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35화 (135/200)

135화 폭군 (5)

‘지독하기 짝이 없다.’

전쟁에 나선 라온은 피폐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전쟁, 살육, 전쟁, 살육의 반복. 사실 그 근본이 인공지능인 루시여서 아무렇지 않게 버티는 것이지, 엘프나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그것을 기계처럼 착실하게 수행하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나 라온은 정신력으로 버텼다.

루시가 시행하는 모든 것을 보고 배우고, 그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루시가 그렇게 외치는 진화와 성장이 자신은 물론 동족들에게도 필요하다고 느꼈기에.

실제로 루시는 그가 전공을 세울 때마다 강심을 강화해 주는 등 포상은 확실히 주었기에 그는 은근히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이벨리아에게 처음 성장의 권능을 부여받았을 때처럼.

[이놈들 좀 이상하긴 해. 다른 놈들은 모르겠지만, 다크엘프였던 애들은 유독 더.]

“그게 무슨 소리지?”

정령 티타니아가 그에게 의문을 이야기한 것은, 끝도 없이 몰려오던 적들과 싸우다 강심을 충전하기 위해 둥지로 복귀한 때였다.

티타니아는 감염된 다크엘프들에게서 이질감을 발견하고 그에게 보고했다.

[이 세상 모든 다크엘프들이 저런 괴물이 되어 버렸다면 당연히 정령의 흔적도 오래전에 끊겼어야 하는데, 아닌 놈들이 있었어. 마치 최근에 저런 괴물이 되어 버린 것 같이.]

“설마.”

티타니아가 제기한 가능성은 다크엘프 생존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설령 생존자가 이제 없더라도 그들이 최근까지 살아서 저항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지금가지 축적한 함수식에 의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가설이지만, 정령의 능력은 제가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루시는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생각했다.

루시의 계산에 의하면 대륙의 엘프들과 별다를 것 없던 다크엘프들은 감염균을 상대로 절대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루시가 세상 모든 일의 데이터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니, 계산식의 범주를 벗어난 변수가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들이 살아 있다면 대체 어디에? 어딜 봐도 모든 양분이 다 빨린 죽음의 황무지뿐이었다. 설령 감염체들이 올 수 없는 곳이 있다 하더라도 이 땅에 양분이 없다면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나.”

“지금까지 저희가 직접 탐사한 이 행성의 면적은 10%도 채 안 됩니다. 간접적으로 탐사한 부분은 60%에 불과합니다. 미지의 공간에, 서쪽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루시는 아직도 힘이 팔팔하게 남은 감염체들과 싸우는 한편 탐사도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함을 느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니까.

* * *

“탐사를 해야 한다라. 나는 솔직히 네가 억 단위의 적과 싸우고, 그걸 버티고 있다는 게 더 신기하긴 한데. 대륙에 있는 이들이 이 광경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궁극적인 목표는 흩어져 있는 둥지와 양분을 하나로 뭉쳐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이지만,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분명 승리 확률이 더 높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루시가 혹시 모를 생존자들에 대한 보고를 해 왔을 때.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얼마 되지도 않을 생존자보다는 지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쪽이 더 걱정인데.

얼핏 화면에 보이는 것도 산처럼 쌓인 시체와 그 시체 이상으로 몰려드는 양측의 병사들이었다.

마계에서 벌어지는 싸움, 대륙에서 교단과 연합이 벌이는 싸움은 비교할 수도 없는 규모의 전쟁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이미 마왕군이 단신으로 대륙을 상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단지 그 힘 대부분이 아직 묶여 있을 뿐이다.

“아무튼 처음에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이쪽도 네 덕분에 일이 잘 풀리고 있어.”

어차피 루시도 알겠지만 나는 굳이 말해 주었다. 치밀한 계산보다는 조금 즉흥적인 생각으로 뽑아 든 마법 코드가 의외로 큰 효과를 보고, 던전과 게이트 공략의 판도가 서서히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감이 확 될 정도였다. 쉴 틈 없이 구르던 회사의 각성자들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코드를 세상에 공개한 것도 효과가 큰 모양이다. 더 이상 이지연이나 나를 향한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안정이 찾아온 건 아니고.”

나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이번에 꽤 오랜만에 국내에 있는 던전을 방문하게 되었다.

“강원도 지역에 열린 중형 던전. 새롭게 편제한 부대가 주축이 되어 싸우고 실험하는 것을,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켜봐 달라고 급히 연락이 왔어.”

“들었어. 일단 가자.”

나는 이지연을 태우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예정된 일정이 아니라 협회장이자 사장인 백승철이 급히 부탁한 일. 준비는 거의 되어있지 않았지만 싸우러 가는 건 아니니까.

“요즘 좋은 소식만 들려오는 것 같은데. 어디가 이겼다, 막았다 등등.”

“맞아. 적들이 가진 특별한 힘을 뚫을 수 있는 힘, 각성자들만 가질 수 있던 그 힘을 군대가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휴대폰을 보고 있는 그녀를 흘끔거린 내 말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류의 반격, 사람들의 구원. 모두 그녀가 바라던 일이다. 남들이 아는 것처럼 그 기적의 출처가 본인의 성좌인 건 아니지만 그녀가 기뻐하지 않을 리 없다.

다만 그녀의 표정은 금방 다시 굳었다.

“지금까지 위기를 넘기고 그 뒤로는 몇 번이나 이겨 낼 뻔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건 그 괴물들도 마찬가지니까.”

던전과 게이트가, 그곳에서 나오는 침략종이 처음부터 지금 수준인 것이 아니었다.

초창기에 나왔던 놈들은 지금 와선 하급으로 분류될 만큼 약하고 수도 적었으니까. 다만 우리가 놈들에 맞서 싸우며 강해지고 방법을 찾아내면, 침략종들 역시 그에 맞춰서 더 강한 개체와 더 많은 병사들을 뿜어내었다.

나는 이 관계를 어디선가 보았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서로가 미친 듯이 싸우며 미친 듯이 진화하던 루시의 마왕군과 타락 세계수의 감염체 군단과 너무 닮았다.

[경쟁을 통해 진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법칙입니다.]

루시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것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리 가볍게 생각하지 못했다.

“만약 가설 중 하나대로, 던전과 게이트가 각성자들의 시스템처럼 침략종과는 ‘별개의’ 작용이라면.”

“침략종들이 더 강해지는 걸 유도한다는 거야?”

“아니, 침략종들은 이미 강하지. 그 치열한 싸움과 경쟁으로 강해지고 성장하는 건 바로 우리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지연에게 쓰게 웃으며 답했다.

경쟁 상대가 없으면 성장은 물론 번식과 생명 활동을 포함한 모든 것이 멈춰 버리는 감염체들만큼은 아니지만 루시조차도 아무런 경쟁 상대 없이, 아무런 영감 없이 스스로 진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각성자들에게 주어진 상태창은 침략종들과 싸우라는 그 의도가 명확했다. 성좌들이 그 명백한 증거였다. 다만 이제 막 마력을 각성한 각성자들은 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약해빠졌다.

그런 그들은 물론 이 인류 전체를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채찍질하고 다그치는 게 게이트와 던전이라면.

“그 예상이 사실이라면, 대체 누가?”

이지연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 나는 그 질문에는 추측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 * *

“충성, 헉, 이지연 씨...!”

“들어가도 되겠죠?”

“무, 물론입니다!”

이지연이 유명해져 이런 점은 참 편하다. 별다른 절차를 생략하고 단번에 검문소를 통과한 우리는 통제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던전 앞에 채 1분이 안 되어 도달할 수 있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급하다고 들었거든요.”

그런 우리를 맞이한 건 군복을 입은 각성자. 대위 계급장과 함께 명찰에는 유지훈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국군이 새로 편제한, 마도병기 대대입니다. 그동안 보조로만 활동하며 그 위력을 입증했습니다. 오늘은 역할을 바꾸어, 각성자 분대가 그들을 보조할 겁니다.”

그가 이지연에게 품은 호의는 그냥 눈에 다 보였다. 하긴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부족한 곳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름답고 강하다. 또한 전장에서 싸우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앞에 서서 적들을 가로막는 그녀가 가진 영웅적인 면모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직전의 정찰에서 상급종으로 추정되는 개체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저희가 처리해 보려 하기는 하겠지만 혹시 위험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그는 이지연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하는 꼴을 보니 딱히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다.

[저 수컷은 이지연에게 발정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 줘.”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야.”

유독 이지연과 엮이면 한 번씩 헛소리를 하는 루시가 이번에도 헛소리를 시전했다. 당연히 그냥 넘겨 버렸지만 이번에는 어째 살짝 마음이 긁혔다.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 역시 부정하던 내 이성과 마음은 반대인 것인지.

“우리도 지켜만 보자고. 루시, 네가 만든 마법이 얼마나 잘 활용되고 있는지. 보고된 것만 보면 딱히 네게 도움이 될 만한 적들은 없어 보이지만.”

나도 군인들과 함께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한두 번 통과하는 게 아닌 공간의 균열을 통과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척박하기 짝이 없는 사막이었다.

“코어를 지키던 놈들이, 이번에는 먼저 덤벼듭니다!”

“지금까지 잠잠하더니 어째서, 설마 우리를 기다린 건가?”

다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간 순간, 적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정찰 병력들이 일제히 비상을 알려 왔다. 평범한 던전 속 괴물들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괴물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입구인 이곳으로 먼저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 상관없다. 어차피 싸우려 온 거 아니냐! 빨리 움직여!”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서둘러 부하들을 다그쳤다. 잔뜩 굳은 얼굴로 뛰고 있는 병사들을 보면 한때 군대를 다녀 온 입장에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인간이던 북한군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포로 협정 따위는 모르는 끔찍한 괴물들과 싸운다.

“쏴, 쏴 버려!”

곧 지휘관의 명령에 맞춰 화기들이 몰려오는 괴물들을 향해 화력을 뿜어내었다. 개인이 쓸 수 있는 대전차 미사일 정도 되는 것부터, 차량 위에 얹어서 쏘는 대구경까지.

동력으로 쓰이는 던전 코어의 크기에 따라 다양한 크기를 가진 그 무기들이 쏘아내는 것은 바로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법.

전장을 촬영하는 드론의 화면을 슬쩍 엿보니 선두에서 달려오는 검은 코뿔소 같은 대형의 괴물은 정면에 자줏빛으로 빛나는 무언가를 두르고 달려오고 있다.

루시가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라고 말한 저 방어막은 분명 일반적인 화기로는 뚫을 수 없는 것.

‘역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각성자들 없이도 적들의 특별한 힘은 아군의 공격에 뻥뻥 뚫리며 사라져 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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