가능하지 않다고 계산됩니다.]
루시는 다른 방식으로 싸우기로 결정했다. 라온이 탄식했지만, 루시에겐 아직 꺼내들 수 있는 패가 있었으니까.
[압도적인 질량과 힘으로.]
루시는 전략을 바꿨다. 마력을 쓰면 쓸수록 상대를 각성시킬 기회를 제공한다면, 마력을 쓰지 않고서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도록.
대수림 둥지에서 생산한, 몸길이 수십 미터에 수천 톤의 몸무게를 가진 초거대종 베헤모스.
거기에 주력 병력들도 육중한 무게를 가진 마수형 병사들이나 트롤 같이 덩치 큰 베이스를 가진 이들로 교체했다.
‘지독하긴 하다.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이기지 못했겠지.’
적들도 적들이지만 라온은 마왕군의 능력에도 혀를 내둘렀다.
적응과 진화라는 서로 비슷한 힘을 가진 두 군체가 보여주는 빠르고 거대하며 강렬한 전쟁.
아직 엘프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게 남아있는 라온에겐 인간들, 마족들과 함께 싸웠던 대전쟁 시절에도 감히 상상해 보지 못했던 종류의 전쟁이었다.
지금 당장의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는 루시의 힘이 이미 인간계와 마계 전체를 합친 것보다 강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빠르고 유연한 변화와 적응이 불가능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