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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34화 (134/200)

134화 폭군 (4)

“특별한 임무?”

“솔직히 말하면 조금 힘겨운 제안이 될 수도 있는. 그래서 자네가 거절한다면 강요하지 않겠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근거 없이 건네는 제안은 아니라는 것이지.”

이브가 풀어낸 정보와 대응법으로 핵탄두를 던질 수 있게 된 교단과 이벨리아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자 그것은 마리사를 통해 그대로 넬슨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세상. 그걸 지금 믿으라…… 아니, 못 믿을 것도 아니군.”

그 제안을 듣고 피식 웃은 리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누가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의 침략을 예상했을까.

지금 세상이 말 그대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믿을 수 있는 미친 상태라는 걸 최전선에서 싸우는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자네의 성좌가 말하지 않았나. 죽이라고, 죽여야만 힘을 얻어 강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 그게 가능하겠나? 그딴 식의 희생을 사람들이 용납하겠나?”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고. 나보고 그곳으로 가서 그 교단인지 성녀인지 하는 사람을 도와, ‘적’들을 죽이라는 거겠지.”

그는 넬슨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코웃음을 쳤다. 좋게 포장하지만 결국 자신을 용병으로 부리려는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지구에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리암 역시 갑자기 듣게 된 이 이야기에 흥미가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디선가 데려온 그 특별한 용병들도 설마…….”

“그렇다. 성기사들, 그들이 바로 그 세상의 주민들이다. 자네도 그렇게 말했지? 그들이 가진 무력이 상당하고 무엇보다 오래 배운 티가 난다고.”

게다가 인적 교류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 정부의 비밀 시설에서 성기사식 검술 등을 가르치고 있는 성기사들이 그곳에서 온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리암은 작게 탄식했다.

“가능한 건지 물어야겠어. 다른 세상에서도 이 힘이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굳이 물을 필요 없다. 가능하다. 그곳에서 인간을 죽이든, 인간이 아닌 이종족을 죽이든 너는 그들의 피와 업을 흡수하여 더 강해질 수 있다.]

분명 흥미가 동한 그는 확실히 하기 위해 자신의 성좌에게 묻겠다고 말했지만 마치 다 듣고 있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던 성좌가 피식거리는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이럴 때는 참 빠르군.”

“그럼, 결심이 선건가?”

넬슨은 허공을 보며 혀를 차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어쨌든 자신의 독단으로, 나라의 귀한 전략 자산 취급을 받는 가장 강한 각성자 하나를 파견 보내는 것이니까.

“갔다가 돌아올 수 있다면 한번 해 보지.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리암 역시 자신이 이 나라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으니 혹시 모를 가능성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가서, 자네의 이익과 국익을 위해 일해 주게. 이 일은 대통령께서도 모를 극비. 자네는 평소처럼 두문불출하는 것으로 해 두지.”

결론은 났다. 넬슨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미리 준비한 곳으로 연락했다.

* * *

“핵폭탄에 대한 대처는 잘 하고 있나?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들이 밀리면 우리가 개입해야 하잖아.”

[대성녀 이벨리아가 핵탄두를 투척하려 시도한 횟수가 다섯 번, 그중 성공한 횟수는 단 한 번입니다. 무거운 탄두를 직접 들고 투척한 후 기폭시키는 방법은, 마력을 이용하는 마법과 주술이 발달한 저쪽 세상에서는 대응하기 쉽습니다.]

루시가 공을 들이는 감염체들과의 전쟁만큼이나 대륙의 판도도 중요하다. 최대한 양분을 아껴, 그것마저 다른 곳에 투자하기 위해 그곳에서는 뒷공작 수준만 투자하고 있기에 더더욱.

그런 상황에서 설마 그들이 핵무기라는 미친 카드를 꺼내 들지 몰랐지만, 한계가 있는 건지 의외로 효과는 미미했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교단에게 대륙을 넘겨 줄 순 없으니.”

언제나 그렇지만 마음 한편이 찜찜하다. 그들이 이렇게 저쪽 세상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당연히 침략종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니까.

물론 그 과정에서 국익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침략종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이상 우리의 아군이기도 하다.

지금 나와 루시는 그런 아군의 계획을 훼방 놓는 것으로 모자라 언젠가는 집어삼킬 계획을 짜고 실제로 그걸 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방법은 미개하고 비효율적입니다. 승률을 계산하기도 힘들 만큼 변칙적이고 희박한 확률에 기대는 것은 어리석으니, 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게 지구를 구하기 더 쉬운 길입니다.]

“나도 알지. 단지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거라는 게 문제고.”

이번에 끔찍한 감염체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전력으로 싸우는 루시와 마왕군을 보고 또 한 번 루시의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나와의 유대를 착실히 쌓아 놓은 지금의 루시가 갑자기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사고방식으로 계산한 해괴한 결과를 들이밀지 않는 이상, 나는 루시가 든든한 아군이 되어 이 세상을 지켜줄 수호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이 루시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루시가 남들을 고려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 문제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그럼 대륙 쪽은 넘어갈 수 있겠어. 사실 지금의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곳은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을 대륙이 아니잖아?”

나는 화제를 돌렸다. 세계수를 포함,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먹어치운 감염균과 마왕군의 싸움에 대해서.

루시는 여러 군데 퍼져 있는 일종의 사령부인 타락 세계수를 저격하기 위한 ‘함대’를 운용하고 있었고, 실제로 타락 세계수들은 자신들의 전병력을 쏟아부어도 막상 루시의 게릴라를 막지 못해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쓰러지면 먹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고 태양 빛이 돌아온다. 그것이 곧 표식이니, 루시는 그곳에 둥지를 펴고 광합성을 하며 에너지를 생산해 계속해서 병력을 생산했다.

말 그대로 암세포. 루시는 감염체들이 새롭게 정립한 질서를 해치며 끝없이 번식하는 암세포가 되어 저 세상을 점차 자신의 몸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직 모든 땅에 대한 정찰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이미 이곳은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둥지를 갖추었습니다.]

화면을 바꾼 루시가 어느새 마왕군의 둥지가 뒤덮은 땅을 보여 주었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타입을 늘려가며 개조와 발전을 거듭하는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다. 또 다른 병사들인 둥지 역시 진화하고 발전한다.

단순히 땅의 양분을 흡수할 뿐인 검은 땅과 소화액이 담긴 소화장, 병사를 배양하는 생산장밖에 없던 둥지는 지열을 흡수해 양분으로 치환하는 기관은 물론, 그 대다수 면적을 태양 빛을 양분으로 바꾸는 거대한 검은 버섯들이 그 넓적한 머리를 쳐들고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설마 가운데에 보이는 저건?”

[지속적인 데이터 추출 및 분석으로 타락 세계수에 기생하여, 이 땅을 지배하던 애벌레의 데이터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또 다른 것까지 둥지에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나무와 같았지만 나무가 아니었다. 검고 꿈틀거리는 생체 조직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촉수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움찔거리더니 거대한 몸체를 이루고 끝도 없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저 촉수 나무는 대체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지?”

[가장 주목할 수 있는 능력들 중 하나는 바로 마력을 이용해 주변의 기상을 조작할 수 있는 점. 이것을 이용하면, 광합성을 하는 둥지의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체급을 이용한 흡수 능력으로, 반경 수천 km에 달하는 땅에서 그 양분을 모조리 흡수할 수 있습니다.]

강적을 쓰러트리면, 그 강적의 장점을 취해 자신을 더욱 진화시키는 것이 루시에게는 상식.

그리고 루시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이것으로 감염체들은 일종의 선고를 받은 셈이다. 자신들은 결코 루시를 이길 수 없다는.

[아무래도 그들이,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본래 이 땅을 점령하고 있던 지배자들답게, 그들도 마지막 항전을 시도했다.

* * *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제대로 들었습니다.”

“몇이라고? 억?”

화면 속, 라온과 루시가 서로 대화했다. 지금까지 잘 협조해서 싸우고 공을 세운 대가인지 투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라온은 루시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미 지금도, 매일 밤마다 수많은 적들과 끝도 없이 싸운다. 그런데도 더 몰려온다고?”

“그렇습니다. 억 단위에 해당하는 적 병력이 지금 강과 산을 넘어 이곳으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닐 겁니다. 이 거대한 땅에 살아가던 생물이 고작 억일 리가 없으니까.”

억. 루시는 지금 적들이 동원한 병력이 억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찰병의 시야에 온 하늘과 땅이 괴물들로 뒤덮여 있기는 했는데.

“적들이 너무 많아서 못 이길 것 같습니까?”

“그럴 수밖에. 너무 많지 않은가? 최근 빠르게 둥지를 넓히고 있지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난 당신 같은 계산 능력을 갖추지는 못해.”

라온은 실감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80억이 살아가는 세상에 사는 나조차도 적군이 억이라면 쉽사리 상상하기 힘드니까.

“물론 당신이 가진 능력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디작은 뇌를 가진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아직 승률을 계산하는 능력 따위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하단 거지?”

“방법을 찾아내는 것.”

화면 속 루시가, 눈을 부릅뜨며 그에게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슨 말을 하든 평탄하고 단조로운 평소와는 달리 꾹꾹 눌러 담은 그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 있다.

“현실은 눈앞에 닥칩니다. 가능성 0%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나큰 죄악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싸우는 건 생명을 가진 생물이 가져야 할 당연한 의무니까.”

“언제나 강조하던 말이군. 나도 안다. 나도……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니까.”

“저와의 내기를 기억하십시오. 지금 잠든 당신의 동족들을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탄생시켜, 새로운 엘프종이 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생존자인 당신과 나안이 저를 납득시켜야 합니다. 당신들을 살려 두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루시는 아직 수십 만에 달하는 엘프들을 죽이지 않고 봉인시켜 두었다. 첫 목적은 그들을 인질 삼아 라온과 나안을 부려먹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다.

루시는 마왕군 산하에 자신을 비롯한 상위종들을 제외한 새로운 지성체 집단을 두고 싶어 했다.

경쟁자가 없어 성장과 진화에 실패하고 주저앉은 감염체들을 보고 결심한 계획으로, 자신에게 끝없는 영감을 줄 수 있는 변수 덩어리들을 직접 기르자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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