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폭군 (3)
“그러면…… 이대로 계속 버티는 건가? 저 감염체들이, 대체 몇이나 더 있을지 모를 저놈들이 모두 덤비다 죽을 때까지.”
“그것은 너무나 비효율적입니다.”
라온이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대로 버티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둥지의 요새화는 끝났고 상대에 대한 정보도 충분히 수집했다.
이렇게 방어하면서 소모전만 계속해도 다양한 방식으로 양분을 얻을 수 있는 루시는, 가진 수단이 포식뿐인 감염체들보다 훨씬 유리했으니까.
그러나 루시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그 전략은 채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먼저 직접 움직여, 다른 타락 세계수를 저격하는 방법을 구상했다.
“라온, 당신이 주축이 된 원정군이 타락 세계수들을 저격하고 다닙니다. 이미 했던 것처럼 그들의 힘을 봉인하고 에너지 출력을 쏟아 어서 제거하는 방법을 유지합니다.”
“역시나.”
루시는 끊임없이 병력을 뽑아내고 있는 이곳 둥지에서 아끼고 아낀 양분으로 만든 아일랜드ㆍ베타를 등장시켰다.
베타는 알파인 원본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지만, 방어력은 더 강해졌다.
라온은 계속 가만히 있느니 더 효율적인 싸움을 보고자 하는 루시의 마음을 예상하고 작게 탄식했다.
“그들이 자신의 동족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고 방심하고 있는 순간, 급습하여 제거합니다.”
“그러면 그 땅에는 다시 햇빛이 돌고 놈들이 살 수 있는 땅은 더 줄어들겠지.”
루시의 전략에 혀를 내두른 라온은 그대로 아일랜드ㆍ베타의 몸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루시가 노리는 것은 일종의 땅따먹기.
이렇게 소규모 병력을 움직여 타락 세계수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그것으로 먹구름으로 뒤덮인 이 세상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이 모여 곧 마왕군의 힘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루시가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마왕군은 마치 암세포처럼 계속해서 증식해 간다. 자신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먹어치우려는 마왕군의 전술에, 감염체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놈들이 특별한 대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아군의 둥지가 태양빛과 함께 역으로 이 세상을 뒤덮을 겁니다.”
소수 병력과 함께 은밀히 하늘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루시는 적들이 빼곡히 몰려오는 지상을 흘끔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딱히 방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이동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타락 세계수는 미처 정보를 얻지도 못했다는 듯, 방어 지대인 안개 장벽조차 세우지 않고 자신의 병사들을 마왕군의 둥지에 쏟아붓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루시가 근처까지 접근하고 나서야 화들짝 놀랐다는 듯 꿈틀거리며 황급히 방어 준비를 서둘렀다.
“저러면 이미 늦었지.”
라온은 그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 미리 알지도 못하고 있다가 급하게 준비하는 대응책으로는 이미 하나의 타락 세계수를 죽이고 온 루시를 막을 수 없으니까.
실제로 루시는 강력한 광선포 한 발로 선전포고를 날린 이후, 조금의 감속 없이 타락 세계수를 향해 돌진했다.
“발전 없는 나태한 종에게 멸절을.”
루시는 황급히 몰려드는 적들을 마법으로 막아 내며 라온을 착륙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도전장을 내민 새로운 군주가 턱 밑까지 찾아와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데도, 기존의 지배자인 타락 세계수는 몸부림만 칠 뿐 의미 있는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이미 사망한 첫 번째 타락 세계수에게서 자세한 정보를 전달받는 데는 실패한 탓이다.
루시는 그들이 자신처럼 완전한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이미 작전의 성공을 예측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루시는 자신의 일격을 맞고 폭발을 일으키며 서서히 불타기 시작하는 타락 세계수와 그 속에 들어있는 기생 애벌레를 보며 이미 다음 계획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대로 타락 세계수들을 하나하나 근처부터 점령해 가며 자신의 땅을 늘려 가다 보면, 곧 일정한 크기 이상의 땅을 자신이 전부 먹어치울 수 있게 되니 그렇게 되면 설령 햇빛이 없더라도 급격하게 증가하는 마왕군의 덩치를 막지 못한다.
이 땅을 전부 점령하고 이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자신의 병사들을 본토에 그대로 투사할 수 있게 된다면 마왕군은 조금의 저항도 없이 말 그대로 땅을 밀어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 *
“어떻습니까. 최근 한국에서 발명된, 일명 마도포의 위력은.”
“평가할 필요가 있나. 일반 군대도 빌어먹을 에너지 실드를 깨부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기적인데.”
“양산에 들어가면 더 이상 규모가 작은 게이트나 던전에 각성자가 투입 될 일은 없을 겁니다. 대신 더 필요한 곳으로 가게 되겠죠.”
“그래, 그래야지…….”
연구원의 말에 국장, 넬슨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양새.
관심이 없다면 모를까 평소 그를 자주 접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일이라니?”
“평소답지 않게 정신이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자주 접하는 사람 중에는 리암이 포함되어 있었다.
함께 마법 코드를 사용한 신무기들을 보고 있던 리암은 넬슨의 행동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피식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부정하진 못하겠군.”
쓰게 웃은 넬슨은 리암의 직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 이유는 리암에게 말하지 못하지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핵폭탄이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없다. 그렇다고 몇 발을 연달아 터트리게 할 수도 없고.’
그의 고민은 이곳에 오기 전 마리사를 만나고 오며 생긴 것이었다. 대통령이 최대한 빨리 끝을 볼 생각으로 무기를 지원했지만, 그 효과는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했다.
연합은 핵폭탄을 맞고도 그리 크게 분열하지도 두려움에 빠지지도 않았다.
이벨리아를 비롯한 교단 사람들은 그런 그들에게 뜨거운 맛을 연달아 보여 줘야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더 많은 지원을 요구했지만, 막상 그것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해야 하는 넬슨은 죽을 맛이었다.
당장 현실에서도 핵폭탄을 적극적으로 쓰게 된 마당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세계에 계속 자원을 투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곳에서 얻어 오는 것들도 분명 있으니 손을 놓아 버릴 순 없어 고민만 깊어지는 중이었다.
“이번에 공격을 시도하면서 몇몇 군데를 점령하자, 새로운 기능이 오픈되었어요.”
그런 그에게 마리사의 연락이 도착한 게 그때였다.
새로운 기능이라는 말에 놀란 넬슨은 황급히 그날 일정을 마무리 하고 마리사에게 달려갔다.
“파견 기능이라니, 그게 사실입니까?”
“네. 지금까지 물건을 주고받거나 그쪽 세상의 사람들만 소수가 이쪽으로 올 수 있었죠. 하지만 이제 이쪽 세상 사람들도 그곳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마리사가 알려 준 새로운 기능의 정체는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바로, 이곳 지구에서 저 휴대폰 속 세상으로 사람을 보낼 수 있는 능력.
고작 몇 명 보내서 무엇이 달라지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시대는 혼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초인들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국내 각성자들을 파견해 교단을 돕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같은 사람이랑 싸우는데 거부감이 들게 뻔하다. 하지만 우리의 적에 마족이라는 괴물들도 있긴 한데.’
넬슨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과연 사람 몇 명 파견하는 게 핵폭탄조차 하지 못했던 결과를 이룰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분명 사실.
하지만 그는 마리사를 여신이라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그런 기술이나 물건보다 사람을 직접 보내 주는 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이벨리아다! 마녀가 나타났다!”
“분명 그 폭탄을 투하하려 할 것이다. 빙결 마법을 준비하라!”
이곳은 연합군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라이베르. 하늘을 주시하고 있던 그들은 정말로 이벨리아가 나타나자 크게 당황하면서도, 지시 받은 매뉴얼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똘똘 뭉쳐서 그녀가 날뛰지 못하게 억제하는 한편, 섣부르게 마법을 난사하지 않고 그녀가 손에 든 핵탄두를 던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녀가 핵탄두를 던지면 그 탄두가 도착하기 전 결빙 마법으로 완전히 얼려버려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 셈이었다.
‘대응이 너무 빠르다. 이건 결코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야. 설마 정보가 샜나.’
이벨리아는 혀를 차며 탄두를 던지지 못했다.
그러면서 연합의 반응을 의심했다. 그들이 보여 주는 침착하고 빠른 대처는 마치 이미 핵폭탄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 긴밀했다.
그녀는 정보가 샌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폭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자신조차 모른다. 설령 내통자가 있더라도 저들이 이렇게 자세히 아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냥 공격하세요. 저들이 저렇게 단단히 대비하고 있으니 심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 준비가 깨지는 순간, 얼마든지 다시 던질 수 있으니.”
이벨리아는 일단 대치하면서 대기하고 있는 아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자신을 포함한 아군이 근처의 연합군을 공격하여 흔들면 분명 그곳을 지원해야 하는 도시 방어에 허점이 생길 것이고, 그 틈을 노려 재빠르게 폭탄을 투하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벨리아!”
그러나 그런 그녀의 계획도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도시에서 병사들을 밀치며 등장한 누군가가, 자리를 떠나려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그 초인적인 청각으로 들은 것이다.
“헛수작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악신은 이 땅을 지배할 수 없다!”
“프란츠, 저 돼지 같은 놈.”
상대의 정체를 알아 본 그녀가 피식 웃었다.
한때 그녀에게 힘을 받아 함께 마왕에 맞서 싸웠던 왕국의 젊은 왕.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영토를 침략한 교단에 분노하여 직접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그를 비웃은 것과 별개로 방법이 필요함을 느꼈다.
함께 싸웠던 영웅들 대부분이 적이 된 지금, 이벨리아에게는 든든한 아군이 부족했다. 교단 사람들에게도 성장의 권능을 부여해 새롭게 육성하고 있긴 하지만 마왕과의 대전쟁을 거치며 미친 듯이 레벨을 올린 기존의 영웅들에 비해서는 아직 부족하니까.
무엇보다 뿌리가 달랐다. 성장의 권능을 주어도 일개 농부, 시골 처녀였던 이들은 원래부터 유망한 기사나 마법사들에 비해 성장이 느렸다.
지금까지는 이벨리아 혼자서 어떻게든 그런 영웅들의 발을 묶고 있었지만 버티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자신을 도울 ‘새로운 영웅들’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녀는 문득 손에 들고 있는 탄두를 내려다보았다.
여신의 심판은 분명 강력하지만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이벨리아는 여신이 새로운 기적을 내려 주기를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