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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30화 (130/200)

130화 기만과 지배 (10)

“…….”

마왕군이 밀고 들어온다. 심지어 소모전에서도 감염체들이 밀린다. 수많은 생물종의 소화 흡수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던 마왕군은 결국 유기물인 감염체들을 포식해서 양분으로 삼을 수 있었지만, 감염체들은 마왕군을 감염시키지 못하니 숫자를 늘릴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마왕군은 수많은 촉수와 함께 공중을 부유하는 거대한 해파리 같은 생명체에게서 치환한 양분을 즉석에서 공급받는 것도 가능했다.

감염체 중 일부가 체내의 슬로스ㆍ알파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싸우다 에너지 부족으로 자멸하기 시작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전투, 보급, 특작 등 얼핏 보면 감염체들과 마찬가지로 괴물 집단으로 보이는 루시의 마왕군은, 사실 그 구성과 배치부터가 수많은 경험으로 철저하게 짜인 진정한 군단.

[이럴 수가. 지면이, 대지 전체가 요동치고 있어. 타락 세계수가 다른 세계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

라온의 정령 티타니아가 대지의 요동침을 감지하고 소리친 게 그때였다.

감염균들 역시 자신들이 가진 모든 힘을 짜낸 것이다.

“적이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의도대로 승기를 잡아 가는 전장을 바라보던 루시는 흩어 놓은 정찰병들이 발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무수한 숫자의 감염균들이, 일종의 소집령을 받고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숫자가 많은가?”

“지금 당장은 아군의 10배 이상, 어쩌면 더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그, 그러면 큰일 난 것 아닌가?! 그 정도 숫자라면 말 그대로 쓸려 버릴 수 있다.”

루시의 대답을 들은 라온은 어처구니가 없어 당황했다.

산 넘어서 산이라더니 이 경우는 산이 아니라 산맥 하나가 통째로 넘어온 셈이다.

“가설 중 하나가 틀렸을 뿐입니다. 이미 이런 상황을 가정한 가설 역시 세워 두었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태연했다. 생각해 보면 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종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

이 세상 전체로 보면 자그마한 암세포에 지나지 않는 루시는, 버티고 버텨서 이 세상 전부를 침식하는 것이 목표였다.

“방어 소모전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둥지와 가장 가까운 타락 세계수는 제거합니다.”

“어떻게 제거할 셈이지?”

“저희가 직접.”

루시는 챙겨 온 롱기누스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는 루시의 손가락에, 라온은 작게 혀를 찼다.

루시가 제안한 전술은 결국 소규모 고화력의 조합으로 우회 침투해서 감염체 군집을 통솔하는 일종의 중추 신경계인 타락 세계수를 제거하자는 것.

실패해도 리스크가 그리 크지 않다. 데이터까지 추출할 기회였다.

“타락 세계수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군체를 통제하는지, 다른 감염체들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알게 된다면 더 쉬운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까.”

끝내 루시는 라온을 비롯한 소수 병력을 이끌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태양 빛을 허락하지 않는, 이 먹구름 가득한 우중충한 대기 상태에도 미묘한 마력 반응이 있음을 확인한 루시는 더욱더 상대방에게 주목했다.

“상대도 바보가 아니야. 방어 병력들이 온다!”

“저 정도는 무시할 수 있습니다.”

감염체들이 금방 눈치채고 비행이 가능한 병력들을 다수 파견해 요격을 시도했다. 루시는 강행돌파를 결정하고 마력을 움직였다.

피해는 감수한다. 그게 이 작전의 핵심이니까.

“마법……! 하지만 이런 걸 쓰면.”

라온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자신들 주위로 펼쳐지는 거대한 마법들에 가로막힌 적들을 보며 당황했다.

무력화시킬 방법을 찾긴 했지만 상대에게 기술을 보여 주는 것은 금물. 언제 이걸 그대로 복사해서 흉내 낼지 모르니까.

“감수합니다.”

‘이미 계산이 된 것인가.’

그럼에도 루시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 번 결론이 나오면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행하는 루시의 기계적인 사고방식에 이제 겨우 익숙해지고 있는 라온은 그것을 새기려 애썼다.

자신을 능욕하고 일족을 멸망시킨 불구대천의 원수이긴 하지만 어쨌든 루시가 주장하는 약자도태론에 동의하게 된 이상, 강한 점은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말 그대로 오직 싸우기 위해 탄생한 존재.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 루시보다 강한 존재는 없어 보였다.

“이대로 타락 세계수에 도달합니다.”

강심들이 공명하며 만들어 내는 강력한 마법 방어를 뚫지 못한 감염체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순간, 이미 안개 속으로 들어간 마왕군은 모든 방해를 뚫고 마침내 그 거대한 장벽 안으로 돌입하는 데 성공했다.

“큭!”

“보호 주문 소실 40%.”

그 순간, 거대한 충격파가 그들을 덮쳤다. 그 끝이 하늘에 닿고 그 뿌리가 지면을 덮는 거대한 거목인 타락 세계수가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제거합니다.”

루시는 시간을 끌지 않고 단숨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적을 향해 겨눈 결전 병기 롱기누스에서 응집한 거대한 마력이 뿜어지자, 그 거대한 몸을 조금씩 꿈틀거리던 타락 세계수는 자신도 힘을 모아 그 일격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효율 5%.”

루시가 살짝 당황했다. 적의 방어력이 생각 이상으로 단단한 탓이었다.

“비축한 양분이 어마어마한 모양이군. 게다가 세계수의 탈을 쓴 저 괴물도 세계수의 권능을 쓸 수 있는 모양이다. 에너지 흡수와 조작은 세계수의 특권이니까.”

“방법이 있습니까?”

“내가 일족의 주문으로 저 힘을 봉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세계수의 힘이니까.”

그때 도움을 준 것이 라온이었다. 루시는 이 일을 통해 굳이 라온을 살려 두고 계속 데리고 다닌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되었다.

“순순히 협조하는 게 예상 밖입니다.”

“마왕, 너도 증오스럽지만 저 괴물들은 아니야. 저것들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다.”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루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면 그로서도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날 땅에 내려라. 티타니아의 힘이 필요해.”

“좋습니다.”

루시는 적들의 본진에서 땅에 착지했다. 사방에서 빼곡히 몰려오는 감염체들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돌진해 왔지만, 루시는 토벽을 세우고 화염의 장막을 두르는 등 마법을 난사하여 시간을 벌었다.

“티타니아, 세계수로 향하는 에너지를 차단한다. 마력의 흐름에 말뚝을 박아. 저 괴물이 에너지를 순환시키지 못하도록.”

[알겠어.]

그는 그사이 티타니아와 함께 엘프족에 내려오는 옛 주문을 하나 시전했다. 본래 목적은 일정한 공간 전체의 마력을 봉인하는 주문이지만, 땅의 정령과 함께라면 이걸 세계수에게도 쓸 수 있었다.

‘이것이 순리인가.’

그는 주문을 발동시키면서 쓰게 웃었다. 자신들이 다크엘프에게 밀려나 이 땅에서 쫓겨났고, 이 땅의 주인이 된 다크엘프들은 정체불명의 감염균에게 당해 전멸했다.

그리고 그 감염균들은 루시의 마왕군에게 쓰러지고 있다.

영원은 없다. 그는 루시가 왜 진화와 성장에 집착하는지 깨달았다.

“지금이다. 지금 공격하면, 저 가짜 세계수는 네 공격을 막지 못해.”

[롱기누스ㆍ최대 출력 전개]

루시는 라온의 말을 듣자마자 버둥거리는 듯한 적을 향해 다시 한번 지금의 자신이 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일격의 공격을 쏘아 보냈다.

직경만 몇 미터는 되는 거대한 광선포.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그 일격은, 단숨에 저 거대한 거목의 몸을 관통하고 그 내부를 태워 버리며 폭발을 일으켰다.

직경만 백 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줄기에 비하면 자그마한 상처지만, 불에 타기 시작한 그 상처 내부에서 붉은 무언가가 터지듯 뿜어졌다.

“말도 안 돼……. 세계수가 아니라, 이건…….”

“세계수와 동화한 거대한 하나의 동물입니다.”

기겁한 라온이 비틀거리고 그 내부를 확인한 루시는 무심하게 데이터를 추가했다.

상처를 입고 고통에 몸을 떨며 거대한 나무줄기를 쩍 하고 갈라지게 만들며 그 모습을 일부 드러낸 것은, 나무 전체에 자신의 몸을 뻗고 있는 새하얗고 꿈틀거리는 무언가.

나무 전체를 파먹고 그 내부에 들어있던 거대한 애벌레의 커다랗고 샛노란 눈동자가 그들을 직시했다.

* * *

“미친, 징그러워.”

[예상치 못한 일이나, 제거해야 함은 변함없습니다.]

거대한 애벌레의 나무 코스프레. 상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루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할 일을 시도할 뿐이다.

[상처를 낸 곳으로 슬로스ㆍ알파를 투입합니다.]

롱기누스는 연달아 쏘지 못하지만 저렇게 상처를 낸 것으로 충분하다. 단숨에 하늘을 가로질러 상처 난 곳으로 향한 루시가, 롱기누스를 들지 않은 손에 창을 하나 들더니 그것을 상처 난 곳을 향해 집어 던졌다.

“――――!”

창이 그 몸에 틀어박히자,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대기를 진동시키고, 저 애벌레가 조종하는 가짜 세계수가 가지를 휘둘러 루시를 공격했다.

그러나 루시는 그 공격들마저 전부 피하더니 차분히 결과만을 기다렸다.

루시가 창에 묻혀 던진 것은 결국 극독이나 마찬가지. 계속해서 증식하는 몸속 이물질의 등장에 타격을 받은 애벌레의 부상은, 주변을 가득 채운 감염체들의 모습에서 곧바로 티가 났다.

“통제력을 잃은 건가?”

[피아를 식별하고 행동을 개시하던 모든 통제는 역시 이 애벌레가 주도해 온 일이었습니다.]

아군을 맹렬하게 공격하던 적들이 갑자기 길을 잃은 듯 비틀거리더니 가장 가까이 있는 생물체, 즉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루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구멍이 뻥 뚫린 세계수의 상처에 내려앉아, 몸에 난 구멍에서 체액을 쏟아내고 있는 애벌레를 바라보았다.

[연구 가치가 있습니다. 데이터를 확보하겠습니다.]

루시는 애벌레의 신체 일부를 떼어 내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것마저 분석해서 그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생각이다.

[철수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병력들을 데리고 철수했다. 화면 속에, 어느새 먹구름이 사라지고 찬란한 햇빛이 지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을 받는 감염체들의 행동력이 극히 떨어지기까지.

주변을 둘러치던 두꺼운 안개의 장벽도, 일대의 먹구름도 모두 저 애벌레가 벌인 짓이며 감염균의 약점 중 하나가 태양 빛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해졌어. 놈들은 태양이 있는 곳에서는 우리를 이기지 못해. 하지만 우리는 그 태양 빛마저 먹이로 삼을 수 있지.”

[밤이 되면 결국 전투가 벌어지겠지만, 아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합니다.]

대강의 준비는 끝났다. 이 세상 전체를 대상으로 한 루시의 싸움은 저 한 조각의 태양 빛처럼 자그마하게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저 세상을 뒤덮을 것이다.

[변수가 생겼습니다. 큰 변수입니다.]

“뭐?”

하지만 우리의 계획을 벗어나는 변수는 언제 어디서나 터질 수 있는 법.

나는 루시가 갑작스레 전환시킨 화면을 보고 얼어붙었다. 순간 오류가 나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다른 영상을 보여 주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게 대체 뭐지?”

[추측상 교단이 칼을 빼 든 것 같습니다. 분명 교단이 벌인 짓입니다.]

어이가 없어 목소리까지 떨리는 내 눈은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분명히, 한때 성곽을 낀 나름 큰 도시였을 저곳.

근데 지금은 전부 무너지고 불타오르는 채 거대한 버섯구름만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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