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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28화 (128/200)

128화 기만과 지배 (8)

“사령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엘프들과 반드시 손을 잡을 수 있게 교섭하라는.”

본래라면 일개 변경에 별 볼일 없는 영지인 이 백작령에 사령부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얼마 전 이곳에 나타난 새로운 엘프 방랑자의 등장 때문.

영주를 만나고 온 기사단장 로난은 멍한 얼굴로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그 결과를 알렸다.

“저희의 요구는 동일합니다. 마계에서 온 괴물들과 벌인 전쟁의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 지원을 받아야지만, 복구한 그 힘으로 여러분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나안 님. 이미 많은 양을 미리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하신 식량과 무기 지원은 그 양이 너무…….”

“그만! 이미 사령부는 모든 조건을 맞추기로 했다!”

당연히 이 자리에 나안도 있었다. 루시에게 하달받은 명령을 마치 엘프족의 요구처럼 둔갑시킨 그녀는 자신들의 요구한 지원이 이루어져야 엘프들의 군대가 연합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 단호하게 말했다.

그 물자들의 양이 적지 않아 모두가 당황했지만 기사단장은 소리쳐서 현장을 조용히 만들었다. 이미 연합군은 엘프들을 위해 모든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나쁘지 않습니다.]

루시는 한창 변종 감염체들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협상 결과를 확인하고 만족해했다.

나안을 시켜 연합군에게 필요도 없는 물자 지원을 요구한 것은, 교단에게 내건 조건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힘을 쭉 빼놓기 위해서일 뿐.

다크엘프들의 세상이자 엘프들의 고향인 라비즈다를 완전히 점령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양분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지금보다 더 압도적으로 키운 체급으로 단번에 찍어 누르기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

“크흠, 그만큼 우리가 여러분과의 협력에 진심이다, 그것만 알아주시면 되오.”

단장은 나안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진심인지를 어필했다. 실제로도 굉장히 파격적인 지원이었으니, 그들이 교단과의 균형추를 부술 수 있는 엘프들의 협력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대변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저는 그저 말을 전할 뿐입니다. 모든 결정은 장로들이 모인 장로 회의에서 결정합니다.”

“예. 그렇겠지요.”

나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선을 그었다. 단장은 작게 탄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 급한 것은 그들이었고, 이번에 사령부가 지원을 결정하면서 그것을 입증해 버렸으니까.

“크리스, 잠시 나 좀 보지.”

대신 자리를 해산시킨 그는 휘하 기사들 중 크리스를 따로 불러내었다. 그가 왜 불렀는지 대충 알 것 같았던 크리스는 자기 옆에 있던 유리아와, 앞에 앉은 나안을 슬쩍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 알겠지?”

“나안 님 때문 아니십니까.”

“맞아. 라온 님과는 다른, 굉장히 중요한 손님이지.”

단장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크리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엘프 영웅 라온은 동족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안은 달라. 그녀는 자기 종족의 사자라고. 그녀 본인은 단순한 심부름꾼이라 하지만, 어쨌든 그녀를 통해 우리 이야기가 엘프들에게 들어간다는 게 중요해.”

“그렇습니다.”

“그녀가…… 최근 자네 누이와 잘 어울리더군. 자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어떻게 잘 구워삶아 봐. 이건 우리 모두의 미래가 달린 일이네.”

단장이 속삭이는 내용은, 결국 나안과 가까워 보이는 크리스에게 보다 더 단단히 그녀를 휘어잡아 이번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미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안과 유독 가까워진 건 자신이 아니라 누나인 유리아지만, 그 덕에 그 역시 자연스럽게 나안과 가까워진 상태였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게다가 나안과 유리아의 아주 큰 비밀을 아직 모르는 크리스는 단장의 마음에 공감하고 그 지시를 따르겠다고 말했다.

단장이 말한 대로 이 협상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과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큰일 났습니다.”

“맞아, 크리스. 아주 큰일……이야.”

그러나 크리스가 무어라 말하면서 노력해 보기도 전에.

그날 밤에 바람의 정령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는 나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옆에서 거드는 유리아는 덤이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십니까?”

“교단도 엘프들에게 접촉했대. 그것도 아주 큰 선물들을 가지고.”

유리아는 태연히 거짓말을 시전했다. 동생을 속이는 일이라 찔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것이 곧 동생을 위한 길이라 굳게 믿었기에 그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교, 교단이 대체 어째서.”

“듣기로 교단 세력은 마계에서 온 괴물들은 곧 교단의 적이며 동일한 적을 두게 된 저희와 손을 잡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당황한 그에게 나안이 침착함을 유지하며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당연히 이것 역시 루시의 계책으로, 교단과 연합의 경쟁을 부추겨 서로의 힘을 빼놓고 교착상태를 오래 유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단 보고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결국 크리스는 별다른 일은 해 보지도 못하고 이 충격적인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다시 단장에게 돌아가야 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시간만 끌어도 우리의 승률이 더 빠르게 올라갑니다.]

“대, 대수림에서 많은 자원을 끌어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쪽 상황이 많아 안 좋습니까?”

나안과 유리아 단 둘만 남았을 때 그녀들의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 나안은 루시의 목소리에 다급히 전장 상황을 물었다.

그곳에, 이제 유일하게 남은 자신의 동족인 라온이 있으니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균형이 유지되고 있지만 이것이 무너지면, 그대로 끝까지 밀고 갈 수 있습니다.]

루시는 상투적인 답을 해 주었다. 지금 어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시간이 좀 더 필요함이 사실이니, 교단과 연합군의 전쟁을 더 끌어야 합니다.]

대신 루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까지는 숨기지 않았다. 유리아는 평소 그런 말은 잘 안 하는 루시의 습성을 캐치하고, 지금 그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이제는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양측 모두, 엘프들과의 협력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유리아는 루시의 이간책이 잘 먹힐 것이라 자신했다.

직접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미 이 대륙이 더 이상 격한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덕이었다.

양측 모두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많아도 결국 농사를 지어 식량을 확보하고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

마왕군처럼 오직 전투에만 특화되지 않은 이상 한계는 찾아온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교단이 엘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엘프들과의 협력을 확정이라고 생각하던 연합군 측은 다시 한 번 뒤집어졌다.

* * *

“다시 한 번 생각하라 말하라! 교단과 손잡는다니, 그놈들은 절대 엘프들의 관습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 하지만 엘프들이 전하길 교단은 이미 엘프들을 위해 모든 조건을 맞춘다고 말했습니다!”

제국의 황도에 있는 연합군 사령부, 총수인 황제는 이른 새벽부터 저 북쪽 변경에서 들려 온 소식에 기겁을 하며 허둥거렸다.

“모든 조건을 맞춰? 그, 그놈들이!?”

그는 보고를 받고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잃었다. 이단을 심판한다면서 일말의 자비도 없이 굴던 교단이, 이종족인 엘프들에게 저자세로 나간다는 게 상상이 잘 안 될 정도였다.

“그래서, 그래서 엘프들은 어쩐다고 하더냐.”

“그것이, 지금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여신이 하사한 성유물들까지 주었다고.”

교단은 이미 진심이었다. 자기들도 부족해서 마음껏 못쓰고 있는 지구산 화기를 엘프들에게 줬다는 소식에 그가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그들이 그만큼 진심이니 흑철충들을 상대로 함께 싸우는 것도 진심일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멍청한…… 그놈들이 아무 의도 없이 그럴 리가 있느냐.”

교단도 엘프들이 일종의 킹메이커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안다. 황제는 엘프들이 그런 교단의 설득에 흔들린다는 사실에 넋을 잃었다.

“폐하, 이대로 놈들에게 밀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엘프들이 그들에게 넘어가면 이 전쟁을 끝내는 건 불가능해집니다!”

연합군의 다른 수뇌부들은 그에게 무엇을 퍼 주든 엘프들을 설득하고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균형이 절묘한 상황이니 상대에게 그 무게 추를 넘길 수는 없었다.

“잠, 잠시. 잠시 시간을.”

그러나 황제는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일단 다른 통신을 시도했다. 통신 대상은 연합의 일원이자 마계의 가장 강성한 세력을 다스리고 있는 마계 영주 바알.

바알은 이 이야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멍청한 귀쟁이들이 설마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

“고의로 줄타기를 한단 말이오? 하지만 엘프들은 그런 종족이 아니오.”

바알은 마족답게 엘프들을 혐오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황제는 엘프들을 의심하는 그의 의견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흑철충에 공격당해 그것을 복수하려는데 굳이 교단과 우리 사이를 저울질하는 게 이상하다. 내가 엘프라면, 오히려 우리를 중재하려 들 것인데.”

바알은 엘프들이 은근슬쩍 양쪽 진영을 부추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내버려두고 만약 엘프들이 교단 측으로 넘어가면 큰일이오.”

“그건 그렇지. 하, 이거 외통수로군. 일단은 당해 주는 수밖에. 성공하면 이득이고, 실패하면 손해인 당연한 도박이다.”

다만 바알 역시 이 묘한 경쟁을 한 번에 끝낼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일단 한번 지켜보자는 것.

실제로 그들은 나안에게 다른 모든 지원을 약속할 테니 교단과 손잡지 말고 연합에 가입하라는 제안을 직접 보냈다.

“이 귀한 의견,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물론 나안은 자신은 그저 전달만 할 뿐이라며 선을 긋고 그 소식을 대수림에 알릴 뿐이다.

[이제 교단 측에 정보를 흘리면 됩니다. 그들도 자극을 받아 짜낼 수 있는 최대의 자원을 짜내도록.]

루시는 그걸 듣고 다음 계획을 실행했다. 끝도 없는 무한 경쟁은 이미 시작한 지 오래다.

[연합군의 승률 55%, 교단의 승률 45%, 전투 지속 가능성 35%.]

동시에 루시는 지금까지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현재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이 언제 ,어디서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도 예측을 돌리고 있었다.

그 계산으로 인하여 전쟁의 당사자들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들이 확률로 나타날 정도. 아직은 연합군이 조금 더 유리하지만 어차피 이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끝나야 하기에, 루시는 승률 자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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