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폭군 (2)
“아니, 이런 미친…….”
“왜 그래?”
그걸 본 순간,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챈 순간. 나는 격한 반응을 참을 수 없었다. 함께 있던 이지연이 깜짝 놀라서 나를 돌아 볼 정도였다.
“아니. 아무것도.”
일단 웃으면서 넘겼다. 이지연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애써 웃어도, 심란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현재 파악 중입니다.]
결국 이지연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루시를 닦달했다. 대체 왜 저쪽 세상에 나도 자료 화면으로나 본 게 전부인 버섯구름이 피어오른 것인지 알아야만 했다.
[일단 핵폭발이 일어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일대에 방사성 물질 대량 검출. 저항력이 없다면 버틸 수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아니, 아니다. 뭔지 알겠어.”
머리를 쥐어뜯은 나는 대충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추론하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당장 교단과 손잡은 세력은 이 지구상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 중 하나 아닌가.
그들이 핵무기를 지원했다면 교단이 연합군의 요새 도시를 공격하는데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현재 그들의 처지가 답답해서 그렇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그 추측에 사실을 더할 근거가 있습니다.]
루시가 화면을 바꿔 준 것이 그때였다. 지금 급박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닌데, 루시가 보여 준 곳은 다름 아닌 대수림 입구였다.
그곳에 교단에서 파견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와,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시의 병사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통보이자 간곡한 부탁이오. 여신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 대수림도 그분의 심판을 받아 단 한 번에 거대한 불길에 휩싸일 것이오.”
“기세가 등등해졌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들과 함께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 같이 굴던 이들이 핵폭탄의 위력을 보더니 단숨에 태도를 바꾸고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현재 대응을 고민 중입니다. 교단과 연합의 균형을 유지시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조금 짜증나긴 하네.”
설마하니 핵폭탄까지 지원하면서 이렇게 진심으로 나올지 몰랐다. 왜 그러는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안 좋은 소리만 흘러나오는 뉴스만 봐도 대충 알겠지만, 어쨌든 경쟁하는 입장이니까.
“이러면 어쩔 수 없잖아. 그들이 균형을 부술 강한 힘을 외부에서 얻어 왔어. 마치 네가 라비즈다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끌어 쓴 양분을 이곳에 쏟으려는 것처럼. 그러니 균형을 맞추려면 우리가 반대로 넘어가야지.”
[그렇습니다. 연합을 지원하여 그들이 핵무기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지 않게 하고,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루시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대수림의 엘프들이 교단과 연합 간의 저울질을 포기하고 연합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무슨 일 있는 거야?”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혹시 최근에 뭐 들은 거 없어?”
다시 자리에 돌아 온 이지연이 굳은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니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혹시 들은 게 없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내가 들을 수 없는 것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딱히 아무 일도 없었는데. 들은 것도 없고. 마법 코드에 관해서만 바빠.”
“그건…… 어쩔 수 없지.”
지금 다른 세상에선 핵폭탄이 뻥뻥 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그녀는 딱히 아무 문제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대로 지금 그녀는 마법 코드 일 때문에 바쁘다. 졸지에 이 신기술의 권위자가 되어 버린 탓이다.
“시제품이 이미 테스트를 통과했어. 내가 봐도 좋아 보이지만,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게 혁명이 될 거라 했어.”
그녀는 영상 하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미리 알려 준 대로, 마법 코드를 주입시켜 연산시킨 컴퓨터가 장비된 대전차 미사일 정도의 무기.
활성화 한 던전 코어 하나를 통째로 동력삼아 작동하는 이 신무기는, 작동하자 전방을 향해 강력한 화염탄을 쏘아 내었다.
눈으로 보이는 화력은 사실 그리 강하지 않지만, 엄연히 저 화염탄은 ‘마법’이다. 던전 코어를 동력으로 삼고 컴퓨터가 계산을 대신하며, 인간은 그저 손가락 하나로 마법을 쏘아 내는 마도구.
그것이 저 신무기의 정체였다.
“대량으로 양산하면, 동력을 더 투자해 화력을 더 늘린다면 각성자들이 없어도 마력을 가진 특수종들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저 기술이 널리 퍼지게 된다면 우리는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겠지.”
사람이 아닌 침략종들에게만 효율을 보이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술이란 사실에 이 마법 코드를 좋게 평가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기술의 발달로 혹시 우리가 여유를 찾게 된다 해도 교단과 손잡은 그들이 그곳에서 발을 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이건 별개의 문제라는 뜻이니, 이곳에서의 일로 어떻게 잘 해보려는 생각은 깔끔히 접는 게 나아보였다.
[일단 연합에 핵폭탄의 정보를 알려 주고, 저것이 교단이 선동하는 것처럼 여신의 심판 따위가 아님을 알리겠습니다.]
루시는 내게 문자로 행동을 보고해 왔다.
사실, 안 싸우면 이득을 보는 건 그들일 텐데. 이미 루시의 힘을 봐 온 나는 그들이 핵무기를 몇 번 쓴다 해도 루시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 * *
“신의 심판이라더군. 말 그대로 심판. 찰나의 순간 요새화를 끝낸 도시 하나가, 수많은 병력이 증발했다.”
“이, 이쯤 되면 정말로 여신의 뜻을 거스르는 건 불가능한 것 아닌가!?”
소문이 퍼지자 혼란이 따라 붙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도시 녹스가 통째로 증발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만든 게 분노한 여신의 심판이라는 소문은 연합군 내부에 큰 불안을 퍼트렸다. 교단이 원한 반응이었다.
“그러니 다들 경계를 더 강화한다. 소문을 듣고 교단에 입교하기 위해 자리를 이탈하는 주민들이 늘어날 수 있다.”
“그, 단장. 그렇지만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견딜 수 없지 않습니까. 녹스는 전방의 도시로 단단히 준비를 해 둔 요새였습니다. 그런 곳도 일격에 증발시키는 심판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 유리아, 나안이 있는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수비를 맡은 기사단장은 휘하 부하들에게 경계를 더 엄하게 하라고 주문했지만, 당장 흔들리는 건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큭,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한다.”
움찔한 단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일단 맡은 임무는 해야만 했다.
“단, 단장. 지금 엘프께서 여신의 심판에 대해 하실 말이 있다고 합니다!”
루시의 지시를 받은 나안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일단 가장 가까운 상급자인 기사단장을 찾아 기사들의 회의장을 찾아 온 게 그때였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엘프들이 여신의 심판에 대해 뭘 안다고.”
“지금 그들은 그 심판을 들먹이며 저희도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분노한 장로회는 연합에 정보를 제공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나안을 만나게 된 단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지만 나안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신의 심판이라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의 폭탄에 불과합니다.”
나안은 핵무기에 대해 대충 알려 주었다.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거스를 수 없는 신의 권능 따위가 아님만 인지시키면 그만이었다.
“마력을 사용해 약점을 찌르면 차단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연합이 두려움에 빠져 분열하여 자멸하는 것이니, 부디 상부에 잘 전해 그것을 막아 주시길.”
“그, 그럼 엘프들은 저희와 함께합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안에게서 결국 답까지 들었다.
엘프들과의 정식으로 된 동맹은 과연 신의 심판과 맞먹을 큰 소식.
기사 단장은 아직 남아있던 회의도 접어버리고 서둘러 상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정말로 함께 싸우게 된 겁니까? 하, 하지만 설령 진짜 심판이 아니더라도 그 위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인데.”
“장담하는데 그들은 결코 쉽게 그것을 남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노림수에만 당하지 않으면 소모전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덕분에 회의가 끝나 버리니, 당황한 기사들 틈에서 벌떡 일어난 크리스가 나안에게 가서 물었다.
쓰게 웃은 나안은 사실 자신도 잘 모르는 사실을 그냥 읊어 대었다. 모두 루시가 지시한 것들이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크리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지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여신의 힘이랍시고 튀어나오는 것들이 워낙 기상천외해서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곁에 있던 유리아가 한 마디 거들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유리아가 언급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한 크리스는 자신의 누이가 그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다고 생각했지만, 유리아는 이미 마왕군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경계를 더 강화해라!”
“짐 수색을 철저히 하라! 탐지 마법을 설정해. 놈들은 폭탄을 옮겨놓지만 못하면 터트리지 못할 거다!”
물론 근거 없는 확신은 아니었다. 이미 나안의 보고를 통해 연합군 상부에 퍼진 핵무기에 대한 정보는 다시 사방으로 퍼져나가 나름의 대처법을 시행하게 만들었으니까.
이쯤 되니 당황한 것은 교단, 아니 교단 뒤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연합이 핵무기에 대해서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정확히 알아차리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망연자실했다.
* * *
“많이 바빠 보이는군.”
“작은 사건이 있었을 뿐입니다. 결국 그들도 이기기 위해서 발악하니까.”
이곳은 교단과 연합이 별별 수를 다 꺼내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과 또 다른 세상. 대수림을 통해 연결된 이 세상에서 이미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던 루시는 라온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소모되는 연산력만 따지면 본토의 일은 정말로 작은 사건일 뿐이었다. 마계에서의 전쟁도 거의 멈춰 둔 상태로, 루시는 지금 거의 모든 연산력을 바로 이곳에 소모하는 중이었으니까.
“밤이 된다. 놈들이 또 몰려오는군.”
“지금까지 제거한 개체 수 44,267,882개체.”
그들은 마치 구멍이 난 듯 먹구름 사이에 뻥 뚫린 하늘에서 빛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대는 타락 세계수 하나를 제거하고 빛을 되찾았지만, 태양은 언제나 떠오르지 않는다.
“이게 아무리 이득이 되는 소모전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많아.”
라온은 무기를 들며 혀를 찼다. 태양이 내리쬐는 부분을 모두 자신의 둥지로 삼은 루시는 이제 매일같이 사방에서 몰려오는 감염체들과 대규모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저 죽고 죽이기만 하는 끔찍한 소모전. 그러나 루시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지금은 그저 막아 내고 있을 뿐이지만, 이대로 간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결국 자신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