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29화 (129/200)

129화 기만과 지배 (9)

“연합과 교단, 양 세력을 기만하고 흔드는 건 충분히 먹힌 것 같은데. 그러면 지금 힘을 쏟고 있는 거기는 어때?”

[서로 다른 진화의 대립 구도이니, 상대에게 자신의 강점을 노출하지 않고 상대하는 게 중요합니다.]

루시가 한 번에 통제하고 조작하는 굵직한 사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강점을 십분 활용해 그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계산해 행동하니, 딱히 무리가 가거나 하는 일은 아니다.

자신이 몰살한 엘프들을 이용해 두 거대 집단을 속여먹은 루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흔들기에 박차를 가하며, 동시에 새로운 땅을 점령하는 데 상당한 양분과 연산력을 투자했다.

“힘으로 짓뭉개는 거. 문제는 상대가 그것마저 따라 한다는 거야.”

그는 루시가 보여 주는 화면을 보며 탄식했다.

루시가 실시간 변이와 감염을 강력한 무기로 삼은 타락 세계수의 감염체들을 상대하기 위해 택한 전술은, 바로 힘과 숫자로 밀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 마왕군의 전술을 그대로 읽은 감염체들이 자신들의 몸을 변형시켜 똑같은 전술로 맞서자, 결국 또 전장은 지지부진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감염체들이 기술과 능력을 습득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결국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은 셈.

루시는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온 마왕군의 정수나 마찬가지인 그것들을, 저 끔찍한 괴물들이 그저 보고 상대하는 것만으로 복제해 낸다는 사실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적어도 분석과 복제에 있어서는 저놈들이 더 뛰어나.”

[그것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화’라는 개념에 있어서는 네가 더 뛰어나 보인다, 루시. 네가 가진 힘은 단순히 복제나 하는 게 전부가 아니야. 저들이 진화하는 것 같아? 저건 그냥 따라 할 뿐이야. 따라 할 대상이 없다면 저들은 진화할 수 없어.”

쓰게 웃은 그는 꽤 큰 위기를 맞은 루시를 어르고 달래 주었다.

다만 그렇게 달래면서 한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루시의 강점과 상대의 약점을 나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내 생각일 뿐이야. 때로는 자신의 약점을 가리려는 것보다 강점을 부각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어. 비록 그 생각을 지금 네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루시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그가 툭툭 던져 주는 생각을 영감으로 삼아 스스로 가공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전술이나 전략을 만들어 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약점을 가리려 하지 말고 강점을 극대화하는 게 낫겠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루시가 가진 그 강점은 분명 진화. 단순히 보고 따라 하는 게 아니다. 루시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을 세포 단위로 분해하여 완벽히 분석하고, 그 분석값을 데이터로 사용해 다른 데이터와 섞어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고 개조하는 것도 가능했다.

“새로운 타입의, 새로운 능력의 병종이 필요합니다.”

“대체 어떤 병사를 만들겠다는 거지? 상대는 검술도, 마법도, 병사들의 형태와 전술도 그대로 복제하는 미친 괴물들인데.”

그와의 통신을 종료한 이후 답은 이것뿐이라는 루시의 말에 라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전쟁을 지속하다 전력 유출을 막기 위해 뒤로 빠진 라온은 이미 타락 세계수의 감염체들에게 학을 뗀 지 오래다.

“내가 보기에 저놈들보다 완벽한 생물은 없어 보인다. 대체 그 어떤 생물이 저놈들을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완벽,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라온이 감염체들의 힘에 경외심까지 표하니, 루시는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그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완벽이란 그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될, 닿아서도 안 될 경지. 완벽이라는 단어를 확신하는 순간 진화는 멈추고 성장은 끊긴다.

“그럼 대체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있지? 마왕님.”

“진화, 감히 따라올 수 없고 복제할 수 없는 그런 진화.”

루시가 눈을 반짝였다. 이미 그 초월적인 연산력은 수많은 계산 끝에 가장 확률 높은 가설을 하나 제시해 주니, 루시는 늘 그렇듯 조금의 망설임도 틈도 없이 곧장 그 계획을 실행했다.

“저와 맞먹는 분석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절대 보고 따라 할 수 없는 비효율의 극치. 오직, 저 타락 세계수의 감염체들을 상대하기 위한 대적 병기를.”

루시는 나노들을 조작해 새로운 병사를 탄생시켰다. 생산에 그리 큰 양분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정체가, 세포 수준으로 작은 세포형 병사였기 때문이다.

“분명 단점이 있다고…….”

“그것들을 모두 감수합니다. 그래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효율이 나쁘다는 세포형 병사의 단점을 감수하기로 한 루시는, 그 새로운 병사의 유전 정보를 미친 듯이 꼬아 내기 시작했다.

한 가지 정보만 있어도 될 곳에 100가지 정보를 집어넣고, 대체재가 있는데도 굳이 두 가지 이상의 유전 정보를 합성하고 조합해 상식이 통하지 않은 기괴한 생물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건 생물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이런 비효율적인 생물은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오직 단 하나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저 감염체들을 지워 버리기 위해.”

복제하고 따라 하는 것. 루시 본인도 고작 그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말대로 단순히 따라 하는 게 전부라면, 따라 할 대상이 없어지는 순간 성장이 멈추는 것이니까.

루시는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진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숨 쉬는 생물의 의무이며 사명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작은 병사들의 이름이 뭐지?”

“슬로스·알파. 오직 존재하기 위해 탄생한 생명체.”

루시는 빠르게 증식하는 이 새로운 병사들을 다른 병사들의 무기나 이빨, 발톱 등 상대방의 신체 내부에 직접 찔러 넣을 수 있는 곳에 위치시켰다.

이 작은 세포들의 역할은 단순하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으면 된다.

적들의 체내에서 이물질이 되어서, 그저 내장된 에너지를 소모하며 자가 복제만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감염체들 내부의 감염균들은 정상 작동을 위해 반드시 이 이물질들을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제거하기 힘들 것이다. 감염체들은 슬로스·알파의 약점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할 테니까.

맞서 싸워 주지 않고 그저 가만히 존재하기만 하는 이물질이니 감염균들이 자랑하는 특유의 복제 능력도 아무 소용없고, 복잡하게 꼬아 놓은 유전 정보를 해독하는 능력도 없어 역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만약 슬로스·알파를 적들이 극복한다면?”

“그러면 베타, 감마…… 계속 개량하고 진화하면 됩니다. 끝은 없습니다. 정해진 정답도 없습니다. 그저 시도하고 싸워서 살아남는 것이, 곧 정답입니다.”

루시는 몸이 굳어가며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적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전장의 균형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적들은 이제 없다. 복제는커녕 제대로 몸 간수나 하는 게 최대일 지경.

“이대로 세계수까지 밀어 버립니다.”

루시와 라온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간다. 기껏 이렇게 발달시켜 놓고 후방에 빼놓아야 했던 마왕군의 고급 병종들이 단번에 전쟁에 난입하며 혼란에 빠진 적들을 학살했다.

“…….”

그리고 당연히 이 모습을, 감염체들을 통제하는 타락 세계수도 보고 있다.

그러나 타락 세계수, 정확히는 이 땅을 지탱하던 기둥인 세계수를 감염시킨 감염균은 잠시 스턴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균으로 시작해 한 세상을 완전히 덮어 버렸던 그들에게 패배라는 개념은 없었으니까.

* * *

“이들에 대해 알아낸 바로는, 이들의 기원이 단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루시는 감염균에 대해 처음으로 분석하며 복제와 분열로 여기까지 이룬 그들의 뿌리를 단 번에 알아보았다.

실제로 이 세상에 처음 정착한 감염균은 고작 하나의 세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숙주의 몸을, 세포를 먹어치우며 미친 듯이 증식하기 시작한 감염균은 마침내 세상 전체를 덮어 버렸다.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들은 상대가 강할수록 강해지는 존재들. 제아무리 다양한 힘을 써 봐도 감염균들의 복제 능력을 극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그들이 마침내 최후의 영웅들마저 죽이고 세계수까지 침투했을 때.

세상을 관장하는 세계수의 힘을 일부 손에 넣은 감염균들은 전 세상에 뻗어있는 세계수들을 일종의 기지국으로 활용하여 이 땅 전체를 착취하고 먹어치웠다.

루시의 타깃이 된 타락 세계수도 마찬가지였다.

일대의 모든 양분을 먹어치우고 땅이 황폐화하자, 극도의 휴면 상태로 쉬고 있던 때 새롭게 찾아온 다른 세상의 먹잇감들.

루시가 그들을 사냥감으로 보았듯 타락 세계수도 루시와 마왕군을 먹이로 보았다.

먹이를 원하는 두 포식자가 충돌하면 결과는 당연히 한쪽의 패배와 한쪽의 승리.

타락 세계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승자가 자신일 것이라 확신했다.

“이럴 수가. 설마 이놈들, 극히 일부에 불과했었나?”

“상관없습니다. 시간은 더 걸려도 어차피 양분. 쓰러트리고, 그만큼 새로 생산하면 됩니다.”

라온은 안개를 뚫고 몰려나오는 또 한 무리의 감염체들을 보고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루시는 타락 세계수의 의지를 확인하고 오히려 그 도발을 받아들였다.

“진화에서 밀리는 것 같으니 숫자와 생산력으로 승부하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쪽은 저들이 얼마나 몰려오든 감당 가능합니다.”

루시는 이럴 때를 대비해 아껴 둔 고급 병종들을 동원했다.

지금까지는 물량으로 밀어 버리는 쪽이었던 루시가, 이번에는 상대의 숫자를 최대한 효율적인 전투로 줄여야 했으니까.

“압도적인 화력, 그리고 파괴.”

하늘과 땅을 뒤덮으며 파도처럼 몰려오는 저 대군세를 향해 속과 겉에 크고 작은 강심을 품고 있는 마왕군의 고급병들이 일제히 품고 있는 에너지를 뿜어내었다.

그 화력이 과거 가장 거세게 저항하던 다크엘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결국 다크엘프들도 생물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아무리 강한 주문을 동원해도 개인이 품을 수 있는 에너지량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루시의 마왕군은 달랐다. 마족들과 싸우기 위해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던 마왕군은 생물이되 생물이 아니었다. 오직 싸우기 위해 존재하고 살아가는 효율적인 전투 병기인 그들은 같은 체면적과 몸무게를 가지고 있더라도 더 많은 에너지를 품을 수 있었다.

“가진 수는, 그것이 전부?”

더 이상 훔쳐질 염려 없이 마음껏 화력을 뿜어낼 수 있게 된 루시는 자신의 군단을 멈추지 않고 진격시키며 안개 속에 있을 타락 세계수를 비웃었다.

새로운 수가 없다면, 이제 도태하는 건 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던 감염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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